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학] 생태 과학 칼럼 모음

[과학읽기]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과학 혁명: 그리고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다 (2021.02.26)

푸레택 2021. 2. 26. 22:55

■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Sapiens》를 읽고

몇 달 전 큰 딸내미의 추천으로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가 쓴 《사피엔스 Sapiens》를 구입해 읽었다. 이 책이 유명하다는 것도 또 그 내용의 일부도 이미 알고 있었지만 막상 636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책을 소설 읽듯 읽을 수 없는지라 아직도 다 완독하지 못했다. 《사피엔스》는 2011년 이스라엘에서 히브리어로 출간된 이래 3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2015년에 초판이 발간되었는데 그 당시 벌써 전 세계 50개국에서 출간되어 800만부 초대형 베스트셀러였다고 한다. 인류학, 사회학, 생물학 등 분야를 넘나드는 오랜 연구 결과인 《사피엔스》는 2012년 영 이스라엘 아카데미 오브 사이언스에 선정되었고, 인문학 분야의 창의성과 독창성에 대한 폴로스키상도 수상했다고 한다.


이 책 날개에 적혀 있는 저자의 프로필을 옮겨 적어본다. 유발 하라리는 이스라엘 하이파에서 태어나, 2002년 영국 옥스포드 대학교에서 중세 전쟁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예루살렘의 히브리대학교에서 역사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전공은 중세 역사와 전쟁 역사이며, 역사와 생물학의 관계, 역사에 정의는 존재하는지, 역사가 전개됨에 따라 사람들은 과거에 비해 더 행복해졌는지 등 거시적 안목으로 역사를 보는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에서 가장 큰 영감을 받았다고 밝혔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생명의 미래에 관한 우리의 결정은 지금껏 시장의 맹목적인 힘과 덧없는 유행이 좌우해 왔다. 나는 이 책이 독자 스스로 우리는 무엇인가, 어디에서 왔는가, 어떻게 해서 이처럼 막대한 힘을 얻게 되었는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소망한다. 2
015년, 전 세계 모든 지역 사람들은 놀라운 신기술에 접근할 수단을 가지려 고군분투하고 있다. 하지만 이 기술은 우리에게 그것으로 무엇을 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유전공학, 인공지능 그리고 나노기술을 이용해 천국을 건설할 수도 있고, 지옥을 만들 수도 있다. 현명한 선택을 한다면 그 혜택은 무한할 것이지만, 어리석은 선택을 한다면 인류의 멸종이라는 비용을 치르게 될 수도 있다. 헌명한 선택을 할지의 여부는 우리 모두의 손에 달려 있다.

아직 다 완독하지는 못했지만 이 책에서 가장 감명깊게 읽은 내용은 제4부 과학혁명 중 19장 그리고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다이다. 저자는 경제 사다리의 맨 밑에 붙박여 있는 사람의 경우, 돈이 많으면 행복이 커진다. 돈이 실제로 행복을 가져다준다. 하지만 이는 어느 정도까지만이며, 그 정도를 넘어서면 돈은 중요치 않다.라고 말한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돈(물질)이 필요하지만 어느 단계를 넘어가면 행복이 돈에 의해 좌우되지 않다는 것이다. 역자는 후기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책의 주장에는 상당한 반론과 논란이 있을 수 있겠지만 거대한 질문을 제기하고 그에 대한 과학적인 답을 찾으려 노력하는 과정 자체가 핵심이다. 열린 마음으로 인간이라는 종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따라가 보자.

이 책은 인지혁명, 농업혁명, 인류의 통합, 과학혁명 등 4부로 구성되어 있다. 과학 혁명, 그리고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다’에는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영원한 생명도 불만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한번 상상해 보자. 모든 질병을 고치는 치료법, 노화를 효과적으로 막아주는 요법, 젊음을 영원히 유지하는 회춘요법 등을 찾아냈다고 하자. 그 직접적인 결과는 분노와 불안이 사상 유례없이 광범위하게 일어나는 현상일 것이다. 새로운 기적의 요법을 받을 돈이 없는 사람- 대다수의 사람-들은 격렬한 분노에 휩싸일 것이다. 역사를 통틀어 가난하고 압박받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위안해 온 것은 적어도 죽음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온다는 믿음이었다. 부자나 권력자도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들은 죽어야 하는데 부자는 영원히 젊고 아름답게 살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요법을 받을 경제적 여유가 있는 극소수의 사람들도 그렇게 희열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걱정해야 할 일이 많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요법이 생명과 젊음을 연장해 줄 수는 있지만, 시체를 되살리지는 못한다. 나와 내 사랑하는 이가 영원히 살 수는 있지만 트럭에 치이거나 테러리스트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만 그렇다고 생각해 보라. 얼마나 끔찍하겠는가. 영원히 살 수 있는 잠재력이 있는 사람들은 심지어 아주 조그만 위험을 무릅쓰는 것도 몹시 싫어하게 될 것이며, 배우자나 자녀, 친한 친구를 잃는 데 따르는 고통을 견딜 수 없게 될 것이다.

제4부 과학 혁명, ‘그리고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다’의
일부를 발췌하여 소개한다. 발췌한 내용이 꽤 길다. 긴 글이지만 한 번 읽어보고 싶으신 분은 시간날 때 천천히 정독하시면서 과연 무엇이 행복인지 곱씹어 보는 시간을 가져보시기를 권한다.

/ 2021.02.26 택

■ 과학 혁명: 그리고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다

지난 5백 년은 깜짝 놀랄 만한 혁명이 연쇄적으로 일어난 시기였다. 지구는 단일한 생태적, 역사적 권역으로 통일되었다. 경제는 지수적으로 성장했으며, 오늘날 인류는 예전이라면 동화에서나 들어보았을 부를 누리고 있다. 과학과 산업혁명 덕분에 인류는 초인적 힘과 실질적으로 무한한 에너지를 갖게 되었다. 사회질서는 완전히 바뀌었으며 정치, 일상생활, 인간의 심리도 그렇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더 행복해졌는가? 지난 5세기 동안 인류가 쌓아온 부는 우리에게 새로운 종류의 만족을 주었는가? 무한한 에너지원의 발견은 우리 앞에 무한한 행복의 창고를 열어주었는가? 좀 더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자면, 인지혁명 이래 험난했던 7만 년의 세월은 세상을 더욱 살기 좋은 것으로 만들었는가? 바람 없는 달 표면에 지워지지 않을 발자국을 남겼던 닐 암스트롱은 3만 년 전 쇼베 동굴에 손자국을 남겼던 이름 모를 수렵채집인보다 더 행복했을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농업과 도시, 글쓰기와 화폐 제도, 제국과 과학, 산업을 발전시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런 질문을 제기하는 역사학자는 드물다. 역사학자들은 우루크와 비빌론의 시민이 자신들의 수렵채집인 선조보다 행복했을까, 이슬람교가 등장해서 이집트인들의 삶이 더욱 만족스러워졌을까, 아프리카에서 유럽 제국이 붕괴한 것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행복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를 묻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은 사람이 역사를 향해 물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질문들이다. 현대 이데올로기와 정치 프로그램 대부분은 무엇이 진정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가에 대해서는 거의 모른다. 민족주의자는 정치적 자기 결정권이 우리 행복에 필수요소라고 믿는다. 공산주의자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시행되면 모두가 행복해질 것이라고 가정한다. 자본주의자는 오로지 자유시장만이 경제를 성장시키고 물질적 풍요를 가져오며, 사람들로 하여금 자립적이고 기업가적인 진취성을 갖도록 가르친다는 것이다.

