[국내여행] 걷고 또 걷고 기차를 타고

[인제여행] 설악산 내설악, 만해 한용운의 얼이 서린 사찰, 피안의 절 '백담사' (2021.06.06)

푸레택 2021. 6. 6. 12:41

■ 아름다운 사찰 백담사를 찾아서

신록 우거진 초여름에 찾아간 설악산 내설악, 만해 한용운의 얼이 서린 사찰 ‘백담사’


△ 일시: 2021.06.05(토) 07:30~19:40
△ 장소: 내설악 백담사(百潭寺)
△ 참가: 김○빈, 이○재, 황○만, 김○택

■ 오늘의 일정

9호선 마곡나루역 급행(06:08)- 석촌역 8호선 환승- 복정역(07:08) 도착- 4인 합류- 설악산 백담사로 출발(07:30)- 가평휴게소- 인제3군단사령부- 인제 기린면 내린천 계곡- 내린천 래프팅 출발지- 인제군 북면 용대리- 백담사입구 주차장 도착-셔틀버스 탑승- 백담계곡- 백담사 주차장- 수심교- 백담사 관람- 만해기념관- 대암산 용늪 입구- 용늪마을- 인제군 서화면 서화리와 천도리(원통)- 인제38대교- 소양강 소양호- 철정휴게소- 복정역 3번 출구 도착(19:40)- 마곡나루역- 집으로!

2021.06.05토요일


고등학교 친구들과 함께 인제 내설악에 자리잡은 백담사를 다녀왔다. 오고가는 길에 내린천과 인제38다리, 소양강 소양호도 잠시 둘러보았다. 특히 양구에서 군복무하던 시절 오르내리던 대암산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대암산 용늪은 20년 전 「양구생태탐사」에 참가하여 다녀온 적이 있다. 인제군 서화면의 서화리와 천도리, 원통리를 지나올 땐 젊은 시절 군대 생활의 추억들이 아련히 떠올랐다.

주말이라서 길이 엄청 막힌다. 잠시 들른 가평휴게소, 주차장엔 차들이 가득 찼고 실내엔 사람들이 그야말로 인산인해다. 마스크만 쓰지 않았다면 코로나 이전 시절의 모습이다. 강원도 인제 기린면(麒麟面)으로 들어서니 곧 내린천(內麟川)이 나타난다. 내린천은 우리나라 하천 중에서 드물게 남에서 북으로 흐른다고 한다. 3군단사령부도 보이고 외출 나온 군인들 모습도 보인다. 그들의 모습을 보니 먼 옛날 젊은 시절 이곳 인제와 이웃하고 있는 양구에서 군복무하던 때의 기억들이 새롭다.

드디어 도착한 인제군 북면 용대리 백담사 입구. 버스 주차장에 붙어있는 인제관광안내도엔 다양한 즐거움이 넘실되는 곳, 하늘이 내린 인제 관광 8경을 소개하고 있다. 설악산 대청봉, 대암산 용늪, 대승폭포, 십이선녀탕 계곡, 내린천 계곡, 방동약수, 내설악 백담사, 합강정이 인제의 관광 8경이다.

백담사 입구 주차장에서 백담사까지 셔틀버스가 운행한다. 출발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고 어느 정도 관광객이 모이면 출발한다. 요금은 편도 성인 기준 2,500원이다. 백담사까지 약 6.5km이며 셔틀버스를 타고 가면 15분 남짓 걸린다. 버스가 좁고 가파른 백담계곡 절벽길을 아슬아슬하게 곡예하듯 올라간다. 겨울엔 눈이 많이 내리고 길이 얼어서 버스가 운행하지 않는다고 한다.

서로 비껴갈 수 없을 만큼 꼬불꼬불한 좁은 길에 내려오는 차를 먼저 보내기 위해 버스가 절벽 한쪽으로 비껴설 땐 나도 모르게 간담이 서늘해진다. 베테랑 기사겠지 하고 숙련된 기사를 믿는 수 밖에.

셔틀버스 차창너머로 보이는 백담계곡의 맑은 물은 신록을 가득 담아 초록빛이다. 먼 옛날 초임 학교 시절 설악산을 트레킹한 적이 있다. 바로 이곳 백담계곡을 지나 소청봉을 오르던 기억이 아련히 떠오른다. 그후 한번도 이곳을 찾지 않았으니 실로 40년 만에 다시 찾아오는 그리웠던 길이다.

