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친구 명자 / 송명견 (동덕여대 교수)
시골 우리 집에 명자가 놀러왔다. 중학교 1학년 때였다. 자그마한 키에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하얀 피부의 예쁘장한 여중생이었다. 무슨 계기였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명자가 우리 언니 앞에서 초등학교 교과서를 주욱주욱 외워댔다. 명자가 돌아간 후 나는 상당히 오랫동안 언니로부터 야단을 맞았다. 명자는 책을 줄줄 외울 정도로 공부하는데, 나는 노력하지 않는다는 꾸중이었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명자는 책을 외우던 아이로 통하고 있다. 고등학교에 가서도 여전히 명자는 공부를 잘 했고, 그 어렵다는 S대 문리대 영문학과에 합격했다.
결혼 후 우연히 서울에서 명자와 한 아파트 단지에 살게 됐다. 명자는 두 남매와 남편, 그리고 시아버지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 꼿꼿하고 날카로워 보이는 홀시아버지를 모시느라 명자의 얼굴엔 항상 엷은 긴장감이 드리워져 있었던 기억이 있다. 어느 날 명자 집에 갔더니 당시 고교 1학년생인 아들이 엄마 친구가 왔다고 기타를 들고 와 연주를 해줬다. 기타에 푹 빠져있었다. 명자도 걱정스레 말했다. 기타만 끼고 산다고. 그래도 명자 아들이어서 “가끔 전교 1등을 하느냐” 물었다. 기타가 아니었으면 ‘가끔’을 빼고 물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했다. 그리고 대학에 진학할 무렵이 됐다. 기타를 끼고 살던 그 아들이 어느 대학에 갔을지 몹시 궁금했다.
후에 들은 이야기다. 그 아들 진학 문제로 꼬장꼬장하신 할아버지께서 한 달여 동안 식음을 전폐하다시피하며 S대 법대를 고집하셨다고 했다. 아들의 고교에서도 마지막까지 법대를 종용했다고 했다. 판검사가 되는 게 흔히 '인생의 가장 큰 성공'이라 여기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그 아들은 S대에 지원하면서도 법대를 외면하고 본인이 원하는 학과에 합격했다. 그때 나는 내심 기타 때문에 공부가 좀 소홀하지 않았나 생각했었다. 조금 아쉬웠다. 그러나 알고 보니 어려운 결정의 순간에 마지막으로 아들 손을 들어준 것은 엄마인 명자였다. 아들은 대학시절부터 작곡으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행복해했다. 그리고는 중요한 고비마다 엄마에게 "하고 싶은 일을 하게 해 주신 덕분"이라며 끔찍이 고마워하곤 했다. 그 아들이 바로 방탄소년단을 만들어낸 방시혁 대표고, 내 친구 명자가 바로 방 대표의 어머니다.
마침 방탄소년단이 미국에서 대한민국의 이름을 날릴 때, 방시혁 대표가 언론의 각광을 받으며 대통령상을 받을 무렵, 명자와 나는 남인도를 여행하고 있었다. 매일 방탄소년단과 방 대표에 대한 낭보가 인터넷을 타고 여행 중인 우리에게 전해졌다. 명자 곁에 있던 나도 참으로 기뻤다. 방 대표가 자랑스럽고, 고맙기까지 했다. 그리고 큰 소리로 그 감격을 함께 여행하고 있는 모두와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명자는 끝까지 조용히 그리고 겸손히 그 감동을 소화해냈다. 역시 명자다웠다. 아무나 그런 아들을 둔 영광을 누리는 게 아닐 것이다.
입시철이 무르익어 여기저기서 환성과 한숨이 터져 나오고 있다. 자식의 진로를 놓고 고액의 상담도 한다고 한다. 입시가 끝날 때까지 내 자식이, 내가 어느 길을 택해야 할지 고민하는 진통이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답은 확실하다. 진학, 진로 선택에 있어 제 1순위는 본인이 가장 즐겁게 공부할 수 있는 학과다. 그 확실한 성과가 바로 오늘의 방시혁을 만들어낸 내 친구 명자에게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 2021.02.22 편집 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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