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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영화] 한 순간에 노예가 되어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 실화 영화 '노예 12년' (12 Years a Slave, 2013) (2021.01.21)

푸레택 2021. 1. 22. 10:43

■ 다시 보는 영화, '노예 12년'(12 Years a Slave)

코로나19는 개봉영화를 보러 영화관을 찾는 나의 작은 즐거움마저 빼앗아갔다. 요즘 영화 매니아들은 영화관을 찾는 대신 집에서 넷플릭스(netflix)를 통해 신작 영화를 본다고 한다. 나는 노트북에 저장된 옛 영화를 다시 보며 코로나블루(corona blue)를 이겨내고 있다. 오늘은 7년 전에 개봉한 실화 영화 '노예 12년'을 다시 보았다.

'노예 12년'(2013)은 솔로몬 노섭의 자서전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1840년대 미국, 주인공 솔로몬 노섭(치웨텔 에지오프)은 아내와 두 자녀와 함께 자유인으로 행복하게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뉴욕에서 인신매매범들에 의해 납치되어 루이지애나에서 12년 동안 노예로 살아간다. 마침내 한 캐나다 출신 목수의 도움으로 피눈물나는 12년 간의 노예생활에서 벗어나 가족들과 감격의 재회를 한다.

"나는 노예가 아닙니다. 나는 단지 생존하고 싶은 게 아니다. 살아가고 싶다." 아무리 외쳐도 소용이 없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가족과 있었는데... 그게 모두다 사라졌다구요. 내 아내와 가족을 볼 수만 있다면 말로 다 못할 행복일 거에요. 나는 절망에 빠져있지 않을 거야... 자유의 기회가 올 때까지 버틸거라구." 솔로몬 노섭은 채찍질을 견디며 외치고 다짐하고 이를 깨문다.

노예생활 12년, 억울하게 노예로 팔려가 갖은 수모와 고통을 겪고 끝내 탈출하여 자유를 되찾는 이 영화의 스토리는 '쇼쌩크 탈출'을 떠올리게 한다. "나의 자유로움을 기다리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당신의 자유로움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많을 것이오." 그의 탈출을 도와주는 한 캐나다인 목수(브래드 피트)의 대사가 귓가를 맴돈다.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쥐도 새도 모르게 어디론가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고 허위 자백을 강요당하는 그런 세상에서 살아간다면 얼마나 분통터지는 일일까? 외부와 연락조차 할 수 없고 생각의 자유마저 빼앗긴 채 살아간다면 얼마나 억울할까? 내가 나의 삶의 주인공이 되지 못하고 누군가의 노예로 종으로 살아간다면 얼마나 슬픈 일일까?

인간이 얼마나 잔인한 존재인지,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를 동시에 보여준 영화, '노예 12년'.
파란 하늘을 보고 흘러가는 시냇물 소리를 들으며, 움트는 새싹과 풀꽃을 보고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삶. 사랑하는 사람과 정겨운 이웃들과 더불어 평화롭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하고 값진 것인지 새삼 깨닫는다.

“Life is dear to every living thing; the worm that crawls upon the ground will struggle for it.” (삶은 모든 생물에게 소중하다. 땅에 기어 다니는 벌레조차 그것을 위해 고군분투할 것이다.)

/ 2021.01.21 김영택 씀


■ 다시 찾아서 본 영화 '노예 12년' 줄거리

1.
주인공 '솔로몬 노섭'은 뉴욕에 거주하는 흑인 바이올린 연주자로 뛰어난 실력으로 괜찮은 벌이를 하며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부족함 없는 삶을 살고 있다. 그의 신분은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이었다. 이렇게 행복했던 삶을 살고 있던 솔로몬은 어느 날 아내가 출장을 떠나며 자식들을 데리고 나간 사이, 주변인의 소개로 유랑 서커스단 운영자를 만나 워싱턴 D.C.에 가서 좋은 대우로 같이 일하지 않겠느냐며 권유를 받고 이에 응한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솔로몬을 납치하려는 수작이었으며, 그들은 저녁식사 때 약을 탄 술을 건네 취하게 만든 뒤 노예상에게 넘긴다. 결국 자다가 일어나보니 하루아침에 노예 신세가 된 것. 솔로몬은 자신은 자유인이라고 항변해 보지만 그때마다 돌아오는 것은 채찍질뿐이다. 억울한 자신의 사연을 들어줄 이도 없이 배를 타고 노예시장에 끌려가게 되고 이름마저 '플랫'으로 바뀐다.

솔로몬은 윌리엄 포드라는 농장주에게 팔려나간다. 포드는 동정심을 가진 주인이었지만 돈과 채무 때문에 양심은 뒤로 밀려나기 일쑤였다. 솔로몬은 자유인이던 시절에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포드의 사업에 도움을 주게 되고 신뢰를 얻게 된다. 그러나 노예 관리인에게 미운 털이 박히고 이들은 솔로몬을 괴롭힌다.