백담계곡(百潭溪谷)은 강원도 인제군 북면에 있으며 용대2리 외가평에서 백담사에 이르는 계곡으로 길이는 약 6.5㎞에 이른다. 설악산에서 가장 깊고 그 규모가 방대한 계곡으로, 내설악 등반 코스의 시발점이 된다.

백담계곡에 흐르는 물은 너무 맑아서 옥(玉)에 비유될 정도이며, 열목어와 버들치 등 하류에서 상류 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냉수성 희귀어족들이 서식하고 있다고 한다. 골짜기의 곳곳에는 폭포와 작은 연못이 많고 태고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다. 백담사(百潭寺)라는 절의 이름은 설악산 대청봉에서 작은 웅덩이가 100개가 있는 지점에 사찰을 세운데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차창너머 얼핏얼핏 보이는 백담계곡의 절경 구경도 잠시 금세 백담사에 다달았다. 백담사 수심교(修心橋)를 지나며 보니 다리 양쪽 계곡 모래밭엔 자갈과 돌로 쌓은 수많은 소원돌탑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마치 어느 조각 작가의 멋진 작품을 보는 듯 하다.

김완하 작가의 詩, 백담사 수심교(修心橋)를 건너며를 감상해 본다.

그대와 내가 이 세상 인연으로
다할 수 없어
다시 만나야 한다면
그리하여 어느 비탈밭 작은 풀꽃으로
서로를 껴안을 수 있다면
우리는 여기 이 수심교를 건너와
물소리 쉬지 않는 곳에 뿌리를 내리자

밤이면 쏟아져내리는 별빛에 이마를 축이고
새벽으로 계곡마다 차오르는 안개에 젖어
때로는 한낮 차고 내리는 물소리에도 취해 누워
그 어느 것에도 우리들 그리움 남기지 않고
마른 바람에 흔들리는 잎 하나로 서걱일 수 있다면
세상 어둠 속 웅크린 돌멩이처럼 깨어
결코 잠들 수 없어도 좋으리

그대와 내가 이 세상 인연으로도
우리 다하지 못해
어딘가에서 다시 닿아야 한다면
그리하여 어느 자갈밭 마른 모래 틈에서라도
젖은 입술 뜨겁게 비빌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는 이 수심교를 건너
물소리 밀리는 허공에라도 서로의 뿌리를 움켜쥐자

수심교를 건너니 설악산 내설악 ‘백담사’의 아담하고 평화로운 모습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다. 백담사는 전통 사찰 제24호이며, 보물 제1182호다. 백담사는 신라 진덕여왕 원년(647년)에 자장율사가 창간하였다고 전해진다. 창건 당시 절 이름은 한계사(寒溪寺)라 했으며, 위치도 현재의 위치가 아니라 한계령 중턱 장수대 근방이었다. 이 한계사는 불터고 없어지고 지금은 석탑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불탄 자리에 43년 후에 다시 절을 중건했으나 이나마도 불타 버렸다고 한다.

그러다가 신라 원성왕 6년(790년) 이곳을 떠나 북쪽 30리 지점에 사찰을 세우고 이름을 운흥사(雲興寺)로 바꾸었다. 그러나 운흥사터도 어느새 폐허가 되고 세월이 흘러 고려 성종 3년(984년)에 변란으로 없어졌다가 성종 6년(987년)에 옛터의 북쪽 60리 지점에 다시 옮겨서 심원사(深源寺)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에 절이 수차례 불타 절터와 이름을 계속 바꾸었다. 백담사라는 이름은 세종 20년에 지어 불렀으나 다시 심원사로 바뀌었다가 정조 7년에 다시 ‘백담사’(百潭寺)로 바꾸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사찰이 계속 화재로 소실되어 폐허가 되므로 이름을 고쳐보려고 애를 쓰던 중 어느날 주지스님의 꿈에 신령스러운 백발노인이 나타나 청봉에서 지금의 절까지 담(潭)을 세어 1백개가 되는 장소에 사찰을 건립하면 삼재(水,火,風)를 면하리라고 현몽하기에 현재의 위치에 건립했으며, 담(潭)자는 불의 기운을 막을 수 있다고 하여 ‘백담사’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렇듯 ‘백담사’는 많은 화재와 사연을 지닌 채 1천3백년을 존속해 왔다. 1915년 백담사는 불타버리고, 4년후에 중건했으나 6.25 동란으로 다시 소실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중심 법당인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산령각, 화엄실, 법화실, 정문, 요사채 등이 있으며, 뜰에는 삼층석탑 1기가 있고 옛 문화재는 남아 있지 않다. 현존하는 부속암자로는 봉정암, 오세암, 원명암 등이 있다.