만일 진지한 연구조사 결과 이런 가정이 틀렸다는 것이 증명된다면 어떨까? 만일 경제성장과 자립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지 않는다면, 자본주의의 이점은 무엇일까? 만일 대제국의 신민이 독립국의 신민보다 일반적으로 더 행복하다는 사실이 확인된다면, 예컨대 가나 사람들이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았던 떄가 내부에서 자라난 독재자의 지배를 받을 때보다 더 행복했던 것으로 판명된다면 어찌되는가?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탈식민지화 과정에 대해, 민족자결의 가치에 대해 뭐라고 말할 것인가?

이 모두는 가설적 가능성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역사학자들은 이런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고사하고 질문을 제기하는 것 자체를 피해왔기때문이다. 그들은 모든 것의 역사를 연구했다. 정치, 사회, 경제, 성 역할, 질병, 성적 특질, 식량, 의복,.....하지만 이것들이 인류의 행복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멈춰서 생각하는 일은 드물었다.

행복의 장기적 역사를 연구한 사람은 드물지만, 거의 모든 학자와 보통 사람이 여기에 대해 막연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흔히들 역사가 지속되는 기간 동안 인간의 능력은 계속 커졌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불행을 줄이고 자신의 소망을 충족하는 일에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그렇다면 우리는 중세 시대의 선조에 비해 틀림없이 행복할 것이다. 또한 중세 사람은 석기시대 수렵채집인보다 틀림없이 행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진보적 설명은 설득력이 없다. 익히 아는 바대로 새로운 재능, 행태, 기술이 반드시 더 나은 삶을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인류가 농업혁명에서 농경을 배웠을 때 집단으로서 이들이 환경을 바꾸는 힘은 커졌을지 모르지만 수많은 개인의 삶은 더 팍팍해졌다.

농부들은 수렵채집인보다 열심히 일해야 했지만, 먹는 음식은 영양가도 더 적었고 근근히 버틸 양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질병과 착취에 훨씬 더 많이 노출되었다. 이와 비슷한 예로, 유럽 제국의 확대는 아이디어와 기술과 농작물을 이동, 순환시키고 새로운 상업로를 개척한 덕분에 인류의 집단적 힘을 크게 늘렸다. 하지만 수백 만 명의 아프리카 원주민, 호주 원주민에게는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인간이 권력을 남용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은 이미 증명되어 있다. 이를 감안하면 사람들이 더 많은 영향력을 누리면 더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순진한 태도로 보인다. 이 견해에 반대하는 사람 중 일부는 정반대 입장을 취하여, 인간의 능력과 행복 사이에는 역관계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권력은 부패하게 마련이며, 인류가 점점 더 많은 힘을 갖게 될수록 우리의 진정한 욕구와는 동떨어진 차가운 기계적 세상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들에 따르면, 진화의 결과 우리의 마음과 신체는 수렵채집인의 삶에 맞도록 주조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처음에 농업으로, 그다음에 산업으로 이행한 탓에, 우리는 부자연스러운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선고를 받았다. 타고난 성향과 본능을 모두 표현할 수 없으므로 가장 깊은 욕구를 만족시킬 수 없는 삶이라는 것이다. 도시 중산층의 안락한 삶을 이루는 어떤 것도 매머드 사냥에 성공한 수렵채집인 무리가 경험한 흥분의 도가니와 형언할 수 없는 기쁨에 근접할 수 없다. 새로운 발명이 하나씩 이루어질 때마다 우리는 에덴의 낙원으로부터 몇 킬로미터씩 멀어질 뿐이다.

하지만 이처럼 모든 발명의 뒤에서 어두운 그림자만을 보려는 낭만적 고집은 진보가 필연이라는 믿음에 못지않게 교조적이다. 우리는 우리 내면의 수렵채집인과 접촉이 끊겼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꼭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예컨대 지난 2세기 동안 발전한 현대의학 덕분에 어린이 사망률은 33퍼센트에서 5퍼센트 이하로 떨어졌다. 이 사실이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더라면 사망했을 어린이 본인뿐 아니라 그 가족과 친구들의 행복에 엄청나게 기여했다는 것을 의심할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이보다 좀 더 미묘한 것은 중도를 취하는 입장이다. 과학혁명이 일어나기 전에는 권력과 행복 간에 분명한 상관관계가 없었다. 중세 농부는 실제로 그들의 수렵채집인 조상보다 더욱 비참하게 살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난 몇 세기 동안 인류는 스스로의 능력을 더욱 현명하게 사용하는 법을 배웠다. 현대 의학의 승리는 한 예에 불과하고, 이외에도 전대미문의 성취가 많다. 폭력은 급격히 줄었고, 국제전은 사실상 사라졌으며, 대규모 기근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하지만 이 또한 과도한 단순화다. 첫째, 낙관적 평가의 표본으로 삼은 기간이 너무 짧다. 인류 대다수가 현대 의학의 결실을 누리기 시작한 것은 1850년 이후의 일이고, 어린이 사망률이 급격하게 떨어진 것은 20세기에 일어난 현상이다. 대규모 기근은 20세기 중반까지도 상당 지역에 큰 피해를 입혔다. 1958~1961년 중국 공산당의 대약진운동 당시 1천만~5천만 명이 굶어 죽었다. 국제전이 드물어진 것은 1945년 이후에 와서였는데 대체로 핵무기로 인해 인류가 절멸할 위협이 새로 등장한 덕분이었다. 따라서 판단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최근 몇십 년이 인류에게 전대미문의 황금시대였지만, 이것이 역사의 흐름이 근본적으로 바뀐 것을 대변하는 현상인지 아니면 단명할 행운의 회오리바람에 불과한지 말하기는 이르다. 우리는 현대성을 판단할 때 21세기 서구 중산층의 시각을 취하려는 유혹을 크게 느끼지만, 우리는 19세기 웨일스의광산 노동자, 중국의 아편 중독자, 태즈메이니아 원주민의 시각을 잊어서는 안 된다. 원주민 트루가니니는 호머 심슨(미국 TV 애니메이션 시리즈 심슨가족의 등장인물-옮긴이)보다 그 중요성이 덜하지 않다.

둘째, 지난 반세기는 짤막한 황금시대였는데 이것조차 미래에 파국을 일으킬 씨를 뿌린 시기였다는 사실이 나중에 확인될지도 모른다. 지난 몇십 년간 우리는 지구의 생태적 균형을 수없이 많은 새로운 방법으로 교란해 왔으며, 이것이 끔찍한 결과를 빚고 있는 중은 듯하다. 우리가 무모한 소비의 잔치를 벌이면서 인류 번영의 기초를 파괴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가리키는 증거는 많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다른 모든 동물의 운명을 깡그리 무시할 때만 현대 사피엔스가 이룩한 전례 없는 성취를 자축할 수 있다. 우리는 스스로를 질병과 기근으로부터 보호해주는 물질적 부를 자랑하지만, 그중 많은 부분은 실험실의 원숭이, 젖소, 컨베이어 벨트의 병아리의 희생 덕분에 축적된 것이다. 지난 2세기에 걸쳐 수백억 마리의 동물들이 산업적 착취체제에 희생되었으며, 그 잔인성은 지구라는 행성의 연대기에서 전대미문이었다. 만일 우리가 동물권리 운동가들의 주장을 10분의 1만이라도 받아들인다면, 현대의 기업농은 역사상 가장 큰 범죄를 저지르는 중이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다. 지구 전체의 행복을 평가할 때 오로지 상류층이나 유럽인이나 남자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잘못이다. 인류만의 행복을 고려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잘못일 것이다.

