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웅구, 수고했소! 오늘 청소는 만점이오 인젠 집으로 돌아가도 좋소”
Covid19로 힘든 시절입니다.
그래도 새생명 움트는 희망의 새봄은 오고 있습니다. 복잡한 인간만사 잠시 내려놓고 동요와 동시를 읽으며 동심에 젖어 봅니다. 때 묻지 않은 순수 그대로의 동심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그래서 행복한 사람입니다. 시린 겨울의 끝자락에 어린 시절 늘 입에서 맴돌던 추억 속 동요와 동시에 빠져들어 잠시 행복한 꿈을 꾸어 봅니다.
옛날 초등학교(국민학교) 국어 교과서와 음악 교과서에 실려 있었던 동시와 동요들. 그 때 암송하고 불렀던 동시와 동요가 아련한 그리움이 되어 떠오릅니다.
“강웅구, 수고했소! 오늘 청소는 만점이오 인젠 집으로 돌아가도 좋소” (청소를 끝마치고ㆍ강소천) “비비새가 혼자서 앉아 있었다 마을에서도 숲에서도 멀리 떨어진 논벌로 지나간 전선줄 위에 혼자서 동그마니 앉아 있었다 한참을 걸어오다 뒤돌아 봐도 그 때까지 혼자서 앉아 있었다” (돌아오는 길ㆍ박두진)
동심의 세계, 동요와 동시 한 편이 Covid19로 힘들고 지친 분들께 작은 위로와 격려와 소망이 되기를 바랍니다.
■ 청소를 끝마치고 / 강소천
책상 걸상을 죽 뒤로 밀어 놓고
먼지떨이로 구석구석 먼지를 떨고
비로 박박 마루를 쓸고
물로 좍좍 걸레질을 하고
책상 걸상을 제 자리에 나란히 해 놓고
맑은 물을 길어다가
교탁과 교단을 다시 닦는다
비뚤어 놓인 교탁을 바로 놓다가
나는 문득 선생님이 되어 보고 싶었다
“강웅구, 수고했소!
오늘 청소는 만점이오
인젠 집으로 돌아가도 좋소”
언제 와 계셨는지 교실 문 앞에
담임 선생님이 서 계셨다
나는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다가
“선생님 청소를 다 했습니다”
선생님도 빙그레 웃으시며
“강웅구, 수고했소!
오늘 청소는 만점이오
인젠 집으로 돌아가도 좋소”
그리고 선생님은 교사실로 가신다
복도를 쓸던 동무들과
유리를 닦던 동무들이
한꺼번에 “와아!”하고 웃어 버렸다
교사실로 가시던 선생님도
뒤돌아보시며
다시 한 번 빙그레 웃으시었다
■ 돌아오는 길 / 박두진
비비새*가 혼자서
앉아 있었다
마을에서도
숲에서도
멀리 떨어진
논벌로 지나간
전선줄 위에
혼자서 동그마니
앉아 있었다
한참을 걸어오다
되돌아 봐도
그 때까지 혼자서
앉아 있었다
* 비비새: 뱁새, 붉은머리오목눈이의 방언
■ 아기별 / 윤태웅
서산 너머 해님이 숨바꼭질 할 때에
수풀 속에 새 집에는 촛불 하나 켜놨죠
아니 아니 아니죠 켜논 촛불 아니죠
저녁 먹고 놀러 나온 아기별님이지요
■ 가을 밤 / 방정환
착한 아기 잠 잘 자는
베갯머리에
어머님이 혼자 앉아
꿰매는 바지
꿰매어도 꿰매어도
밤은 안 깊어
기러기 떼 날아간 뒤
잠든 하늘에
둥근 달님 혼자 떠서
젖은 얼굴로
비치어도 비치어도
밤은 안 깊어
지나가던 소낙비가
적신 하늘에
집을 잃은 부엉이가
혼자 앉아서
부엉부엉 울으니까
밤이 깊었네
■ 달 따러 가자 / 윤석중
얘들아 나오너라 달 따러가자
장대 들고 망태 메고 뒷동산으로
뒷동산에 올라가 무등을 타고
장대로 달을 따서 망태에 담자
저 건너 순이네는 불을 못 켜서
밤이 되면 바느질도 못 한다더라
얘들아 나오너라 달을 따다가
순이 엄마 방에다 달아드리자
■ 지게꾼과 나비 / 신영승
할아버지 지고 가는 나무지게에
활짝 핀 진달래가 꽂혔습니다
어디서 나왔는지 노랑나비가
지게를 따라서 날아갑니다
아지랑이 속으로 노랑나비가
너울너울 춤을 추며 따라갑니다
■ 잠자리 / 강소천
빠알간 아기잠자리 한 마리가
가아는 나뭇가지 끝에 날아와서,
ㅡ 조금 앉았다 가랍니까?
ㅡ 안 돼!
ㅡ 조금 앉았다 갈게요
ㅡ 안 돼!
ㅡ 조금만 ......
ㅡ 글쎄, 안 된다는데 그래!
앉으려다간 못 앉고
또 앉으려다간 못 앉고
그러다 그러다 잠자리는
다른 데로 날아가 버렸습니다
■ 고향 땅 / 윤석중
고향 땅이 여기서 얼마나 되나
푸른 하늘 끝닿은 저기가 거긴가
아카시아 흰꽃이 바람에 날리니
고향에도 지금쯤 뻐꾹새 울겠네
고개 너머 또 고개 아득한 고향
저녁마다 놀지는 저기가 거긴가
날 저무는 논길로 휘파람 불면서
아이들은 지금쯤 소 몰고 오겠네
■ 그리운 언덕 / 강소천
내 고향 가고 싶다 그리운 언덕
동무들과 함께 올라 뛰놀던 언덕
오늘도 그 동무들 언덕에 올라
메아리 부르겠지 나를 찾겠지
내 고향 언제 가나 그리운 언덕
옛 동무들 보고 싶다 뛰놀던 언덕
오늘도 흰 구름은 산을 넘는데
메아리 불러본다 나만 혼자서
■ 잘 자는 우리 아기 / 박목월
잘 자는 우리 아기
꼬옥 감은 눈에
엄마가 사알짝
입 맞춰 주고
잘 자는 우리 아기
꼬옥 감은 눈에
달빛이 살며시
입 맞춰 주고
잘 자는 우리 아기
꼬옥 감은 눈에
포도넝쿨 그늘이
입 맞춰 주고
■ 잠깰 때 / 윤석중
모자야, 모자야,
오 모자는
저기 저 못에 걸려 잘 있다
공아, 공아,
오 공은
누나 반짇고리 속에 잘 있다
딱지야, 딱지야,
오 딱지는
내 호주머니 속에 잘 있다
나 잔 동안
다 잘 있다 다 잘 있다
■ 고기잡이 / 윤극영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갈까나
고기를 잡으러 강으로 갈까나
이병에 가득히 넣어 가지고서
랄랄랄랄 랄랄랄라 온다나
선생님 모시고 가고 싶지만은
하는수 있나요 우리만 가야지
하는수 있나요 우리만 가야지
랄랄랄랄 랄랄랄라 간다나
솨솨솨 쉬쉬쉬 고기를 몰아서
어여쁜 이 병에 가득히 차면은
선생님한테로 가지고 온다나
랄랄랄랄 랄랄랄라 굿바이
■ 가을밤 / 이태선
가을밤 외로운 밤 벌레 우는 밤
초가집 뒷산 길 어두워질 때
엄마 품이 그리워 눈물 나오면
마루 끝에 나와 앉아 별만 셉니다
가을밤 고요한 밤 잠 안 오는 밤
기러기 울음소리 높고 낮을 때
엄마 품이 그리워 눈물 나오면
마루 끝에 나와 앉아 별만 셉니다
■ 가을바람 / 강소천
아람*도 안 벌은 밤을 따려고
밤나무 가지를 흔들다 못해
바람은 마을로 내려왔지요
싸릿가지 끝에 앉은 아기잠자릴
못 견디게 놀려 주다 그도 싫어서
가을바람은 앞벌로 내달렸지요
고개 숙인 벼 이삭을 마구 디디고
언덕배기 조밭으로 올라가다가
낮잠 자는 허수아빌 만났습니다
새 모는 아이 눈을 피해 가면서
조 이삭 막 까먹는 참새 떼 보고
바람은 그만 그만 성이 났지요
“저놈의 허수아비, 새는 안 쫓고
어째서 낮잠만 자고 있느냐?