또 ‘백담사’는 만해 한용운(1879~1944) 선사가 1905년 이곳 백담사에서 머리를 깎고 입산수도하여 깨달음을 얻고, 《불교유신론》과 《십현담주해》를 집필하고 이라는 《님의 침묵》 시집을 발표하는 등 불교유신과 개혁을 추진하였으며, 일제의 민족 침탈에 항거하여 민족독립운동을 구상하였던 독립운동의 유적지로도 유명하다. (출처: 안내판 外 참고)

백담사 경내에는 시비(詩碑)가 많이 세워져 있다. 매월당 김시습의 「저녁 무렵」을 나지막이 읊조려 보았다.

천 봉우리 만 골짜기 그 너머로
한 조각 구름 밑 새가 돌아오누나
올해는 이 절에서 지낸다지만
다음 해는 어느 산 향해 떠나갈꺼나
바람 자니 솔 그림자 창에 어리고
향 스러져 스님의 방 하도 고요해
진작에 이 세상 다 끊어버리니
내 발자취 물과 구름 사이 남아있으리

晩意

萬壑千峰外
孤雲獨鳥還
此年居是寺 來歲向何處
風息松窓靜 香鎖禪室閑
此生吾己斷 樓迹水雲間

ㅡ 매월당 김시습, 「저물무렵」 전문

백담사 경내에는 만해 한용운 스님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흉상아래 씌여 있는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는 글귀가 인상적이다. ‘기룬’은 만해 특유의 시어로 초판에는 ‘긔룬’으로 되어 있었다. ‘기룬’은 그립다, 기릴만하다, 안쓰럽다, 기특하다 등으로 해석된다. 그리운 것은 다 이라는 뜻이다.

흉상 옆엔 만해가 지은 ‘행인과 나룻배’라는 시가 돌비석에 새겨져 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얕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만해기념관(卍海紀念館) 옆 뜰에 바닷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해당화가 붉은 꽃을 피우고 있고, 사찰의 꽃 불두화가 탐스럽게 피어있다. 작약도 붉은 꽃을 피워내며 지금이 초여름임을 알려준다.

만해기념관은 한용운 스님의 업적과 유물이 보관되어 있는 곳으로 기념관 내부에는 만해 생전의 유묵과 《님의침묵》 초간본과 백여 종의 판본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3·1독립운동 당시 활동하던 모습과 맹열한 독립론을 전개한 만해의 옥중 투쟁을 보여주는 자료들도 정리되어 있다.

만해기념관은 이곳 인제 백담사 외 여러 곳에 있다.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 내에도 '만해기념관'이 세워져 있고, 만해의 고향인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 있는 만해생가와 만해가 기거했던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에 있는 심우장도 기념관 역할을 한다. 성북동에 있는 심우장은 여러번 가 본 적이 있다.

만해기념관에 만해의 《님의 침묵》 초판 원본이 전시되어 있다. 만해의 시 님의 침묵’과 알 수 없어요 읊어본다.

님의 침묵 / 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盟誓)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源泉)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리에 들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알 수 없어요 / 한용운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垂直)의 파문(波紋)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塔)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해)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만해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은 어떤 삶을 사신 분이실까? 일제강점기 시절, 돈과 권력 어떤 유혹과 회유에도 넘어가지 않은 독립운동가 끝까지 변절하지 않은 만해의 기개가 느껴지는 일화 한 편을 읽어 보자.