◇ 행복 계산하기

지금껏 우리는 행복이 주로 건강이나 식사, 부와 같은 물질적 요인의 산물인 것처럼 이야기해 왔다. 사람들이 더 부유하고 건강해지면 더 행복할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잠깐, 그게 정말 그렇게 명백한 일일까? 철학자, 사제, 시인들이 행복의 본질을 수천 년간 곰곰이 생각해 온 결과, 그들은 우리의 사회적, 윤리적, 정신적 요인들도 물질적 조건만큼이나 행복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결론지었다. 어쩌면 현대의 풍요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번영에도 불구하고 소외와 무의미 때문에 크게 고통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보다 잘 살지 못했던 선조들이 공동체, 종교, 자연과의 결합 속에서 커다란 만족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최근 몇 십 년간 심리학자들과 생물학자들은 무엇이 실제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가를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도전에 나섰다. 그것은 돈일까, 가족일까, 유전일까 아니면 덕성일까?

과제의 첫 단계는 무엇을 측정해야 하는지를 규정하는 것이다. 행복에 대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정의는 '주관적 안녕'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행복은 자신 속에서 스스로 느끼는 무엇이다. 다시 말해 내 삶이 진행되는 방식에 대해 느끼는 즉각적인 기쁜 감정이나 장기적인 만족감이다. 그것이 내 속에서 느끼는 감정이라면, 어떻게 외부에서 측정할 수 있을까?

어쩌면 사람들에게 어떤 기분을 느끼느냐고 물어보면 될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사람들의 행복감을 평가하려는 심리학자와 생물학자는 설문지를 나눠주고 그 결과를 계산한다. 주관적 안녕을 묻는 전형적 설문지는 인터뷰 대상에게 질문을 던지고, 거기에 동의하는 정도를 0에서 10 사이의 척도로 평가하게 한다. “나는 나 자신이 이런 모습이라는 데 만족한다. 삶은 보람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미래를 낙관한다. 삶은 좋은 것이다.연구자는 모든 답의 점수를 합산해서 인터뷰 대상이 느끼는 주관적 안녕의 전반적 수준을 계산한다. 그러고는 그 결과를 써서 행복을 다양한 객관적 요인과 연관시켜 본다. 연봉 10만 달러를 받는 사람 1천 명과 5만 달러를 버는 1천 명을 비교하는 연구가 있다고 하자. 연구 결과 첫 번째 집단의 주관적 안녕 수준이 8.7이고 두 번째 집단의 평균이 7.3에 불과했다면, 부와 주관적 안녕 사이에는 양의 상관관계가 있다는 결론을 합리적으로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돈이 행복을 가져다 준다는 것이다. 이와 동일한 방법으로 민주주의 체제하에서 사는 사람과 독재 체제하에서 아는 사람 중 어느 쪽이 행복한지를 조사할 수도 있고, 기혼자와 독신자, 이혼자를 비교해 볼 수도 있다.

이런 조사는 역사학자에게 과거의 부, 정치적 자유, 이혼율을 검토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다. 만일 민주체제하의 사람들이 더 행복하고 이혼자보다 배우자가 있는 사람이 더 행복하다면, 역사가는 지난 몇십 년간의 민주화 과정은 인류의 행복에 기여한 데 반해 이혼율의 증가는 그 반대의 경향을 나타냈다고 주장할 근거가 있는 셈이다. 이런 접근법에 흠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허점을 지적하기 전에 이런 접근법으로 찾아낸 발견을 검토할 가치가 있다.

흥미로운 결론 중 하나는, 돈이 실제로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어느 정도까지만이며, 그 정도를 넘어서면 돈은 중요치 않다. 경제 사다리의 맨 밑에 붙박여 있는 사람의 경우, 돈이 많으면 행복이 커진다. 만일 당신이 식당 아르바이트로 연간 1,200만 원을 벌며 혼자 아이를 키우는 여성인데 갑자기 5억 원짜리 복권에 당첨되었다면, 당신의 주관적 안녕은 오랫동안 큰 폭으로 높아진 상태를 유지할 것이다. 더 이상 빚의 늪 속으로 빠져들지 않고 아이들을 먹이고 입힐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연봉 2억 5천만 원을 받는 대기업 임원이 10억 원짜리 복권에 당첨되었다거나 회사 이사회에서 갑자기 연봉을 두 배로 올리기로 결정했다면, 이로 인해 높아진 행복감은 몇 주밖에 지속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경험적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것은 장기적으로는 기분에 큰 차이를 만들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더 세련된 차를 사고, 저택 같은 집으로 옮기고, 시바스 리갈 12년산 대신에 밸런타인 30년을 마시는 데 익숙해지겠지만, 이 모든 것은 머지않아 예외가 아닌 일상이 되어버릴 것이다.

또 다른 흥미로운 발견은 질병과 행복의 관계다. 질병이 단기적인 행복감을 낮추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장기적인 행복감을 감소시키는 것은 두 가지 경우뿐인데, 하나는 상태가 점점 나빠지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 병이 사람을 쇠약하게 만드는 지속적인 고통을 주는 것이다. 당뇨병 같은 만성질환으로 진단을 받은 사람은 단기간 우울해지는 것이 보통이지만, 만일 병이 더 나빠지지만 않는다면 사람들은 새로운 상황에 적응한다. 이들이 평가하는 주관적 행복은 건강한 사람과 같은 수준이다.

중산층 쌍둥이인 루시와 루크가 주관적 안녕 연구에 참여하기로 했다고 치자. 심리학 실험실에서 돌아오는 길에, 루시의 차가 버스와 부딪치는 사고가 났다. 루시는 뼈가 여러 개 부러졌으며, 한쪽 다리를 영원히 절게 되었다. 구조팀이 찌그러진 차를 부수고 그녀를 꺼내는 순간 휴대전화가 울리는데, 그 너머에서 루크가 30억 원짜리 복권에 당첨되었다고 외친다. 2년 후 루시는 다리를 절 것이고, 루크는 지금보다 훨씬 더 부자가 될 것이다. 하지만 심리학자가 추적 연구를 위해 들렸을 때 이들의 행복감에 대한 답변은 사고가 난 2년 전 그날의 것과 동일한 수준일 가능성이 크다.

가족과 공동체는 우리의 행복에 돈과 건강보다 더 큰 영향을 주는 것으로 보인다. 가족간에 유대감이 강하고 구성원을 잘 돕는 공동체에 소속된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즉 가족이 제 구실을 못하거나 소속될 공동체를 찾지 못한 이들에 대해서 훨씬 행복하다. 결혼은 특히 중요하다. 좋은 결혼은 행복과,나쁜 결혼은 불행과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사실은 각종 연구에서 거듭 확인되고 있다. 이것은 경제적 조건은 물론이거니와 신체적 조건과도 상관없다. 무일푼의 병자라도 사랑하는 배우자, 헌신적 가족, 따스한 공동체의 보살핌을 받는 사람은 소외된 억만장자보다 행복감이 높다. 다만 병자의 가난이 너무 심하지 않고, 그 병이 퇴행성이거나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전제하에서 그렇다.