후여 후여 팔 벌리고 새를 쫓아라”
가을바람에 허수아비 정신 차렸다
두 팔을 내저으며 새를 쫓는다
새들이 무서워 막 달아난다
가을바람 오늘은 좋은 일 하고
마음이 기뻐서 막 돌아갑니다
머리를 내두르며 돌아갑니다
* 아람: 밤, 도토리 따위가 나무에 달린 채 저절로 떨어질 정도로 충분히 익은 상태, 또는 그 열매
■ 졸업식의 노래 / 윤석중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아름 선사합니다
물려받은 책으로 공부를 하여
우리는 언니 뒤를 따르렵니다
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선생님 저희들은 물러갑니다
부지런히 더 배우고 얼른 자라서
새 나라의 새 일꾼이 되겠습니다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
우리나라 짊어지고 나갈 우리들
냇물이 바다에서 서로 만나듯
우리들도 이다음에 다시 만나세
■ 과꽃 / 어효선
올해도 과꽃이 피었습니다.
꽃밭 가득 예쁘게 피었습니다.
누나는 과꽃을 좋아했지요
꽃이 피면 꽃밭에서 아주 살았죠
과꽃 예쁜 꽃을 들여다보면
꽃 속에 누나 얼굴 떠오릅니다.
시집간 지 온 삼 년 소식이 없는
누나가 가을이면 더 생각나요
■ 이순신 장군 / 강소천
이 강산 침노하는 왜적 무리를
거북선 앞세우고 무찌르시어
이 겨레 구원하신 이순신 장군
우리도 씩씩하게 자라납니다
■ 최영 장군 / 최태호
황금을 보기로 돌 같이 하라
이르신 어버이 뜻을 받들어
한평생 나라 위해 바치셨으니
겨레의 스승이라 최영 장군
이 겨레 이 나라 바로잡고자
남으로 왜적을 물리치시고
북으로 오랑캐를 무찌르시니
장하다 그 이름 최영 장군
요동(遼東) 땅 너는 알라 장군의 뜻을
위화도(威化島) 회군의 원한을 품고
조용히 참형으로 돌아가시니
슬프다 붉은 무덤 최영 장군
■ 유관순 / 강소천
삼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보며
유관순 누나를 생각합니다
옥 속에 갇혀서도 만세 부르다
푸른 하늘 그리며 숨이졌대요
삼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보며
유관순 누나를 불러봅니다
지금도 그 목소리 들릴 듯하여
푸른 하늘 우러러 불러봅니다
■ 3월 1일의 하늘 / 박두진
유관순 누나로 하여 처음 나는
삼월 하늘에 뜨거운 피무늬가 어려 있음을 알았다
우리들의 대지에 뜨거운 살과 피가 어려 있음을 알았다
우리들의 조국은 우리들의 조국
우리들의 겨레는 우리들의 겨레
우리들의 자유는 우리들의 자유임을 알았다
아, 만세, 만세, 만세, 만세!
유관순 누나로 하여 처음 나는
우리들의 가슴깊이 피 터져 솟아나는
비로소 끓어오르는 민족의 외침의 용솟음을 알았다
우리들의 억눌림, 우리들의 비겁을
피로써 뚫고 일어서는
절규하는 깃발의 뜨거운 몸짓을 알았다
유관순 누나는 저 오르레안, 잔다르크의 살아서의 영예
죽어서의 신비도 곁들이지 않은
수수하고 다정한 우리들의 누나,
흰옷 입은 소녀의 불멸의 순수
아, 그 생명혼의 고갱이의 아름다운 불길의
영웅도 신도 공주도 아니었던
그대로의 우리 마음 그대로의 우리 핏줄
일체의 불의와 일체의 악을 치는
민족애의 순수 절정 조국애의 꽃넋이다
아 , 유관순 , 누나, 누나, 누나, 누나,
언제나 삼월이면 언제나 만세 때면
잦아있는 우리 피에 용솟음을 일으키는
유관순 우리 누난 보고 싶은 누나
그 뜨거운 맘 그 맘속에 주고 싶은
유관순 누나로 하여 우리는 처음
저 아득한 삼월의 고운 하늘
푸름 속에 펄럭이는 피깃발의 외침을 알았다
????????????????
《‘영원한 어린이의 벗’ 강소천》 강소천 공식 블로그에 실린 동시와 동요 중 몇 편을 소개합니다.
■ 닭 / 강소천
물 한 모금 입에 물고,
하늘 한 번 쳐다보고
또 한 모금 입에 물고,
구름 한 번 쳐다보고
■ 코끼리 / 강소천
코끼리 아저씨는 코가 손이래
과자를 주며는 코로 받지요
코끼리 아저씨는 소방수래요
불나면 빨리 와 모셔가지요
■ 태극기 / 강소천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입니다.
하늘 높이 아름답게 펄럭입니다.