두 번째로 만나게 된 주인 에드윈 엡스는 악명높은 농장주였다. 성격이 괴팍하고 예측할 수 없는 폭군으로, 성경을 읽어주면서 '성경에 쓰여있기 때문에' 그들이 도망가거나 하면 매를 맞을 수밖에 없다며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한다. 술에 취해서는 노예들을 두들겨 깨우고 춤을 추게 한다. 뿐만 아니라 노예들이 딴 목화가 하루치에 미달하면 채찍질을 가할 정도로 포악한 모습을 보인다.

흑인 여자 노예 팻시가 이웃 농장의 흑인 안주인에게 비누를 빌리러 가자 탈출했다고 오해하여 미쳐 날뛰다가 돌아온 팻시를 처음에는 솔로몬을 시켜 때리다가 나중에는 본인이 직접 매우 혹독하게 채찍질을 가한다. 이렇게 끔찍한 생활을 보내면서 솔로몬은 탈출할 기회를 노려보았지만, 도망을 치려다가 잡힌 흑인 노예 두 명이 목매달려 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고 겁이 나서 포기한다.

이렇게 마지막 희망까지 사라지나 싶었지만, 캐나다 출신의 목수 베스(브래드 피트 분)와 함께 건물을 짓게 되면서 상황이 달라진다. 베스는 농장주 엡스에게도 노예제의 부당함을 연설하는 등 열렬한 노예제 폐지론자였다. 베스와 친해진 솔로몬은 베스에게 자신의 친구들에게 자신이 부당하게 노예가 되었으며 자유인임을 알리는 증명서를 갖고 와 달라고 하도록 부탁한다.

다행히 베스는 솔로몬의 부탁을 들어주었고, 얼마 후 솔로몬은 그의 친구들에 의해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온다. 12년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꼬맹이였던 아이들은 어느새 크게 자랐고, 솔로몬의 딸은 결혼해 손자까지 낳은 상태였다. 그렇게 갖은 고생 끝에 솔로몬은 집으로 돌아왔고, 가족들과 감격스런 재회를 하며 영화가 끝난다. ㅡ '나무위키'에서 발췌

2.
1841년, 솔로몬 노섭은 뉴욕주에서 아내와 어린 두 자녀와 함께 살면서 숙련된 목수일과 바이올린 연주도 하는 자유흑인이다. 어느날 두 남성이 솔로몬 노섭에게 서커스에서 2주간의 연주 제의를 하면서 접근한다. 그들은 솔로몬 노섭과 여행을 하며 지내다 축하하는 자리에서 그를 마취시킨다.

솔로몬 노섭이 마취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쇠사슬에 묶여있다는 것과 곧 노예로 팔릴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두 남자들은 인신매매를 하는 자들이었는데, 실제로 미국에서는 노예해방령에 의해 노예제도가 없어진 후에도 흑인들을 납치하여 인신매매하는 일들이 있었다.

솔로몬 노섭은 농장을 소유한 윌리엄 포드에게 팔린다. 솔로몬 노섭은 주인인 포드와 관계를 잘 유지한다. 그러나 포드는 솔로몬 노섭을 에드윈 앱스에게 팔아넘긴다. 앱스는 그가 소유한 노예들을 학대하는 권리는 성서가 허락한 것이라고 믿고 성서의 여러구절을 자주 읽어준다. 그리고 이른바 노예의 운명이라는 것과 신성한 처벌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라고 노예들을 설득한다.

실제로 미국 남부의 기독교인들은 성서는 정확하고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문자 그대로 읽어야 한다고 믿는 근본주의 또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었다.
미국 남부의 기독교인들은 성서에 노예들이 나온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노예제도는 성서가 허락한 것이라고 믿었다. 물론 이들의 진심은 노예가 없으면 농장에서 농사를 지을 수 없어 노예제도가 계속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솔로몬 노섭은 캐나다 출신의 목수 베스와 전망대 건설작업을 하게 된다. 배스는 노예제도에 대한 반대의견을 내어 앱스의 불만을 사지만, 이로 인해 노섭은 자신이 납치당한 이야기를 배스에게 털어놓고 편지를 보내달라는 도움을 청한다. 베스는 너무 위험하다며 처음에는 주저하였으나 마침내 편지를 전해주기로 한다.

일행 한 명과 마차에 탄 지역보안관이 예고없이 노섭을 찾아온다. 보안관은 솔로몬 노섭이 뉴욕에서 온 것이 맞는지 사실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여러 질문을 한다. 솔로몬 노섭은 보안관과 동행한 사람이 사라토가에서 그가 알고 지내던 상점주인이라는 것을 알아챈다. 그는 솔로몬 노섭을 해방시키기 위해 달려왔고 둘은 얼싸안는다. 솔로몬 노섭은 팻시와 마지막 포옹을 나눈 후 그녀의 슬픔을 뒤로 한 채 떠난다.