그렇다면, 지난 2세기 동안 물질적 조건이 크게 개선된 효과가 가족과 공동체의 붕괴로 상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오늘날의 평균적 사람이 1800년보다 더 행복하지 않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심지어 우리가 그렇게 높이 평가하는 자유조차 나쁘게 작용할 수 있다. 우리는 배우자와 친구, 이웃을 선택할 수 있지만, 그들은 우리를 버리는 쪽을 선택할 수 있다. 개인이 각자의 삶의 길을 결정하는 데 전례 없이 큰 힘을 누리게 되면서, 우리는 남에게 헌신하기가 점점 더 힘들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공동체와 가족이 해체되고 다들 점점 더 외로워지는 세상에 살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행복이 부나 건강, 심지어 공동체 같은 객관적 조건에 전적으로 좌우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행복은 객관적인 조건과 주관적 기대 사이의 상관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당신이 손수레를 원해서 손수레를 얻었다면 만족하지만, 새 페라리를 원했는데 중고 피아트밖에 가지지 못한다면 불행하다고 느낀다. 복권 당첨이든 끔찍한 자동차 사고든 시간이 지나면 행복에 미치는 영향이 비슷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태가 좋아지면 기대도 부풀게 마련이라, 객관적 조건이 극적으로 좋아져도 불만일 수 있다. 상황이 나빠지면 기대가 작아지기 마련이라, 심각한 질병에 걸린 사람이라도 행복감은 이전과 비슷할 수 있다.

이런 사실을 알기 위해 심리학자의 숱한 설문지가 필요하진 않다. 예언자, 시인, 철학자들은 수천 년 전부터 가진 것에 만족하는 것이 원하는 것을 더 많이 가지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현대의 연구조사 결과에서도 수많은 숫자와 도표의 뒷받침을 받아 옛 사람들과 똑같은 결론이 나온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인간의 기대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은 행복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만일 행복이 부나 건강, 사회관계 같은 객관적 조건에만 좌우된다면, 행복의 역사를 조사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웠을 것이다. 행복이 주관적 기대에 좌우된다는 발견은 역사학자의 일을 훨씬 더 어렵게 만든다. 현대인에게는 사용할 수 있는 안정제와 진통제가 얼마든지 있지만, 안락함과 즐거움은 더 크게 기대하면서 불편함과 불쾌함은 더 참지 못하게 되었다. 그 결과 우리가 선조들보다 더 많은 고통을 겪는다고 해도 무리가 아닐 정도다.

이런 생각의 노선을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다. 문제는 우리의 정신 속에 깊이 박혀 있는 추론의 오류에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현재 얼마나 행복한지, 혹은 과거의 사람들이 얼마나 행복했는지를 추측하고 상상하려 할 때 우리 자신을 그들의 상황에 대입해 본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정확하지 않다. 우리의 기대를 타인의 물질적 조건에 끼워넣기 때문이다. 예컨대 현대의 풍요 사회에서는 매일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는 것이 관습이다. 대조적으로 중세 농부는 몇 개월간 한 번도 씻지 못했으며, 옷을 갈아 입는 일은 거의 없었다. 불결하게 지독한 냄새가 나는 채로 사는 것은 우리 입장에서는 혐오감이 드는 일이지만, 중세 농부는 개의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오랫동안 세탁하지 않은 셔츠의 촉감과 냄새에 익숙했다. 옷을 갈아입고 싶은데 그러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가졌다. 적어도 의복에 관해서는 만족했다.

생각해 보면 놀랄 일도 아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침팬지 사촌은 평생 동안 씻는 일이 거의 없으며, 옷도 갈아입지 않는다. 우리도 기르는 개나 고양이가 매일 샤워하거나 코트를 갈아입지 않는다고 해서 혐오감을 느끼기는커녕 거리낌 없이 이들을 토닥이고 끌어안고 입을 맞춘다. 풍요로운 사회의 어린이들도 샤워를 싫어하는 일이 흔하다. 다들 멋진 관습이라고 믿고 있는 샤워를 아이들이 받아들이게 만들려면 몇 년에 걸친 교육과 부모의 훈육이 필요하다. 이 모두가 기대의 문제다. 만일 행복이 기대에 의해 결정된다면, 우리 사회를 떠받치는 두 기둥- 대중 매체와 광고 산업-은 지구의 만족 저장고를 생각지 않게 고갈시키는 중일 수도 있다.

만일 당신이 5천 년 전의 어느 마을에 사는 18세 젊은이라면, 아마도 스스로 외모가 괜찮다고 생각할 것이다. 마을에 남자라고는 50명밖에 안 되고, 대부분은 늙었거나 얼굴에 상처나 주름이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아직 어린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신이 오늘날의 십대 청소년이라면, 스스로 부적격자라고 느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설사 학교에서 만나는 다른 애들이 못생겼다 하더라도 그렇다. 당신은 그애들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TV나 페이스북, 대형 광고판에서 매일 보는 영화배우, 운동선수, 슈퍼모델과 비교할 것이기 떄문이다.

그렇다면 제3세계의 불만은 단지 가난이나, 질병, 부패나 정치적 압제뿐 아니라 제1세계의 규범에 노출된 탓이기도 하지 않을까? 평균적인 이집트인이 기아나 질병, 폭력으로 사망할 확률은 람세스 2세나 클레오파트라의 치하에서보다 호스니 무바라크의 치하에서 훨씬 더 낮다. 대부분의 이집트인에게 물질적 조건이 이토록 좋았던 시대는 또 없었다. 그렇다면 2011년 이들은 자신들의 행운에 감사하며 거리에서 춤을 추고 있었어야 하겠지만, 사실 그들은 무바라크를 축출하기 위해 격렬하게 들고 일어났다. 이들은 자신을 파라오 치하의 선조들과 비교한 게 아니라 동시대 부유한 서방국가 사람들과 비교했기 때문이다.

현실이 그와 같다면, 심지어 영원한 생명도 불만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한번 상상해 보자. 모든 질병을 고치는 치료법, 노화를 효과적으로 막아주는 요법, 젊음을 영원히 유지하는 회춘요법 등을 찾아냈다고 하자. 그 직접적인 결과는 분노와 불안이 사상 유례없이 광범위하게 일어나는 현상일 것이다. 새로운 기적의 요법을 받을 돈이 없는 사람- 대다수의 사람-들은 격렬한 분노에 휩싸일 것이다. 역사를 통틀어 가난하고 압박받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위안해 온 것은 적어도 죽음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온다는 믿음이었다. 부자나 권력자도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들은 죽어야 하는데 부자는 영원히 젊고 아름답게 살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요법을 받을 경제적 여유가 있는 극소수의 사람들도 그렇게 희열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걱정해야 할 일이 많이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요법이 생명과 젊음을 연장해 줄 수는 있지만, 시체를 되살리지는 못한다. 나와 내 사랑하는 이가 영원히 살 수는 있지만 트럭에 치이거나 테러리스트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만 그렇다고 생각해 보라. 얼마나 끔찍하겠는가. 영원히 살 수 있는 잠재력이 있는 사람들은 심지어 아주 조그만 위험을 무릅쓰는 것도 몹시 싫어하게 될 것이며, 배우자나 자녀, 친한 친구를 잃는 데 따르는 고통을 견딜 수 없게 될 것이다.