태극기가 힘차게 펄럭입니다
마을마다 집집마다 펄럭입니다
■ 산딸기 / 강소천
산딸기 있는 데는 뱀도 있다고
오빠가 그러지만 나는 안 속아
내가 따라갈까 봐
그러는 게지
나도 나도 오늘은 산엘 갈 테야
언니 따라 산딸기 따러 갈 테야
도라지 나리꽃도 꺾어 올 테야
■ 추석 날 / 강소천
팔월에도 추석날은 즐거운 명절
밤 먹고 대추 먹고 송편도 먹고
팔월에도 추석날은 달이 밝은 밤
손에 손을 잡고서 달맞이 가요
■ 버들피리 / 강소천
아버지가 밭갈이하시는 시냇가 언덕에
나는 동생과 나란히 앉아
버들피리를 불었지요
삘릴리 삘릴리
버들피리를 불었지요
"이랴 낄낄, 이랴 낄낄"
소 몰아 밭가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우리들이 부는 버들피리 속에 한데 어울려
곱다랗게 곱다랗게 들려옵니다
졸졸졸 속삭이는 시냇물 소리도
음매애 음매
송아지 찾는 엄마소의 목소리도
우리가 부는 버들피리 속에 한데 어울려
정답게 정답게 들려옵니다
■ 3월 / 강소천
가만히 귀 기울여 들어보셔요
머언 산골짜기에서
콸콸콸 눈 녹아 흐르는 소리를
가만히 귀 기울여 들어보셔요
숲 속에서 금잔디에서
우쑥우쑥 새싹들이 트는 소리를
파아란 3월 하늘을 우러러
3 · 1의 만세 소리를
다시 한 번 들어보셔요
■ 민들레 / 강소천
길가의 민들레도 노랑 저고리
첫돌맞이 우리 아기도 노랑저고리
민들레야 방실방실 웃어보아라
아가야 방실방실 웃어보아라
길가의 민들레도 노랑 저고리
첫돌맞이 우리 아기도 노랑저고리
아가야 아장아장 걸어보아라
민들레야 방실방실 웃어보아라
■ 보슬비의 속삭임 / 강소천
나는 나는 갈 테야 연못으로 갈 테야
동그라미 그리려 연못으로 갈 테야
나는 나는 갈 테야 꽃밭으로 갈 테야
꽃봉오리 만지러 꽃밭으로 갈 테야
나는 나는 갈 테야 풀밭으로 갈 테야
파란손이 그리워 풀밭으로 갈 테야
■ 꼬마 눈사람 / 강소천
한 겨울에 밀짚모자 꼬마 눈사람
눈썹이 우습구나 코도 삐뚤고
거울을 보여줄까 꼬마 눈사람
하루종일 우두커니 꼬마 눈사람
무엇을 생각하고 혼자 섰느냐
집으로 들어갈까 꼬마 눈사람
■ 산토끼야 / 강소천
토끼야 토끼야 산속의 토끼야
겨울이 되며는 무얼 먹고 사느냐
흰눈이 내리면은 무얼 먹고 사느냐
겨울이 되어도 걱정이 없단다
엄마가 아빠가 여름동안 모아논
맛있는 먹이가 얼마든지 있단다
■ 겨울 밤 / 강소천
부엉 부엉새가 우는 밤
부엉 춥다고서 우는데
우리들은 할머니 곁에
모두 옹기종기 앉아서
옛날 이야기를 듣지요
붕붕 가랑잎이 우는 밤
붕붕 춥다고서 우는데
우리들은 화롯가에서
모두 올망졸망 모여서
밤을 호호 구워 먹지요
■ 금강산 / 강소천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이천봉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
철따라 고운 옷 갈아입는 산
이름도 아름다워 금강이라네
금강이라네
금강산 보고 싶다 다시 또한번
맑은 물 굽이쳐 폭포 이루고
각가지 옛이야기 가득 지닌 산
이름도 찬란하여 금강이라네
금강이라네
■ 구름 / 강소천
구름이 구름이 하늘에다
그림을 그림을 그립니다
노루도 그려놓고 토끼도 그려놓고
동생하고 나란히 풀밭에 앉아
펴오르는 구름을 바라봅니다
바라봅니다
구름이 구름이 하늘에서
재주를 재주를 부립니다
노루도 재주넘고 토끼도 재주넘고
동생하고 나란히 풀밭에 앉아
흘러가는 구름을 그려봅니다
그려봅니다
■ 나무/ 강소천
나무도 나무도 나이를 먹는다
우리들 처럼야 나이를 먹는다
아무도 모르는 나무들 나이
나무만 아는 동그란 나이
나무도 나무도 나이를 먹는다
한 해에 한 살씩 나이를 먹는다
아무도 모르는 나무들 나이
나무만 아는 동그란 나이
■ 소풍 / 강소천
단풍잎이 아름다운 산으로 가자
산새들이 노래하는 산으로 가자
맞은편을 향하여 소리 지르면
메아리가 대답하는 산으로 가자
들국화 향기로운 들로 나가자
갈대가 손짓하는 들로 나가자
금잔디에 누워서 하늘을 보면
벌레소리 들려오는 들로 나가자
■ 푸른 목장 / 강소천
오 푸른 바람 불어와
푸른 빛 물결 일으킨다네
오 온통 푸른 이 목장
수풀은 잘도 자랐네
눈 녹아 골짜기 개울을 이루고
평지에 흘러서 강물이 되었네
들판을 흐르며 논밭을 적시며
노래를 부르네 풍년가를
■ 작별 (석별의 정) / 강소천
오랫동안 사귀던 정든 내 친구여
작별이란 웬 말인가 가야만 하는가
어디 간들 잊으리요 두터운 우리정
다시 만날 그날 위해 노래를 부르자
잘 가시오 잘 있으오 서로 손 꼭 잡고
석별의 정 잊지 못해 눈물도 흘리네
이 자리를 이 마음을 길이 간직하고
다시 만날 그날 위해 노래를 부르자
■ 유리창 / 강소천
입김으로
호오오
유리창을 흐려 놓고
써 보는 글자
새싹
꽃
나비
아아, 새봄이 오면
나는 6학년
밖은 추워도
내 마음은 벌써 훈훈하다
■ 산딸기 / 강소천
잎새 뒤에 숨어 숨어 익은 산딸기
지나가는 나그네가 보았습니다
딸까 말까 망설이다 그냥 갑니다.
잎새 뒤에 몰래 몰래 익은 산딸기
귀엽고도 탐스러운 그 산딸기를
차마 차마 못 따가고 그냥 갑니다
■ 위문 편지 / 강소천
이름도 얼굴도 알지 못해도
고마운 우리 국군 아저씨길래
정성들여 위문편질 써 보냈더니
고맙다는 답장을 보내 왔어요
아저씨 고향은 어디일까요
아저씨 얼굴이 알고 싶어요
이번에는 내 사진도 넣어 보내고
내가 그린 그림도 보내겠어요
■ 호박꽃 초롱 / 강소천
호박꽃을 따서는 무얼 만드나?
무얼 만드나?