12년 간의 노예생활 끝에, 솔로몬 노섭은 자유를 되찾고 그의 가족의 품으로 되돌아온다. 엔딩 자막에는 솔로몬 노섭이 그를 납치한 사람들을 법정에 세우기는 했지만 유죄를 입증하는 것은 실패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1853년, 솔로몬 노섭은 '노예 12년'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발간한다.

당시 미국은 노예제도를 금지하는 주와 인정하는 주로 나뉘어져 있었다. 주인공 솔로몬 노섭은 뉴욕에서 납치되어 루이지애나에서 12년 동안 노예로 살아간다. 이 영화의 감독은 스티브 맥퀸이며, 영화배우 브래드 피트가 제작에 참여했다. 영화가 개봉된 이후 평단에서 올해의 최고 영화라는 찬사가 이어졌다. 2014년 1월 71회 골든 글로브상 시상식에서 드라마부문 작품상을 받았으며, 같은 해 2월 67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작품상과 남우주연상을, 3월에 개최된 86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작품상과 여우조연상, 각색상 등 3관왕을 차지하였으며 9개 부문에 지명되었다. ㅡ 다음 백과사전에서 발췌

3.
'노예 12년' 주인공 솔로몬 노섭, 자유 되찾은 날

“나는 노예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의 말을 들어 주지 않았다. 베스의 도움으로 노섭은 12년 동안의 노예생활 끝에 극적으로 탈출해 자유를 되찾고 가족의 품으로 되돌아온다. 이날이 바로 1853년 1월 4일이었다. 노예생활 동안 아무도 노섭이 노예가 아니라는 말을 믿어 주지 않았다. 그가 자유인임을 증명하는 방법은 가족들에게 편지를 써 연락이 닿는 방법뿐이었다.

하지만 농장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신이 글을 쓸 수 있다는 사실조차 숨겨야 했다.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한 노섭은 자신을 팔아넘긴 노예 인신매매꾼들을 고소했지만 그들은 처벌받지 않았다. 당시 워싱턴 D.C의 법을 보면 흑인은 백인에게 반하는 증언을 할 수 없었다. 증언 없이는 민사상 고소 자체가 불가능하므로 사실상 흑인에게 불리한 악법이었던 셈이다.

솔로몬 노섭은 탈출 이후에 자서전 '12년간의 노예생활'을 출간했다. 이 책은 1853년 출간 당시 2만 7000부가 판매되며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한다. 솔로몬 노섭은 책 출간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노예 인권 활동가로 활약했다. 그는 강연과 연설을 통해서도 노예제도의 야만성을 알리며 폐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9세기 미국에서 활동하던 노예 해방을 위한 비공식 조직인 ‘지하철도’에서 활동했다는 기록도 있다.

흑인 인권을 향한 노섭의 꾸준한 노력 덕분이었을까? 1860년 미국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된 에이브러햄 링컨은 미국을 통합하는 의미에서 1863년 노예제도를 폐지했다. 20세기 들어서는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주도로 흑인 해방 운동이 조금씩 주목받게 된다.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가혹했다. 실제 노예제도는 폐지됐지만 흑인들에 대한 인식은 개선되지 않았다.

대표적인 사건이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이다. 링컨이 노예제도 폐지 선언을 한 지 95년이 지난 1955년 12월 1일, 미국 오하이오주 몽고메리 시에서 로자 파크스라는 흑인 여성이 버스에서 수갑이 채워진 채 체포되어 쫓겨난 일이 일어났다. 그녀가 체포된 이유는 단지 백인 남자에게 좌석을 양보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당시 몽고메리시는 버스 앞 네 줄을 백인 전용 좌석으로 지정했다. 흑인을 비롯한 유색 인종은 이 자리를 제외한 뒤쪽에 앉을 수 있었다. 또한 백인 전용 좌석이 만석일 경우에는 흑인이 자리를 양보해야 했다. 버스가 만원이 되면 타는 순서에 상관없이 흑인들이 내려야 했다. 당시 버스 이용객들의 75%는 흑인들이었고, 이들은 지속적으로 이 문제에 대해 불만을 제기해 왔다.

이런 상황에서 일어난 파크스 체포 사건은 흑인 사회에 이른바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을 불러일으켰다. 이 운동으로 몽고메리 지역의 흑인들은 집단 파업과 버스 승차 거부 운동을 벌였다. 이들은 1955년 12월부터 이듬해 11월 13일까지 보이콧을 지속하며 흑백 분리주의에 따른 인종차별 철폐를 요구했다. 이때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가 이 운동에 동참했다.

킹 목사는 버스 보이콧 운동을 비폭력 평화 시위로 이끌었다. 이 운동이 1년 만에 승리로 끝나면서 국민적 지지를 받게 됐다. 킹 목사가 인권 운동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이다. 솔로몬 노섭이 자유인의 삶을 누렸던 뉴욕 주 새러토가에서는 매년 7월 셋째 주 토요일을 ‘솔로몬 노섭의 날’로 지정해 그의 뜻을 기리고 있다.

[출처] 한겨레 기사(2018. 01. 04) 발췌

/ 2021.01.21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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