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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산책] 홍릉숲에 피어난 복수초, 의릉 산책, 천장산 하늘길 걷기 (2021.01.30)

푸레택 2021. 1. 30. 21:18

■ 홍릉숲 복수초, 천장산 하늘길 걷기

집 출발~마곡나루역~고려대역~홍릉수목원~홍릉숲 산책(복수초)~천장산 하늘길 걷기~군부대~경희대 평화의 전당 뒤~의릉(향나무)~한예종~신이문역~마곡나루역~집도착

2021년 1월 30일 12시, 산림과학원 홍릉수목원 정문에서 안 대장과 손 선생님을 만났다. 홍릉숲 양지 바른 곳에 봄의 전령사 '복수초'가 세 송이 피어 있었다. 복수초는 잔설 속에서 얼음을 녹이며 피어난다 하여 '얼음새꽃'이라고도 한다. 풍년화는 아직 피어나지 않았다.

하늘이 숨겨둔 천장산 하늘길(1.76km)을 걸었다. 경종과 왕후가 잠들어 있는 '의릉'을 찾았다. 160살 향나무가 멋지다. 한예종은 코로나로 출입금지다. 오랜만에 멀리 산책 나들이를 했다. 아침에 눈발이 뿌리더니 오후엔 맑게 갰다. 봄날처럼 따뜻하다. 코로나도 빨리 잠잠해지고 이대로 봄이 왔으면 좋겠다.

■ 의릉 (懿陵)

사적 제204호, 경종과 선의왕후의 능

의릉은 제20대 경종(1688~1724)과 계비 선의왕후(1705~1730) 어 씨의 능으로 서울시 성북구 석관동에 있다. 경종의 아버지는 숙종이며 어머니는 한국 역사에 큰 파란을 일으킨 희빈 장 씨다.

경종을 비운의 왕이라 부르는데 생애가 어릴 적부터 편치 않았기 때문이다. 경종은 폐비 장희빈의 소생인 데다 정치적으로는 남인계에 속하기 때문에 정치적 실세였던 서인들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러나 숙종은 신하들의 벌떼 같은 항의에도 경종을 세자에 책봉했다. 이 때문에 송시열은 사사되었고 서인은 실각했다.

희빈 장 씨가 숙종에게 총애받던 시절 경종은 총명함이 뛰어난 세자로 칭송받았고 숙종의 극진한 배려 속에서 성장했다. 숙종은 학문에 힘쓰는 것을 중히 여겨 세자는 4세 때 『천자문』을 익혔고 8세 때 성균관 입학례를 치렀다. 실록은 "세자가 입학례를 행하는데 글을 읽는 음성이 크고 맑아서 대신들이 서로 축하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라고 전한다. 그런데 그가 14세 되던 해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숙빈 최 씨가 이복동생인 연잉군(뒤의 영조)을 출산하면서 숙종과 장희빈의 관계가 멀어지자 세자 또한 숙종의 관심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정치적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파되면서 숙빈 최 씨는 노론의 지지를 받았고 세자는 소론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다 희빈 장 씨가 인현왕후를 모함했다는 것이 알려지자 숙종은 그녀를 용서하려 하지 않았다. 이는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이므로 신하들은 상소를 거듭했다. 그러나 숙종은 냉철하게 희빈 장 씨를 내치고 사약을 내렸다. 이때부터 경종은 점차 내성적인 성격으로 변했고 심한 우울증을 앓았다고 전해진다.

숙종은 병약한 경종을 보며 후사가 없을 것을 우려해 몰래 이이명을 불러 이복동생인 연잉군을 후사로 정할 것을 부탁했다. 이것이 추후에 큰 화를 불러 그를 지지하는 소론과 연잉군을 지지하는 노론간 당쟁이 격화된다.

경종이 즉위한 지 2개월 만에 그의 무자다병(無子多病)을 이유로 건저각주 논의가 일어났다. 노론인 영의정 김창집 등은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한 후, 왕이 병환 중이어서 정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어려우므로 휴양해야 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세제에 의한 대리청정을 요구했다. 이에 소론은 왕권을 침해하는 불충이라며 강하게 반발해 이 안건은 결국 철회되었다.

하지만 나이 어린 연잉군을 앞장세우려는 속셈이 뻔히 보여 결국 소론에 의해 노론은 철퇴를 맞는다. 마침 노론이 주도해 경종을 폐출하려는 역모 사건이 소론 목호룡의 고변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기회를 엿보던 소론은 유배 중인 노론 핵심 4명을 사사한 뒤 노론의 주도적 인물 50여 명을 처단하고 170여 명을 유배 또는 연좌로 처벌했다. 이것이 '신임사화'다.

이후에도 소론의 과격파인 김일경 중심 정권은 노론에 가혹한 탄압을 벌여 경종의 재위 4년 동안은 당쟁의 절정기였다. 이런 정국의 혼란은 경종의 건강을 더욱 악화했고 그는 즉위 4년이 되던 해 자리에 누운 지 며칠 만에 급서했다. 짧은 치세 기간이었지만 경종은 서양의 수총기(소화기)를 모방해 제작했고, 독도가 우리의 영토라는 내용을 담은 남구만의 『약천집』을 간행하는 등 열성적으로 업무에 나서기도 했다.

경종의 계비 선의왕후는 함원부원군 어유구의 딸로, 세자 시절 첫 번째 세자빈이었던 단의왕후가 숙종 44년(1718) 사망하자 세자빈에 책봉되었고 경종이 즉위함에 따라 왕비가 되었다. 그녀는 매사에 조심스럽고 온유한 성품을 지녔다고 한다. 선의왕후는 경종이 사망하자 왕대비에 올랐다가 26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한다. 두 사람 사이에 자녀는 없었다.

의릉은 쌍릉이지만 다른 왕릉과 약간 다른 점이 있다. 왕릉과 왕비 능이 각각 단릉의 상설을 갖추었지만 뒤에 있는 왕릉만 곡장을 둘렀다. 일반적으로 쌍릉은 좌우로 조성하나 이 능은 앞뒤로 약간 축을 비껴 조성했다. 전후 능설 제도는 효종과 인선왕후 장 씨가 묻힌 여주의 영릉에 처음 나타난 형식이다.

[출처] 'Daum 백과'에서 발췌

/ 2021.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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