우리 아기 조그만 초롱 만들지,
초롱 만들지
반딧불을 잡아선 무엇에 쓰나?
무엇에 쓰나?
우리 아기 초롱에 촛불 켜 주지,
촛불 켜 주지
■ 귀뚜라미 우는 밤 / 강소천
귀뚜라미가 또르르 우는 달밤엔
멀리 떠나간 동무가 그리워져요
정답게 손잡고 뛰놀던 내 동무
그 곳에도 지금 귀뚜린 울고 있을까?
귀뚜라미가 또르르 우는 달밤엔
만나고 싶은 동무께 편지나 쓸까?
즐겁게 뛰놀던 지난날 이야기
그 동무도 지금 날 생각하고 있을까?
■ 눈 내리는 밤 / 강소천
이렇게 흰 눈이
펑펑 쏟아지는 밤이면
등불 밑에 나는 또 하나의 다른
로댕의 사람*이 되어버린다
ㅡ 눈 덮인 아득한 마을이여!
포근한 숲 속을 나는 예쁜 산새들이여!
산토끼 잘 쫓는 내 동무들이여!
모두 잘들 있었느냐?
이 밤도 또
눈 내리는 창가에 나만 남겨 두고
그리운 내 생각은 훨훨 날아
정든 내 고향 집에 가 버렸다
* 로댕의 사람: 로댕의 조각 작품 ‘생각하는 사람’ 가리킨다
■ 새벽 종 / 강소천
아름다운 새벽 종소리가
내 귓가에 날아와 앉는다
민들레 씨가 바람에 흩날리듯
종소리는 종속에서 마악 쏟아져 온다
종소리는 맑은 공기를 타고
훨훨 날아 마을로 집으로 찾아든다
종소리는 문틈을 새어
방안으로 들어와 앉을 자리를 찾아본다
일찌기 잠이 깬 아이들의 귓가에만
아름다운 종소리는 날아와 앉는대요
■ 눈 내리는 날 / 강소천
소복소복 함박눈이 내리는 날엔
너도 나도 바둑이 마음이 되지요
하얀 눈길을 자꾸 걸으면
발자국도 내 뒤를 따라옵니다
소복소복 함박눈이 내리는 날엔
너도 나도 흰 모자 흰 외투입니다
하얀 눈길을 걷는 사람들
마음들도 모두 다 정답습니다
■ 흰 구름 푸른 구름 / 강소천
마음이 갑갑할 땐 언덕에 올라
푸른 하늘 바라보자 구름을 보자
저 산 넘어 하늘 아랜 그 누가 사나
나도 어서 저 산을 넘고 싶구나
푸른 구름 흰 구름에 흰 돛을 달아
산 너머 저 하늘에 띄워 보내자
내 마음 펄럭이는 흰 돛이 되어
달나라 별 나라를 맘대로 가자
■ 어린이 노래 / 강소천
하늘 향해 두 팔 벌린 나무들 같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나무들 같이
하늘 향해 두 팔 벌린 나무들 같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나무들 같이
너도 나도 씩씩하게 어서 자라서
새 나라의 기둥 되자 우리 어린이
해님 보고 방긋 웃는 꽃송이 같이
아름답게 피어나는 꽃송이 같이
해님 보고 방긋 웃는 꽃송이 같이
아름답게 피어나는 꽃송이 같이
너도 나도 곱게 곱게 어서 피어서
새 나라의 꽃이 되자 대한 어린이
■ 스승의 은혜 / 강소천
스승의 은혜는 하늘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지네
참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주신
스승은 마음의 어버이시다
태산같이 무거운 스승의 사랑
떠나면은 잊기 쉬운 스승의 은혜
어디 간들 언제인들 잊사오리까
마음을 길러주신 스승의 은혜
바다보다 더 깊은 스승의 사랑
갚을 길은 오직 하나 살아생전에
가르치신 그 교훈 마음에 새겨
나라 위해 겨레 위해 일하오리다
(후렴)
아 아 고마워라 스승의 사랑
아 아 보답하리 스승의 은혜
■ 흥부와 놀부 / 강소천
옛날 옛날 한 옛날에 흥부 놀부 살았다네
맘씨 고운 흥부는 제비 다리 고쳐주고
박씨 하나 얻어서 울 밑에 심었더니
주렁주렁 열렸대 복 바가지 열렸대
톱질하세 톱질하세 슬근슬근 톱질하세
하나 켜면 금 나오고 둘을 켜면은 나오고
옛날 옛날 한 옛날에 흥부 놀부 살았다네
심술궂은 놀부는 제비 다리 다쳐놓고
박씨 하나 얻어서 울 밑에 심었더니
주렁주렁 열렸대 헛 바가지 열렸대
톱질하세 톱질하세 슬근슬근 톱질하세
셋을 켜도 금은 없고 넷을 켜도 은은 없고
■ 별 / 강소천
나도 하나의 별일 수 있을까?
저 수많은 별들 중에 내가 내 별을 찾고 있듯이
은하수 별무리 그 어디 속이라도
날 찾는 작디작은 별 하나 정녕 있을까?
나도 언젠가는 발견될 수 있을까?
이렇게 들판에 혼자 서서 하늘을 우러러 내라고,
내 여기 있노라고 손짓하는
나를 정녕 못 알아보고 말까?
그래도, 내 별도
천 년 만 년을 두고두고 날 찾고만 있을까?
내가 이미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린 뒤에도
내 별은 남아 있어 날 찾고만 있을까?
■ 돌멩이 / 강소천
몇 백 년 봄을 맞이해도 싹 나지 않고 눈트지 않고 잎 피지 않는 돌멩이. 나는 이런 커다란 돌멩이가 되기보다 조그마한 한 개의 밀알이 되고 싶다. 아무래도 나는 이 냇가에 구울러 다니는, 보다 조그마한 한 개의 밀알이 되고 싶다. 아무래도 나는 이 냇가에 구울러 다니는 아무 쓸데없는 물건인가 보다. 누가 나를 영이네 집 토방돌로 만들어 주었으면 좋으련만...... 나는 한 개의 쓸 수 있는 물건이 되어 보고 싶다. 벌써 버들가지에 물이 오르는가 보다. 아이들의 버들피리 소리가 들려온다. 확실히 봄이 왔구나. 봄이...... 아아, 나는 한 가지의 버들이라도 되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 나는 노래할 수 있으리라
봄이다
나도 눈트고 싶다
나도 자라고 싶다
아아, 갑갑하다. 아아,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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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에 굶주린 시대, 모든 어린이에게 꿈을 선사한 '영원한 어린이의 벗' 강소천
■ 강소천 그는 누구인가
위의 어린이 노래는 그야말로 어린이들을 위한 노래이다. 이 노래는 강소천의 시에 나운영이 곡을 붙인 것이다. 강소천은 흔히 아동 문학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고 말한다. 따라서 그는 아동문학계에 없어서 는 안 될 사람으로 존재한다. 그는 평생 동시와 동요, 동화를 쓰면서 살았다. 외길인생이었다. 그만큼 어린이들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위의 ‘어린이 노래’ 외에 강소천은 많은 동시와 동요, 동화 작품을 남겼다. 초등학교 음악교과서에 나오는 수많은 노래 중 곱고 아름다운 가사가 붙은 노래라면 거의 강소천의 동요나 동시가 가사로 되어있다. 우리의 어린이들은 강소천이 어린이를 사랑하고 위하는 마음으로 쓴 동시들을 노래하며 꿈과 희망과 사랑을 키워온 것이다.