총독부로부터 생계비와 연구비를 지원받는 조건으로 전향한 최남선이 탑골공원 근처에서 마주 오는 한용운을 향해 “오랜만이오. 만해” 라고 먼저 인사하자 그는 “당신이 누구요?” 라며 냉정하게 지나쳤다. 최남선이 “나 육당이오. 나를 몰라보겠소?” 라고 하자 “뭐, 육당? 내가 아는 육당은 죽었다! 그 사람은 내가 장례 지낸 지 오래인 고인이오.” 라고 일갈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출처: 이광이 작가 글에서 발췌함)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의 아명은 유천(裕天), 법명은 용운, 법호는 만해(萬海, 卍海)이다. 만해는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다. ‘나는 왜 중이 되었나’라는 그의 술회대로 넓은 세계에 대한 관심과 생활의 방편으로 집을 떠나 1896년 설악산 오세암에 입산하여 처음에는 절의 일을 거들다가 백담사에서 연곡(連谷)을 은사로 출가, 승려의 길로 들어선다. 

교학에 관심을 갖고 대장경을 공부했으며, 한문 불경을 우리말로 옮기는 불교의 대중화 작업에 주력했다. 1910년에는 불교의 유신을 주장하는 논저 《조선불교유신론》을 저술했다. 그해 ‘경술국치’를 당하자 중국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의 훈련현장을 찾아다니면서 독립정신과 민족혼을 심어주는 일에 전력했다. 1918년 불교포교와 민족정신 고취를 위한 월간 《유심(惟心)》을 간행했다. 

1919년 3·1독립운동 때 백용성 등과 불교계를 대표하여 참여했다. 그는 독립선언문의 내용을 둘러싸고 최남선과 의견이 충돌했다. 내용이 더 과감하고 혁신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결국 행동강령인 공약 3장만을 삽입시키는 데 그쳤다. 1920년 만세사건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3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1926년 우리 근대시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받는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했다. 이듬해 일제에 대항하는 조직 신간회(新幹會)를 결성하는 주도적 소임을 맡았다. 1938년 그가 직접 지도해오던 민족투쟁비밀결사단체 ‘만당사건(卍黨事件)’이 일어나 많은 동지들이 검거되고 자신도 고초를 겪었다. 해방을 한 해 앞둔 1944년 성북동의 심우장(尋牛莊)에서 중풍으로 별세했다. 미아리 화장장에서 다비된 뒤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치되었다. 

시집 《님의 침묵》은 특이하게도 앞에 ‘군말’과 뒤에 ‘독자에게’라는 설명의 글이 붙어있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薔薇花)의 님이 봄비라면 마시니의 님은 이태리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나니라. 연애가 자유라면 님도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들은 이름 좋은 자유에 알뜰한 구속을 받지 않더냐. 너에게도 님이 있너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羊)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 ‘군말’의 전문이다. 

‘님’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대상이다. 한용운이 승려이며, 시인이며, 독립투사인 점을 생각하면 님은 부처와 민족과 조국이라고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다. 보편적으로 ‘절대자’라고 할 수도 있다. (다음백과 外 참고)

백담사를 관람하고 돌아오는 길에 '대암산 용늪마을'을 거쳐 양구와 인제를 잇는 대교 인제 38대교, 소양강 소양호의 멋진 풍광을 잠시 감상했다. 인제군 서화면 서화리와 천도리를 지나오면서 오래 전 양구에서 군복무할 때 군인들 사이에서 회자되었던 유행어가 생각났다.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가겠다 그 뒤에 이어지는 말이 있었으니.. 그래도 양구보다는 나으리 그 양구 땅, 그 열악한 환경 속에서 힘들고 서러웠던 시절을 길고도 긴 3년의 젊은 세월을 함께 이겨낸 나의 옛 전우들에게 존경과 고마움을 보낸다.

블로그 「산처럼&산속이야기」에 멋진 시가 있어 옮겨 실으며 글을 마무리한다.

나는 뭉게구름이 되어
서부능선 위에 머물고
나는 한 마리 새가 되어
천화대 가장 높은 곳에 앉으리라

나는 한 송이 들꽃이 되어
화채능선을 지나는 산객의 마음을 달래고
나는 설악의 영롱한 이슬이 되어
천불동계곡에 흐르리라

/ 2021.06.06(일) 글, 사진: 김영택 씀

쓰다보니 글이 길어졌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사진] 2021.06.05(토) 인제군 용대리 백담사 外 촬영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