◇ 화학적 행복

사회과학자들은 행복을 묻는 설문지를 배포하고 그 결과를 부나 정치적 자유 같은 사회경제적 요인과 연관시킨다. 생물학자들도 똑같은 설문지를 사용하지만, 사람들의 응답 결과를 생화학적이고 유전적 요인과 연관 짓는다. 그들이 알아낸 사실은 충격적이다.

생물학자들에 따르면, 우리의 정신세계와 감정세계는 수백만 년의 진화에 의해 만들어진 생화학적 체제의 지배를 받는다. 다른 모든 정신적 상태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행복도 월급이나 사회관계, 정치적 권리 같은 외부 변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신경, 뉴런, 시냅스 그리고 세로토닌, 도파민, 옥시토신 등의 다양한 생화학 물질에 의해 결정된다. 복권에 당첨되거나 집을 사거나 승진하거나 심지어 진정한 사랑을 찾거나 하는 일로 행복해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오로지 하나밖에 없다. 바로 신체 내부의 쾌락적인 감각이다. 방금 복권에 당첨되거나 새로운 연인을 찾아서 기뻐 날뛰는 사람은 실제로 돈이나 연인에게 반응하는 것이 아니다. 혈관 속을 요동치며 흐르는 다양한 호르몬과 뇌의 여러 부위에서 오가는 전기신호의 폭풍에 반응하는 것이다.

지상의 낙원을 창조하려는 희망을 가진 모든 이에게는 불행한 일이지만, 우리의 내부 생화학 시스템은 행복 수준을 상대적으로 일정하게 유지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는 듯하다. 자연선택은 보통 말하는 의미의 행복을 선호하지 않는다. 행복은 은둔자의 유전적 계통은 끊어질 테지만, 걱정을 많이 하는 부모의 유전자는 다음 세대로 계속 전해질 것이다. 진화에서 행복과 불행이 맡는 역할은 생존과 번식을 부추기거나 그만두게 하는것과 관련해서만 의미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진화의 결과 우리가 너무 불행해하지도 행복해하지도 않게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지 모른다. 진화는 우리로 하여금 일시적으로 몰려오는 쾌락적 감각을 누릴 수 있게 했지만, 그런 느낌은 결코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조만간 이 느낌은 가라앉고, 불쾌한 느낌에게 자리를 내준다.

예를 들어, 진화는 남자로 하여금 임신 가능한 여자와 성관계를 해서 유전자를 퍼뜨리면 쾌감이라는 보상이 주어지도록 만들었다. 만일 성관계에 따르는 쾌감이 그리 크지 않다면, 힘들여 그런 수고를 하려 드는 남자는 드물 것이다. 그런데 또한 우리는 그 쾌감이 재빨리 사라지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이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만일 오르가즘이 영원히 계속된다면 행복한 남자는 음식에 흥미를 잃은 탓에 굶어 죽고 말 것이고, 다른 임신 가능한 여자를 찾는 수고를 하려 들지도 않을 것이다.

인간의 생화학 시스템을 극심한 더위가 다가오든 눈보라가 몰아치든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해야 하는 공조 시스템으로 비교하는 학자도 있다. 사고가 생겨 온도가 일시적으로 바뀔 수는 있지만, 공조 시스템은 언제나 온도를 설정된 값으로 되돌려 놓는다. 어떤 시스템은 섭씨 25도에 맞춰져 있고, 어떤 시스템은 20도에 맞춰져 있다. 인간의 행복 조절 시스템 역시 사람마다 다르다. 1에서 10까지의 척도로 볼 때 어떤 사람들은 즐거운 생화학 시스템을 갖고 태어난다. 그런 사람은 기분이 6에서 10 사이에서 움직이다가 시간이 지나면 8에서 안정된다. 그런 사람은 매우 행복하다. 설령 그가 대도시 변두리에 살며 주식시장 붕괴로 돈을 모두 날리고, 당뇨병이 있다는 진단을 받더라도 말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우울한 생화학 시스템을 가지고 태어난다. 기분은 3에서 7 사이로 움직이고, 5에서 안정된다. 그런 사람은 항상 우울하다. 설사 그가 잘 짜여진 공동체의 지원을 받고, 수백만 달러짜리 복권에 당첨되며, 국가대표 운동선수 같은 건강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

우리의 우울한 친구는 심지어 아침에 5천만 달러 복권에 당첨되고, 정오에는 에이즈와 암을 동시에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고, 오후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에 평화를 이룩하고, 저녁에는 여러 해 전에 실종되었던 딸을 찾는다고 해도 행복지수 7 이상을 경험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의 뇌는 애초에 유쾌한 기분과는 거리가 멀게 생겨먹은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똑같다.

한번 당신의 가족과 친구들을 생각해보라.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상대적으로 즐거운 상태를 잘 유지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세상이 그의 발치에 어떤 선물을 놓아주든 항상 언짢은 상태인 사람도 있다. 사람들은 내가 직장을 바꾸면, 결혼을 하면, 쓰고 있던 소설을 끝마치면, 새차를 사면, 융자금을 모두 갚으면... 그러면 엄청나게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지만, 원하는 것을 실제로 얻을지라도 조금도 더 행복해지지는 않는 것 같다. 차를 사거나 소설을 쓰는 것이 우리의 생화학 시스템을 바꾸지 못한다. 아주 짧은 기간 동안 생화학 시스템을 흔들어 놓을 수는 있지만, 그것은 곧 원래의 설정된 값으로 돌아오게 마련이다.

이런 사실은 위에서 언급한 심리학과 사회학의 연구 결과와 아귀가 잘 맞지 않아 보인다. 예컨대 결혼한 사람은 독신자들보다 행복한 것이 사실 아닌가? 답은 이렇다. 첫째, 이런 연구 결과들은 상관관계를 밝힌 것뿐이다.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결과인지는 일부 연구자들이 가정한 것과 반대 방향일 수도 있다. 결혼한 사람들이 이미 이혼했거나 원래 독신인 사람들보다 행복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혼이 필연적으로 행복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행복이 결혼의 이유일 수도 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세로토닌, 도파민, 옥시토신이 결혼을 일으키고 유지하게 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즐거운 생화학 시스템을지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행복하며, 삶의 만족도도 크다. 그런 사람들은 배우자로서 더욱 매력적이며, 결과적으로 결혼할 가능성이 더 많고, 이혼할 가능성은 더 적다. 우울하고 불만스러워하는 배우자보다 행복하고 만족해 하는 배우자와 함께 사는 것이 훨씬 더 쉽지 않은가. 결혼한 사람들이 독신인 사람보다 평균적으로 더 행복한 것은 사실이지만, 생화학적으로 우울한 경향이 있는 여성은 남편과 함께 지낸다고 해서 반드시 더 행복해지지 않는다.