강소천이 누구인지 혹시 모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동시 ‘어린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 다. 또 이 ‘어린이 노래’를 한번쯤 불러보지 않은 사람도 드물 것이다.
강소천은 또한 많은 동화를 남겼다. 소천은 자신의 동화를 통하여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려고 하였다. 또한 어린이들을 바르게 키우려고 하였다. 소천은 아동문학을 하려는 이들에게 ‘동시란 무엇인가?’, ‘동화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다. 아울러 왜 아동문학을 해야 하며, 아동문학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준다.
강소천. 그의 삶 자체는 아동문학 그 자체였다. 그는 이 땅에 아동문학이 굳건히 자리잡게 한 위대한 아동문학가였다.
■ 영원한 어린이의 벗, 강소천을 말하다
ㅡ 강소천의 생애
강소천은 1915년 9월 16일(양력) 함경남도 고원군 수동면 미둔리 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강석우, 어머니는 허석운이었으며 소천은 이들의 둘째아들이었다.
소천이 태어난 미둔리는 대대로 강씨들만 모여사는 두메산골로 일명 뫼뚜니라고 불렀다. 뫼뚜니는 눈이 많고 바람 소리가 높은 곳으로 봄이 더디게 찾아오는 고장이었다. 소천은 뫼뚜니에서 30대까지 시를 쓰며 살았다.
소천의 어릴 때 이름은 용률이었다. 동시를 쓰면서 소천은 작은 샘이란 뜻으로 소천이라는 필명을 사용하였다. 소천의 할아버지인 강봉규는 관북의 성웅이라고 불리던 전계은 목사의 전도로 일찍부터 기독교인이 되었다. 신앙이 독실했던 강봉규는 친구와 함께 고향인 미둔리에 교회를 세우기도 했다. 그러므로 소천은 모태신앙의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자라났다.
소천은 어릴 때부터 말썽꾸러기였다. 불장난을 하다 집을 태운 적도 있었다. 그러나 또한 책을 좋아하여 별명이 책벌레이기도 했다. 소천의 어머니는 소천이 너무 책을 읽어 건강을 해칠까 봐 책을 보지 말라며 매를 들기도 했다. 물론 소천이 매에 굴복했을 리 없다. 소천의 할아버지는 소천이 11세에 되던 해에 미둔리에서 고원읍으로 이사를 했다. 미둔리에는 학교가 없었으므로 손자들을 교육시킬 수가 없었던 것이다.
소천은 초등학교 3학년인 13살 때 평생 친구였던 전택부를 만나게 된다. 전택부는 소천의 첫 인상을 이렇게 쓰고 있다. 첫 인상은 무엇인가에 쫓기는 아이처럼 불안해 하고, 몹시 째째하고 초라해 보였다. 새까만 얼굴에 눈은 더 까매서 나들이옷을 입고 있었지만 시골뜨기 티를 벗지 못했다.
소천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함흥에 있는 영생고보에 들어가면서부터 의젓한 아동문학가로 변신한다. 고보 1학년이던 16세에 아동잡지인 아동생활에 버드나무 열매라는 동시를 발표하고 문단에 얼굴을 내민 것이다. 그리고 고원읍에서 잠시 만나 우정을 나누었던 전택부를 다시 만난다. 이때 전택부는 고보 2학년이었다.
소천은 상급생인 전택부와 친하게 지내지는 않았지만 전택부 때문에 일제에 대한 깊은 분노를 느끼게 된다. 전택부가 일본인 교사의 조선학생차별 대우에 항의, 동맹휴학을 결의했는데 곧 주모자로 색출당하여 퇴학을 당하였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소천은 동시와 동요만을 써왔으나 이때 동화도 써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 막연한 생각은 나중에 구체적인 동화가 되어 나타난다.
그는 첫화 ‘돌멩이’의 후일담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오랫동안 동요와 동시를 써 왔었지만 나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그때 정말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동화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동화에다 나는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빼앗은 이야기며 그 때문에 우리들이 고생하는 이야기를 써 보고 싶었다. 이렇게 소천의 가슴을 분노에 떨게 했던 전택부 퇴학 사건은 그러나 2년 뒤 전택부가 학교에 다시 복교하면서 마무리 되었다.
소천은 4학년 동급생으로서 전택부를 다시 만났다. 전택부 퇴학 사건은 복교로 마무리되었으나 일제에 대한 소천의 분노는 더욱더 깊어만 갔다. 일제는 무자비한 한글 탄압을 시작했던 것이다. 우리말과 우리글로 시를 쓰는 소천에게 한글 탄압이란 그야말로 사형선고와 같은 것이었다. 학과 시간에 조선어 독본이라는 것이 있어서 우리말과 우리글을 가르치기는 했다.
독본은 조선 사람으로서의 얼을 심고 가꾸기 위해서 가르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식민지 교육을 위한 것이 목적이었다. 그 속에 담긴 문장이 오죽 했겠는가? 당연히 소천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나중에 일제는 그나마 조선어 독본 시간마저도 없애버렸다. 소천의 실망과 울분, 좌절과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4학년, 겨울 방학이 되었고 소천은 집으로 돌아갔다. 방학이 끝난 뒤에도 소천은 학교에 돌아가지 않았다. 학교에서 느낀 분노와 절망을 가눌 수 없었던 까닭이었다. 소천은 1년 동안 북간도로 가서 방랑했다. 북간도에는 조선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소천은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동시 ‘닭’을 창작했다.
나중에 이 동시는 독립이 된 뒤에 이계석이 곡을 붙여 어린이들이 애창하는 노래가 된다. 이 ‘닭’이란 작품은 아동잡지 《소년》 창간호에 실렸다. 1936년, 소천이 22세 때였다. 후일 아동문학가이며 교육자인 최태호는 ‘닭’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소천은 이 동요 한 편만으로 눈을 감아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 짧은 글 32개의 글자로서 능히 조그만 세계의 찰나를 영원으로 바꾸고 아무데서나 발견할 수 있는 현상에 생명을 빛냈었기에......
