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겨울 단상 / 허재환
새벽 산책을 나갔는데 하얀 눈이 온 세상을 덮었다. 가끔 이렇게 세상을 변화시키는 재주가 놀랍다.
거실에서 매일 아침 차 한 잔하면서 거실창 건너편으로 들어오는 산들과 풀냄새 거기에 새소리까지 더해 널다란 유리들판 그림을 그려본다. 계절마다 소재도 냄새도 소리도 다르다. 하루하루 그려지는 특색 있는 시골의 그림이 편안하고 아름답다.
하지만 겨울은 유리 화폭에 옮기기가 참 어렵다. 을씨년스럽고 삭막하기도 하니... 그런데 엊저녁 기온이 내려가더니 눈발이 조금 흩날렸을 뿐인데 삭막한 세상이 사라지며 하얀 화폭만 남겨놓았다. 백색의 페인트칠을 해놓은 것처럼. 겨울은 소재도 다양하지도 않아 화폭에 옮기기 어렵다고 한 소리를 신께서 들으셨나보다.
함박눈을 내려주시면 내가 그림을 그릴 필요도 없잖은가? 어떤 계절보다 설경이라는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 주셨으니까. 그래 네 마음대로 그림을 그려보라고 신께서 얇게 하얀색으로 덮어놓으셨겠지.
몇 걸음 나가다가 하늘을 바라보았다. 휘영청 밝은 달이 밤인지 낮인지를 헷갈리게 한다. 땅에는 화폭으로 둘러주시고 하늘에는 밝은 달을 걸어두시니 그럼 내가 붓을 들 필요가 없어져 서운한 마음이 들었으나 곧 마음을 가다듬고 사진에 몇 장을 담았다.
어느 누가 이렇게 깊은 새벽에서 밝은 세상을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하겠는가. 좋은 일이 있게 하는 하얀 눈과 삶의 깊이를 갖게 하는 차가운 달이 있어 오늘 세상은 기쁨으로 충만하다. 어두우면 어두운대로 하루의 삶을 받아들이는 깊은 진리가 우리를 깨우치고 있음에 또한 행복한 하루를 받아들인다.
ㅡ 충남 서천에서 보내온 편지 (2021.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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