게다가 대부분의 생물학자는 광신자가 아니다. 행복이 주로 생화학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하는 것이지, 심리학적, 사회학적 요인의 영향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정신적 온도조절 시스템은 일정한 범위 내에서 행동의 자유를 가지고 있다. 감정적 경계의 하한선과 상한선을 넘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만, 결혼과 이혼은 그 중간의 어느 지점에 있느냐에 영향을 줄 수 있다. 행복지수 5를 지니고 태어난 사람은 길거리에서 영광적으로 춤을 출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좋은 결혼생활은 그녀로 하여금 때때로 지수 7을 누릴 수 있게 해줄 것이며, 지수 3의 낙담을 피하게 도와줄 것이다.

우리가 행복에 대한 생물학적 접근법을 받아들인다면, 이것은 곧 역사는 별로 중요치 않다는 의미가 된다. 대부분의 역사적 사건은 우리의 생화학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사는 세로토닌 분비를 유발하는 외부자극을 변화시킬 수는 있지만, 그 결과로 나타나는 세로토닌 수준을 바꾸지는 않는다. 따라서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만들 수 없다. 중세 프랑스의 농부와 현대 파리의 은행가를 비교해보자. 농부는 돼지우리가 내려다보이는 진흙 오두막에서 난방도 없이 살았다. 하지만 은행가는 샹젤리제가 내려다보이는 호화로운 펜트하우스에서 각종 최신 장치를 완비해 놓은 채 살고 있다.

당신은 즉각 기업가가 중세 농부보다 훨씬 더 행복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진흙 오두막이나 펜트하우스, 샹젤리제가 우리의 기분을 결정짓지 않는다. 세로토닌이 그렇게 한다. 중세의 농부가 자신의 진흙 오두막을 완성했을 때, 뇌의 뉴런은 세로토닌을 분비해 행복 수치를 10으로 올렸다. 2014년 이 기업가가 멋진 펜트하우스의 대금을 모두 치렀을 때, 그의 뇌에 있는 뉴런은 농부와 비슷한 양의 세로토닌을 분비해 역시 10으로 수치를 올렸다. 펜트하우스 최상층이 진흙 오두막보다 훨씬 더 안락하다는 사실은 뇌에 아무런 차이를 일으키지 않는다. 뇌가 오로지 아는 것은 현재 세로토닌 수치가 10이라는 사실 뿐이다. 따라서 기업가는 자신의 태고조의 태고조 할아버지인 중세의 가난한 농부보다 조금도 더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이 원리는 개인의 삶에서만이 아니라 거대한 집단적 사건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예컨대 프랑스 혁명을 보자. 혁명가들은 왕을 처형하고, 농민들에게 땅을 분배하고, 인권선언을 하고, 귀족의 특권을 폐지하고, 유럽 전체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느라 바빴다. 하지만 이 중 어느 것도 프랑스인의 생화학 시스템을 바꾸지는 못했다. 그 결과, 혁명이 초래한 모든 정치적, 사회적, 이데올로기적, 경제적 격변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프랑스인의 행복에 미친 영향은 크지 않았다. 유전자 복권에서 '즐거운 생화학'에 당첨된 사람은 혁명 전이나 후나 여전히 행복했고, '우울한생화학'을 가진 사람은 과거 루이 14세나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했던 것과 똑같이 신랄한 불평을 로베스피에르와 나폴레옹에게 던졌다. 만일 그렇다면 프랑스 혁명에 무슨 좋은 점이 있었을까? 사람들이 조금도 더 행복해지지 않았다면, 그 모든 혼란과 공포, 피와 전쟁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생물학자들이라면 결코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런 저런 정치 혁명이나 사회 개혁이 자신들을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신체의 생화학은 거듭해서 이들을 속인다.

실질적인 중요성을 지닌 역사적 진전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 오늘날 우리는 마침내 진정한 행복의 열쇠가 생화학 시스템의 손에 달렸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정치적, 사회적 개혁이나 반란이나 이데올로기에 시간을 그만 낭비하고, 대신 우리를 정말로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일에, 즉 우리의 생화학 시스템을 조작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다. 우리가 뇌의 생화학 시스템을 이해하고 적절한 요법을 개발하는데 수십억 달러를 투자한다면, 혁명을 일으키지 않아도 과거 어느때보다도 사람들을 더욱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

일례로 프로작가(미국 일라이 릴리 제약사가 개발한 항우울제-옮긴이)은 생화학 시스템 자체는 바꾸지 않지만 세로토닌 수치를 높여줌으로써 사람들을 우울증에서 빠져나오게 돕는다. 과거 뉴에이지 세대의 유명한 구호만큼 생물학자들의 주장을 핵심적으로 대표하는 것은 또 없다. 행복은 내부에서 시작된다. 돈이나 사회적 지위, 성형수술, 아름다운 집, 높은 자리는 우리에게 전혀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할 것이다. 지속적 행복은 오로지 세로토닌, 도파민, 옥시토신에서만 온다.

미국 대공황의 절정기인 1932년 출간된 올더스 헉슬리의 디스토피아 소설 《멋진 신세계》 속에서, 행복은 최고의 가치이며 향정신성 약물이 경찰과 투표 대신 정치의 기반 자리를 차지한다. 모든 사람은 날마다 소마라는 약을 복용하는데, 생산성과 효율성을 해치지 않으면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합성 마약이다. 지구 전체를 지배하는 세계 정부는 전쟁이나 혁명, 파업이나 시위로 인해 위협받는 일이 전혀 없다. 모든 사람이 현재의 상황에 어떻든 대단히 만족하기 때문이다. 헉슬리의 미래상은 조지 오웰의 《1984》보다 훨씬 더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대부분의 독자는 헉슬리가 그려내는 세상을 괴물 같다고 느낀다. 하지만 왜 그런지 설명하기는 힘들다. 모든 사람이 항상 행복하다는데, 거기에 무슨 문제가 있단 말인가?

◇삶의 의미

헉슬리가 그려낸 당황스러운 세계는 행복과 쾌감이 동일하다는 생물학적 가정을 기초로 하고 있다. 행복하다는 것은 쾌락적인 신체적 감각을 느낀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의 생화학 시스템은 이 감각의 크기와 지속기간을 제한한다. 따라서 높은 수준의 행복을 일정 기간 이상 느끼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사람들의 생화학 시스템을 조작하는 것이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행복에 대한 이런 정의에 이의를 제기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대니엘 카너먼은 사람들에게 하루의 일상적인 활동을 재평가하라고 요구해 보았다. 상황을 하나하나 떠올려가며, 그때마다 자신이 얼마나 즐거웠는지 혹은 싫었는지를 평가하게 했다. 카너먼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스로의 삶에 대해 갖는 시각에서 역설처럼 보이는 현상을 발견했다. 아이를 양육하는 일을 예로 들면, 즐거운 순간과 지겨운 순간을 평가하게 한 결과 양육은 상대적으로 불쾌한 일에 속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기저귀를 갈고, 설거지를 하고, 아이의 짜증을 달래는 일은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부모는 아이가 행복의 주된 원천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사람들이 무엇이 정말 자신에게 좋은지를 모른다는 뜻일까?