‘닭’은 강소천의 이름을 여러 사람에게 알리는 출세작이었던 것이다. 소천은 1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의 아버지는 소천에게 학업을 마칠 것을 권유했다. 소천은 아버지의 권유를 받아들여 학교에 복교, 마지막 학년을 마쳤다. 영생고보를 졸업한 뒤로 소천은 열심히 동시나 동요를 써서 신문과 잡지에 발표했다. 소천에게는 무척 행복한 나날들이었다.
1939년 처음으로 소천은 ‘돌멩이’라는 동화를 썼다. 이 ‘돌멩이’는 동시에 가까운 작품으로 동아일보에 실렸다. 소천은 일제의 한글 탄압으로 고통 받고 있었으나 결코 꿈을 잃고 싶지는 않았다. ‘돌멩이’는 소천의 절망과 꿈을 함께 담고 있는 작품이다.
소천은 진심으로 암울한 시대를 살아가는 조선의 아이들에게 촛불을 켜 주고 싶었다. 호박꽃 초롱은 그 내용처럼 아이들 어두운 마음에 촛불을 켜 주는 동시집이었다. 소천은 나이 31세 때 우리나라는 일제로부터 해방되었다. 소천의 기쁨은 컸다. 우리말과 우리글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소천은 고원 중학교의 국어 교사가 되었다. 교사로 재직한 지 일 년 쯤 되었을 때 고향 친구 중 한 사람인 유관우가 소천에게 연락을 보내왔다. 유관우는 교회 친구들과 아동문학연구회를 조직했는데 소천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때는 아동문학이 간신히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던 때였다. 소천은 그때 마침 아동문학의 맥을 잇고, 아동문학을 활성화시켜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소천은 망설이지 않고 유관우가 있는 청진으로 뛰어갔다. 소천은 2년간 청진여자 중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면서 아동문학 재건에 열성을 쏟았다. 이러는 사이에 세상은 급변하고 있었다.
민족의 광복 이후 38선 이북에는 소련군이, 이남에는 미군이 점령하여 군정을 시작했다. 1947년 9월 17일 제2차 유엔 총회에서 한국위원회의 감시 하에 남북한 총선거를 제의했고 정부가 수립되면 미, 소 양군 철수하기로 했다. 그러나 북한이 이를 극력 반대하여 1948년 5월 10일 남한에서는 남한 단독으로 선거를 실시했다.
군정 3년만인 8월 15일에 남한에 대한민국 정부가 정식으로 수립된 것이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1948년 9월 9일 소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만들었다. 김일성은 북한에서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기독교 신자들은 일제 때보다 더한 박해를 받게 되었다.
소천의 집안은 할아버지 때부터 기독교를 믿어 온 집안인데다 대지주 집안이었다. 이런 소천의 집안을 곱게 볼 리 없었다. 소천은 재산을 모두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언제 인민재판에 회부 될지 몰라 불안에 떨며 지냈다. 그러나 소천에게는 아동 문학을 위해, 아니 어린이를 위하여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았다.
1950년 6.25가 일어났다. 소천은 이때 청진에 있는 제일고급 중학교에서 국어 교사로 있었다. 전쟁은 북한의 승리로 끝날 것 같았으나 남한의 반격으로 9.28 수복을 거쳐 1.4 후퇴가 있었다. 소천은 그동안 틈틈이 써 모은 동시와 동요 및 동화 작품이 담긴 공책 한 권만 들고 철수하는 미군을 따라 흥남까지 갔다. 그런데 미군은 철수 작전에 방해가 된다면서 소천을 비롯한 피난민들을 모두 유치장에 수용시켰다.
소천은 모든 희망을 잃고 자신의 목숨을 하나님께 맡겼다. 그때 어떤 청년이 미군 헌병들을 데리고 “여기 혹시 기독교 신자가 있습니까? 있으면 손들어 주십시오.” 라고 말했다. 소천이 손을 들자 그 청년은 소천을 유치장에서 빼내 LST라는 미군 함정에 태워 주었다. 구사일생으로 죽음의 문 앞에까지 갔다가 살아난 것이었다.
소천은 얼마 뒤 거지꼴이 다 되어 거제도에 상륙했다. 소천은 다만 살기 위하여 산판에 가서 나무도 끌어내리고 장터에서 생선장수도 했다. 그러나 소천이 하고 싶었던 것은 어린이들을 위한 글을 쓰는 일이었다. 전쟁통에 고아가 된 아이들을 볼 때마다 소천은 더욱 간절히 그런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줄 수 있는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소천은 밝은 모습으로 뛰놀고 있는 어린이들이 보고 싶어 근처에 있는 초등학교에 갔다. 그 학교의 교장은 소천의 남루한 모습을 보고 부랑인이라 여겨 학교 밖으로 쫓아내려고 했다. 소천이 그때 자신의 이름을 밝히자 교장은 깜짝 놀라고 반색했다. 교장은 소천의 작품을 읽고 존경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천은 이때 남쪽에도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구나 하고 새로운 창작 의욕을 느꼈다.
그 뒤 소천은 대전을 거쳐 부산으로 갔다. 부산에서 소천은 많은 문인들과 옛 친구를 만났다. 소설가 김동리는 이때의 소천을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그는 매일같이 문교부로 학교로 교회당으로 그의 연고지가 있고 일감이 있는 데를 부지런히 찾아 다녔다. 그것은 단신으로 피난을 와서 생계가 막연하기 때문에 일감을 찾으러 다니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었다. 그보다 그 위인이 그냥 우두커니 앉아 있다거나 빈둥빈둥 놀고먹지는 못하기 때문인 듯 했다. 쉴 사이 없이 아는 사람들을 찾아다니고 일을 거들어 주기도 하고 자기의 일감을 얻어 오기도 하느라고 그렇게 부지런히 왔다 갔다 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되었다.
부산에서 소천은 문인들과 친구들, 친척들을 만나면서 소생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동문학가 이며 교육자인 최태호는 문교부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그는 교과서 만드는 일을 도와 달라고 소천에게 부탁했다. 소천은 그때부터 문교부 편수국에서 교과서를 만들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소천은 아동문학뿐만 아니라 아동 교육에도 깊은 관심을 두게 되었다.
1952년 소천은 월간 어린이 다이제스트의 주간이 되어 어린이 잡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또한 소천은 신문과 잡지에 다시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이해 여름에 소천은 첫 동화집 《조그만 사진첩》을 출판했다. 이 동화집에는 ‘박송아지’, ‘딱따구리’, ‘돌멩이’ 1~2 등 16편의 동화가 실려 있다. 최태호는 소천의 부탁으로 《조그만 사진첩》을 읽고 이렇게 발문을 썼다.
소천이 이번에 《조그만 사진첩》을 출판한다고 한다. 덕분에 나는 그 교정본을 얻어 그의 수십 년 간의 작품을 통독할 기회를 가졌고 덕분에 나의 숙제를 완전히 풀었다. 그는 기교로써 출발하지 않고 무한한 애정으로 먼저 어린이를 관찰하고 파악하였다. 참으로 어린이와 함께 생각하면서 출발하지 않았다면 이러한 소박하고 대담한 작품이 나타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면서 소천 역시 시대와 같이 맞씨름하면서 살아왔다. 왜정의 중압 속에서 그는 안으로 불타 들어가는 정열을 ‘돌멩이’로 팽개쳤고 넘쳐흐르는 울분을 ‘딱따구리’로 발산하였으며 ‘토끼 삼형제’로 승화시켰다. 그리하여 해방의 기쁨을 ‘박송아지’로 수줍게 환희하였다. 《조그만 사진첩》의 종교에까지 승화된 휴머니즘도 동란이 가져온 시대의 산물이라고 믿는다.
이때 어린이들에게는 읽을 만한 동화책 한 권이 변변히 없었다. 게다가 전쟁 중이라 어린이들의 생활은 어둡고 비참했으며 가난에 찌들어 있었다. 가족과 헤어진 어린이들도 많았다. 《조그만 사진첩》에 실린 동화 중에는 전쟁 때문에 가족이 헤어져 살아야 하는 이야기도 많은데 바로 이런 이야기가 메마른 어린이들의 정서를 흠뻑 적셔 주었다.
소천은 불행과 슬픔에 빠진 어린이들의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으며 또 무엇이 불행과 슬픔을 달래줄 수 있는지 잘 알았던 것이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맺어지고 전쟁의 포성이 멎었다. 부산에 피난 와 있던 많은 사람들이 서울로 향했다. 소천도 서울로 왔다. 서울에서 소천은 옛 친구 전택부를 만났다.
전택부는 기독교서회 편집부에 있다가 《새벗》의 주간이 되었다. 《새벗》은 기독교계에서 운영하는 어린이 잡지이다. 소천은 전택부와 왕래하면서 새벗사의 일을 많이 도와주었다. 1955년 전택부는 사상계라는 잡지사로 직장에 옮겼는데 이때 그는 후임자로 소천을 추천했다. 소천은 《새벗》의 주간이 되어 안정된 마음으로 왕성하게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이 해에 두 번째 동화집 《꽃신》을 출판했다. 《꽃신》은 《꿈을 찍는 사진관》과 함께 강소천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꽃신 속에서 ‘그리운 얼굴’, ‘방패연’, ‘푸른 태양’, ‘인형과 크리스마스’ 등 17편의 동화가 실려 있다. 이어 세 번째 동화집 《진달래와 철쭉》도 출판했다. 소천은 일제에게 우리말과 글을 빼앗겨 본 경험 때문인지 우리말과 글에 대한 사랑이 유별났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열띤 어조로 한글 사랑을 외쳤다.
배우기 쉽고 쓰기 쉬운 우리글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어린이들에게 그 어려운 한문을 굳이 가르치는가? 한글만 가지고도 얼마든지 그 뜻을 알 수 있는데...... 이 세상에 우리글만큼 훌륭한 글은 없다. 그의 이런 말은 한글 사랑뿐만이 아니라 열렬한 마음으로 어린이 사랑까지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소천은 직장에 다니면서 작품만을 썼던 것은 아니다. 그는 우리나라의 아동문학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했다. 1953년 한국문학가협회에 아동문학분과 위원장에 선임되면서 아동문학의 발전을 위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1955년에는 한국아동 문학연구회를 만들어 아동문학가 모임을 가졌다. 이 해에 네 번째 동화집 《꿈을 찍는 사진관》이 출간된다. 이즈음 소천의 작품에는 꿈을 그린 동화가 많이 나타난다. ‘인형의 꿈’, ‘꿈을 파는 집’, ‘커다란 꿈’, ‘8월의 꿈’, ‘꼬마들의 꿈’, ‘노랑나비의 꿈’ 등이다. 전쟁 때문에 헤어진 가족들의 그리움을 꿈속에서나마 달랬던 것이다.
동시도 역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썼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소천은 점점 그리움과 꿈이라는 주제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래서 소천은 어린이들에게 삶의 희망을 심어 주는 교육성이 강한 생활동화를 쓰게 되었다. 소천은 꿈과 교육은 동화에서 그 비중이 똑같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때 이 땅의 어린이들은 전쟁이 할퀴고 간 폐허의 땅에 살고 있었다. 어린이들에게 더 급한 것은 독서가 아니라 먹고 사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어린이들의 심성도 날로 황폐하여져 갔다.
소천은 동료들에게 이럴 때일수록 아름다움을 안겨 주는 동화가 필요하고 어린이들의 마음에 사랑을 심어 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어린이 사랑은 소천이 동화를 쓰는 목적이었다. 그리하여 소천은 이 땅의 어린이들을 위하여 ‘어린이 헌장’을 만들게 된다. 1957년, 사람들이 전부 폐허를 복구하며 먹고 사는데 급급하여 어린이에게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때였다. ‘어린이 헌장’은 강소천이 한 자 한 자 정성을 들이고 다듬어 만들었으나 당시 아동문학가협회의 이름으로 발표했다. ‘어린이 헌장’은 다음과 같다.
▲어린이 헌장
1. 어린이는 인간으로 존중하여야 하며 사회의 한 사람으로서 올바르게 키워져야 한다.
2. 어린이는 튼튼하게 낳아 가정과 사회에서 참된 애정으로 교육하여야 한다.
3. 어린이에게는 마음껏 놀고 공부할 수 있는 시설과 환경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4. 어린이는 공부나 일이 몸과 마음의 짐이 되지 않아야 한다.
5. 어린이는 위험한 때에 맨 먼저 구출해야 한다.
6. 어린이는 어떠한 경우라도 악용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7. 굶주린 어린이는 먹여야 한다. 병든 어린이는 치료해 주어야 하고 신체와 정신에 결함이 있는 어린이는 도와주어야 한다. 불량아는 교화하여야 하고 고아와 부랑아는 구호하여야 한다.
8. 어린이는 자연과 예술을 사랑하고 과학을 탐구하여 도의를 존중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9. 어린이는 좋은 국민으로서 인류의 자유와 평화와 문화 발전에 공헌할 수 있도록 키워야 한다.
위의 ‘어린이 헌장’은 1957년 5월 5일 어린이날에 발표되었다. 방정환이 어린이 사랑 운동을 맨 처음 시작하였다면 소천의 어린이 헌장 발표는 어린이 사랑 운동의 결실이었다. 그때까지 어린이를 사랑하자, 어린이를 위하자라고 여러 사람들이 외치고 있기는 했으나 어떻게 하는 것이 어린이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어린이 헌장은 어떻게 하는 것이 어린이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길인가? 그 방법을 제시하였다고 하겠다. 어린이 헌장 발표 한 해 전인 1956년에 소천은 다섯 번째 동화집 《종소리》를 출판했다. 1957년에는 여섯 번째 동화집 《무지개》를, 1958년에는 일곱 번째 동화집 《인형의 꿈》을 각각 출판했다. 소천은 매우 열심히 글을 썼다. 그리고 쉬지 않고 부지런히 글을 썼다. 어쩌면 소천은 자신의 생명이 짧다는 것을 알았는지도 모른다.