그럴 수도 있다. 또 다른 가능성은, 행복이란 불쾌한 순간을 상쇄하고 남는 여분의 즐거움의 총합이 아니라, 그보다는 개인의 삶을 총체적으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으로 바라보는 데서 온다는 것이다. 행복에는 중요한 인지적, 윤리적 요소가 존재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아기 독재자의 비참한 노예로 볼 수도 있고, 사랑을 다해 새 생명을 키우고 있는 사람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그 큰 차이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가치체계다. 니체가 표현한 대로, 만일 당신에게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면 당신은 어떤 일이든 견뎌낼 수 있다. 의미 있는 삶은 한창 고난을 겪는 와중이더라도 지극히 행복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의미 없는 삶은 아무리 안락할지라도 끔찍한 시련이다.

삶을 분 단위로 평가할 때, 중세 사람들의 삶은 고되었던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이들이 죽음 뒤에 영원한 행복이 온다는 약속을 신봉했다면, 자신의 삶을 현대의 세속적인 사람들보다 훨씬 더 행복하다고 평가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현대의 불신자들은 장기적으로 보면 완전하고도 가치 없는 망각 외에는 기대할 게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중세 사람들에게 당신의삶 전체에대해 만족하십니까?라고 물었다면, 이들은 주관적 행복의 수준이 매우 높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중세 조상들이 행복했던 것은 사후의 삶에 대한 집단적 환상 속에서 의미를 찾았기 때문이라는 말인가? 그렇다. 환상에 구멍을 뚫어 파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행복하지 않을 리가 없다. 우리가 아는 한 순수한 과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삶은 절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인류는 목적이나 의도 같은 것 없이 진행되는 눈먼 진화과정이 산물이다. 우리의 행동은 뭔가 신성한 우주적 계획의 일부가 아니다. 내일 아침 지구라는 행성이 터져버린다 해도 우주는 아마도 보통 때와 다름없이 운행될 것이다. 그 시점에서 우리가 아는 바로는 인간의 주관성을 그리워하는 존재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부여하는 가치는 그것이 무엇이든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중세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서 발견한 내세의 의미는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인본주의적, 혹은 민족주이적 의미보다 더 심한 망상이 아니었다. 어떤 과학자가 자신은 인간의 지식을 증가시키므로 자신의 삶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하자. 어떤 병사는 자신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싸우므로 삶에 의미가 있다고 하고, 어느 기업가는 새로 회사를 세우는 데서 자신의 의미를 발견한다고 하자. 이들이 찾는 의미가 중세 사람들이 경전을 읽거나 십자군 전쟁에 참전하고 새로운 성당을 짓는 데서 찾았던 의미보다 더 환상적인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행복의 관건은 의미에 대한 개인의 환상을 폭넓게 퍼진 집단적 환상에 맞추는 데 있을지 모른다. 내 개인적 내러티브가 주변 사람들의 네러티브와 일치하는 한 나는 내 삶이 의미 있는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으며, 그 확신을 통해 행복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은 꽤 우울한 결론이다. 행복은 정말로 자기기만에 달려 있는 것일까?

◇ 너 자신을 알라

만일 행복이 쾌락적 감각을 느끼는 데 기반을 두고 있다면, 우리는 더 행복해지기 위해 스스로의 생화학 시스템을 개조할 필요가 있다. 만일 행복이 삶의 의미를 느끼는 데 기반을 두고 있다면, 우리는 더 행복해지기 위해 스스로를 좀 더 효과적으로 기만할 필요가 있다. 세번째 선택지는 없는 것일까? 앞의 두 견해는 행복이란 모종의 주관적 느낌(쾌감이든 의미든)이라는 가정을 공유하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의 행복을 판단하려면 그들에게 기분이 어떠냐고 물어보기만 하면 된다는 가정도 깔고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이것은 논리적인 가정으로 보인다. 우리 세대의 지배적 종교가 자유주의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주관적 기분을 신성시한다. 개인의 기분과 느낌이 권위의 최고 원천이라고 본다. 선과 악, 미와 추, 당위와 존재는 우리 각자가 어떻게 느끼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자유주의 정치학은 투표자가 가장 잘 안다는 생각, 우리에게 무엇이 좋은지를 알려주는 빅브라더는 필요 없다는 생각에 기반을 두고 있다. 아름다움은 보는 이의 눈 속에 있는 것이라고 인문학은 선언한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대학생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생각하라고 교육 받는다. 광고는 우리에게 촉구한다. 저질러 버려!액션 영화, 연극, 연속극, 소설, 인기 팝송은 끊임없이 우리를 세뇌한다. 자신에게 충실하라.자신에게 귀를 기울이라. 내면의 소리를 따르라. 장 자크 루소는 이런 견해를 가장 고전적으로 표현했다. 내가 좋다고 느끼는 것이 선이고, 내가 나쁘다고 느끼는 것은 악이다. 유년 시절부터 이런 구호를 들으며 자란 사람들은 행복이 주관적 느낌이라고 믿기가 쉽고, 자신이 행복한지 비참한지를 가장 잘 아는 것은 자신이라고 믿기 쉽다. 하지만 이런 견해는 자유주의에 특유한 것이다. 역사상 존재했던 대부분의 종교와 이데올로기는 선함과 아름다움, 당위에는 객관적인 척도가 존재한다고 말했다. 보통 사람의 느낌이나 선호는 신뢰하지 않았다.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 입구에 새겨진 순례자들을 맞이하는 글귀는 너 자신을 알라!인데 이것이 함축하는 바는 보통 사람은 진정한 자신에 대해 모르며 따라서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프로이트에게 물었다면, 아마도 여기에 동의했을 것이다. 기독교 신학자도 마찬가지로 대답했을 것이다. 만일 사람들에게 묻는다면, 대부분이 기도보다는 성관계를 더 좋아한다고 대답할 것이다. 성 바오로와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성관계가 행복의 핵심이라는 사실이 증명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바오로와 아우수스티누스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그것이 증명하는 바는 인간이 본래 죄 많은 존재이며 쉽게 사탄의 유혹에 빠진다는 사실뿐이다. 기독교의 관점에서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헤로인 중독자와 어느 정도 비슷한 상태이다. 어느 심리학자가 마약 상용자들의 행복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다고 상상해 보자. 중독자들의 여론을 조사한 결과, 하나같이 마약을 하고 있을 때만 행복하다는 답이 나왔다고 하자. 이 심리학자는 헤로인이 행복의 핵심이라고 단언하는 논문을 출간할 것인가?

역설적으로, 주관적 행복감에 대한 심리학적 연구는 사람들이 자기이 행복을 정확하게 진단하는 능력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심리요법의 존재 근거는 그 반대다. 사람들은 실제로는 자신에 대해 모르며 이들이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하지 않게 하려면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주관적 느낌이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는 생각은 기독교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 주관적 느낌의 가치에 대해서라면, 찰스 다윈이나 리처드 도킨스도 성 바오로나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입장을 취할 수 있다.

이기적 유전자 이론에 따르면, 자연선택은 사람들로 하여금 유전자의 복제에 좋은 행동을 선택하게 만든다. 설사 그 선택이 개체로서의 자신에게는 나쁜 결과를 가져온다고 해도 말이다. 사람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그렇다. 대부분의 남성들은 평화 속에서 행복을 누리는 대신에 노동하고 걱정하고 경쟁하고 싸우며 삶을 보내는데, 이들의 DNA가 자신의 이기적 목적에 따라 그렇게 조종하기 때문이다. 악마와 마찬가지로, DNA는 덧없는 기쁨을 이용해 사람들을 유혹하고 자신의 손아귀에 넣는다.