1959년에 소천은 이화여자 대학교에서 기독교학과와 국문학과 그리고 대학원의 도서관학과의 강의를 맡았다. 그 뒤 연세 대학교에서도 기독교학과와 국문학과 강의를 맡았다. 이때 아동문학 강좌를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대학의 강의 과목에 넣게 했다. 영생고보 때부터의 친구이며 대학교수였던 박창해는 이때 소천에게 교수가 될 것을 권해 보았다. 그러나 소천은 거절했다. 내가 할 일은 대학생을 가르치는 일보다 어린이에게 끊임없이 좋은 동화와 동시를 주는 일이다. 이것이 그의 거절 이유였다.
1959년 10월 소천은 문교부 교수요목제정 심의위원이 되고 국정교과서 편찬심의위원이 되어 교과서 만드는 일을 다시 하게 되었다. 1960년에 소천은 여덟 번째 동화집 《대답 없는 메아리》를 출판하였다. 같은 해에 소천은 아동문학연구회의 회장이 되었다. 이때 소천은 아동문학가들은 어린이 교육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소천은 또한 아동문학독본을 출판하였는데 이렇게 문학 독본을 만든 것은 어린이들에게 맞는 문장이 아쉬웠기 때문이다.
1961년 소천은 위암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그러나 수술 경과가 좋아 건강한 몸으로 퇴원할 수 있었다. 이때 의사는 너무 무리하게 일을 하지 말 것을 권유했으나 소천은 동화를 쓰는 일과 아동문학을 연구하는 일로 쉴 틈이 없었다. 그리고 학교도서관을 설립토록 권유하고 학교에서 어린이 신문이 발간될 수 있도록 항상 이야기하였다.
1963년에는 아홉 번째 동화집 《어머니의 초상화》를 냈고 같은 해 《그리운 메아리》도 출판했다. 이와 같은 무리한 활동으로 다시 병원에 입원했다. 이번에는 간암이었다. 이때 소천의 나이는 48세였다. 소천은 끝내 간암을 이겨내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가고 말았다. 그의 유해는 경기도 양주군 교문리에 안장되었다. 그가 떠난지 약 보름 뒤인 5월 20일에 그에게 문예상 본상이 수여되었다.
1965년부터 김동리, 박목월, 박종화, 조지훈, 조석기, 최태호 등의 문학가들이 그의 부인 최수정과 함께 ‘소천아동문학상’을 제정하였다. 이 상은 후배 아동문학가들에게 수여되고 있다. 1985년 10월 19일 문화의 날에 국민훈장 대통령 금관 문화훈장이 소천에게 수여되었다. 소천은 자신이 일찍 죽어 별이 되리라 예감을 했는지 그의 시 별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그래도, 내 별도 천 년 만 년을 두고두고 날 찾고만 있을까? 내가 이미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린 뒤에도 내 별은 남아 있어 날 찾고만 있을까?
■ 小泉에게 (조시) / 박목월 시인
해질 무렵의 등불이 켜질 때마다
우리는 小泉을 생각하리라
밤하늘로 열린 창처럼
그 새까만 신비스러운 눈을 기억하리라
병아리를 볼 적마다
우리는 小泉을 생각하리라
병아리가 쳐다보는 그 하늘에
미소로 살아나는
小泉에게 우리는
인사를 보내리라
어린 아기들을 만날 적마다
우리는 小泉을 만나게 되리라
ㅡ 박송아지 창덕군을
ㅡ 꽃신의 난이를
ㅡ 영원히 열두 살인
꿈을 찍는 사진관의 순이를
그리고 눈이 뚜리뚜리한 꾸러기들을
그들은 영원히 살아있는
姜小泉의 세계의 강소천이들......
소천은 한없이 섬섬한 날개로 화하여
흔들리는 옷자락으로
한 덩이의 구름으로
한 방울의 이슬비로
姜小泉이의 나라의 강소천이는
영원히 이 세상에 살아있으리라
■ 哭小泉兄 / 박목월 시인
小泉兄(소천형)이 떠났다는 기별을 받고 그의 집으로 달려갔다. 집근처 전선주에 ‘姜喪家(강상가)’라는 표지가 나붙어 있었다. ‘姜喪家’라는‘姜’이 ‘姜小泉’을 의미하는 것일까. 비로소 小泉兄이 세상을 떠난 사실에 실감이 들면서 슬픔이 복받쳐 올랐다.
20여일 전만 해도 온양(지금의 아산시)에 다녀왔노라고, 조용해서 글쓰기 좋더라고 내게 전화를 걸어온 그다. 또한 문협신인상 심사 때도 우리와 동석해서 방송국 박사답게 재치 있는 농담으로 우리를 웃게 한 그다. 그러나 그 음성 그 웃음이 마지막일 줄은 꿈에도 모르고 우리는 헤어졌다. 그 후 병원에 가서 그의 얼굴을 잠시 보긴 했지만 이미 말 한마디 나눌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떠났다. 이렇게 허무할 수 있을까. 영원히 잠든 그의 앞에 앉아 묵념을 드리는 나의 마음은 표현할 길이 없다. 그와는 문학을 통하여 이미 30여 년 전에 편지로 사귄 친구다. 아동문학에 전심하여 수많은 작품을 발표하였고 또한 빛나는 업적을 쌓은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이번에도 장편소설을 쓰기 위한 과로로 병이 재발하여 급기야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그의 30여 년 간의 집필생활 중 온갖 역경을 다 물리치고, 이제 그의 붓이 완숙의 경지에 이른 지금, 그가 세상을 하직한 것은 너무나 원통한 일이며, 그동안 나는 그의 충실한 벗이 못되었음이 한없이 뉘우쳐진다. 그러나 아무리 뉘우쳐도 소용없는 일이다. 그는 영원히 잠들어 버린 것이다.
小泉!
나의 푸념이 무슨 보람이 있으랴.
小泉!
고이 잠드시오. 주님의 품안에,
편히 쉬오. 小泉, 편히 쉬오.
비록 형은 땅 밑에 쉬더라도 한국에 대대로 자라는 어린이들은 형의 작품에서 그려놓은 것처럼 《꿈을 찍는 사진관》에서 영원히 형의 뜻과 모습을 그려내고 이어갈 것이다.
[출처] 《영원한 어린이의 벗 강소천》 강소천 공식 블로그 동시 동요 中에서 발췌
/ 2021.02.17 편집 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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