그 결과, 대부분의 종교와 철학은 행복에 대해 자유주의와는 매우 다른 접근법을 취했다. 불교의 입장은 특히 흥미롭다. 불교는 행복의 문제를 다른 어떤 종교나 이념보다도 중요하게 취급했다. 불교도은 지난 2,500년에 걸쳐 행복의 본질은 무엇인가, 무엇이 행복을 가져다주는가를 체계적으로 연구했다. 과학자들 사이에서 불교 철학과 명상법에 대한 관심이 점점 커져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행복에 대한 불교의 접근방식은 생물학적 접근방식과 기본적 통찰의 측면에서 일치한다. 즉, 행복은 외부 세계의 사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신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과정의 결과라는 것이다. 하지만 동일한 통찰에서 시작했음에도, 불교는 생물학과는 매우 다른 결론에 도달한다.

불교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을 즐거운 감정과, 고통을 불쾌한 감정과 동일시한다. 그래서 자신의 느낌을 매우 중요시하며, 점점 더 많은 즐거움을 추구하는 한편 고통을 피하려고 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는 모든 일은 다리를 긁든, 의자에서 꼼지락거리든, 세계대전을 치르든 모두 그저 즐거운 감정을 느끼기 위한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우리의 감정이 바다의 파도처럼 매 순간 변화하는 순간적 요동에 지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5분 전에 나는 즐겁고 결의에 차 있었지만, 지금 나는 슬프고 낙담해 있다. 그러므로 만일 내가 즐거운 감정을 경험하고 싶다면, 불쾌한 감정을 몰아내면서 즐거운 감정을 끊임없이 추구해야 한다. 설령 한 번 그러는 데 성공했다 해도 곧바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간의 노고에 대한 보상은 전혀 없다.

그토록 덧없는 보상을 받는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한가? 나타나자 마자 곧바로 사라지는 무언가를 달성하기 위해서 그토록 힘들게 분투할 필요가 무엇인가? 불교에서 번뇌의 근원은 고통이나 슬픔에 있지 않다. 심지어 덧없음에 있는 것도 아니다. 번뇌의 진정한 근원은 이처럼 순간적인 감정을 무의미하게 끝없이 추구하는 데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항상 긴장하고, 동요하고, 불만족스러운 상태에 놓인다. 이런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우리 마음은 결코 만족하지 못하고, 기쁨을 누릴 때조차 만족스럽지 않다. 기쁜 감정이 금방 사라져버릴 것이 두렵고, 이 감정이 이어져 더 강해지기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번뇌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런저런 덧없는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감정이 영원하지 않다는 속성을 이해하고 이에 대한 갈망을 멈추는 데 있다. 이것이 불교 명상의 목표이다. 명상을 할 때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깊이 관찰하여 모든 감정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목격하며, 그런 감정을 추구하는 것의 덧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런 추구를 중단하면 마음은 느긋하고 밝고 만족스러워진다. 즐거움, 분노, 권태, 정욕 등 모든 종류의 감정은 계속해서 늘어나고 사라지지만, 일단 당신이 특정한 감정에 대한 추구를 멈추면 어떤 감정이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어쩌면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무언가를 공상하는 대신에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이다. 그 결과 완전한 평정을 얻게 된다. 평생 미치듯이 쾌락을 찾아 헤매던 사람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수준의 평정이다. 그런 사람은 바닷가에 수십 년간 서 있으면서 모종의 좋은 파도를 받아들여 그것이 흩어져버리지 못하도록 애쓰는 동시에 모종의 나쁜 파도는 밀어내어 자신에게 가까이 오지 못하게 만들려고 애쓰는 사람과 마찬가지다. 이 사람은 날이면 날마다 해변에 서서 무익한 노력을 거듭하면서 스스로의 마음을 괴롭힌다. 그러다 마침내 그는 모래에 주저앉아, 파도가 마음대로 오고 가게 놔 둔다. 얼마나 평화로운가!

현대의 자유주의적 문화의 입장에서 이런 사상은 너무나 낯설었다. 그래서 서구의 뉴에이지 운동은 불교의 통찰을 처음 대했을 때 이를 자유주의적 용어로 바꿔버렸다. 완전히 거꾸로 받아들인 것이다. 뉴에이지 문화는 주로 이렇게 주장했다. 행복은 외적인 조건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우리 내면의 느낌에 좌우되는 것이다. 부나 지위와 같은 외적 성취에 더 이상 매달리지 말고 내면의 느낌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혹은 보다 간결하게 이렇게 주장했다. 행복은 내부에서 시작된다.이것은 생물학자들의 주장과 정확히 일치하는 슬로건이다. 하지만 부처의 가르침과는 거의 반대라고 할 수 있다. 행복이 외적 조건에 달려 있지 않다고 하는 점에서 부처의 생각은 현대 생물학이나 뉴에지 운동과 궤를 같이 하지만, 부처의 가장 심원하고 중요한 통찰은 따로 있다. 진정한 행복은 주관적 느낌이나 감정과도 무관하다는 점이다. 사실 우리가 스스로의 주관적 느낌을 중요하게 여기면 여길수록 우리는 더 많이 집착하게 되고, 괴로움도 더욱 심해진다. 부처가 권하는 것은 우리가 외적 성취의 추구뿐 아니라 내 내면의 느낌에 대한 추구 역시 중단하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주관적 안녕을 묻는 설문은 우리의 안녕을 주관적 느낌과 동일시하고, 행복의 추구를 특정한 감정 상태의 추구와 동일시한다. 많은 전통철학과 불교를 비롯한 종교는 이와 반대되는 입장을 취한다. 행복을 얻는 비결은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자신이 정말로 어떤 사람인지를- 파악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의 감정, 생각, 호불호를 자신과 동일시하는데, 이는 잘못이다. 이들은 분노를 느끼면 '나는 화가 났다. 이것은 나의 분노다'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감정을 피하고 또 다른 감정을 추구하느라 일생을 보낸다. 그들은 자신과 자신의 감정은 다르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특정한 감정을 끈질기게 추구하는 행위는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함정이라는 사실도 모른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행복의 역사에 대한 우리의 이해 전체는 오도된 것일 수 있다. 사람들의 기대가 충족되었느냐의 여부, 퇴락적 감정을 즐기는가의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주된 질문은 사람들이 스스로에 대한 진실을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사람들이 고대의 수렵채집인이나 중세의 농부보다 이런 진실을 조금이라도 더 잘 이해하고 있다는 증거가 있을까?

학자들이 행복의 역사를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우리는 아직 초기 가설을 만들어 내고 적절한 연구방법을 찾는 단계에 머물고 있다. 확고한 결론을 채택하고 논의를 마무리 짓기에는 너무 이르다. 논의는 아직 시작조차 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수많은 접근법을 되도록 많이 알고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대부분의 역사서는 위대한 사상가의 생각, 전사의 용맹, 성자의 자선, 예술가의 창의성에 초점을 맞춘다. 이런 책들은 사회적 구조가 어떻게 짜이고 풀어지느냐에 대해서, 제국의 흥망에 대해서, 기술의 발견과 확산에 대해서 할 말이 많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개인들의 행복과 고통에 어떤 영향을 미쳤느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의 역사 이해에 남아 있는 가장 큰 공백이다. 우리는 이 공백을 채워나가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출처]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김영사, 2019년)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