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인생] 가곡 가요 동요 찬송가

[노래인생] 이애리수와 황성옛터 이야기 (2021.01.06)

푸레택 2021. 1. 6. 21:24

 

 

 

 

 

☆ 황성(荒城)의 적(跡) / 이애리수

황성옛터에 밤이 드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가엽다 이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고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메여 있노라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 못이루어
구슬픈 벌레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나는 가리로다 끝이 없이 이 발길 닿는 곳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정처가 없어도
아 괴로운 이 심사를 가슴 깊이 묻어놓고
이 몸은 흘러서 가노니 옛터야 잘 있거라

☆ 황성옛터 / 왕평 작사, 전수린 작곡(1928)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나
아~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못이뤄
구슬픈 버레소리에 말 없이 눈물져요

성은 허물어져 빈 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나
아~가엾다 이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
덧없난 꿈의 거리를 헤매여 있노라

나는 가리라 끝이 없이 이 발길 닿는 곳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정처가 없이도
아~한없는 이 심사를 가슴속 깊이 품고
이 몸은 흘러서 가노니 옛터야 잘 있거라

■ 최초의 국민가수 이애리수의 '황성옛터'

지난 3월 31일 오후 3시 그동안 잊혀졌던 원로가수 이애리수가 우리 곁을 떠났다. 일본제국주의에 나라를 빼앗긴 사연을 담은 노래 “황성의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설은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 못 이뤄 구슬픈 벌레소리만 말없이 눈물져요”, “성(城)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芳草:우거진 풀)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 아! 가엽다 이 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 끝없는 꿈에 거리를 헤매어 있노라”

느린 3박자의 리듬에 단음계로 작곡된 한국 최초의 가요곡과 같은 가사에 나라 잃은 심정(心情)을 담은 노래이며 백의민족의 심금을 울린 것으로 유명하다. 1928년 서울 종로에 있는 단성사에서 18세 연극배우이자 가수인 이애리수가 처음으로 무대에서 이 노래를 불렀다. 진성(眞聲) 가창법의 한 맺힌 목소리는 객석을 술렁이게 만들었다. 순식간에 국민의 가슴을 적신 그녀는 스타로 떠올라 대중 가요사에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1932년 최초의 취입 빅터 레코드 라벨에 인쇄되었던 곡명은 ‘황성의 적(자취 跡)’이였다. 경북 영천 출신인 왕평(王平)이 노랫말을 짓고 경기 개성 출신의 작곡가 전수린(全壽麟)이 일제 강점기 암울했던 시대성(性)을 담아 곡을 붙였다. 황성옛터에 명곡을 붙인 전수린은 1928년 고향 송도(松都)에서 나라 잃은 억울함에 고려의 옛궁터 만월대의 쇠락에 흔적을 돌아보고 역사의 무상함을 느껴 즉흥적으로 작곡 했다고 한다.

‘황성의 적’은 음반이 5만 장이나 팔려 나갈 정도로 많은 인기를 얻었다. 당시 5만 장은 현재 기준으로 500만 장에 버금가는 인기를 나타낸다. 국민가요가 되었던 ‘황성의 적’은 이 노래를 통해 나라 잃은 설움을 상기시킬까 염려한 일제 조선 총독부의 압력에 의해 금지곡이 되었다. 그 후 주춤하긴 했지만 남북 3천만 민족의 제2애국가가 되어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

이애리수는 1910년 개성에서 태어나 1919년 9세 때부터 아역배우로 무대에서 활동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녀의 운명이 바뀐 것은 희극배우였던 외삼촌의 영향을 받아 순회극단에 들어간 일이었다. 이애리수는 신극좌 민중극단 취성좌 등에서 인기배우로 성장했으며 조선 연극사 연극시장등 흥행극단에서 주연을 맞게 되었다.

그녀의 본명은 이음전(李音全)이었으나 서양 인기 연애인 이름을 딴 “엘리스”를 음차(音叉:소리변형)인 에리사가 에리수로 변해 이애리수로 부르게 되었다. 이때 그녀는 잠시 연극무대를 접고 1931년 콜롬비아 레코드사 번연가요 ‘메리의 노래’, ‘라인강’, ‘부활절 우리가요’, ‘버리지는 말아주세요’ 등을 취입했다.

22세에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재학생이던 배동필과 연애하며 결혼을 약속했지만 부친의 반대에 동반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그것은 엘리트였던 대학생과의 현격한 신분 차이 때문이었다. 유고사상이 틀에 박혀 연극, 노래하면 딴따라 광대 취급을 받던 때였다.

간신히 결혼했지만 완고한 시집에서는 노래를 금지시켰고 70년이란 세월 속에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 안주하면서 가수라는 이름조차 잊어야했다. 우여곡절 끝에 결혼해 대중 앞에 어쩔 수 없이 자취를 감추었던 것이다.

은퇴한 후 소식이 끊겨 오랜 세월은 죽은 줄 알았지만 갑작스런 생존의 소식에 지난 해에는 일산 백송마을의 한 아파트형 요양시설에서 자녀 손자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고 있다는 것과 2남 7녀의 어머니라는 것이 알려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가수라는 사실을 주변에 알리지 말라는 시아버지 조건인 결혼 서약을 지킨 며느리 이애리수는 끝내 KBS 가요무대 출연 한 번 못하고 눈을 감고 말았다. 이애리수가 나라 뺏긴 개성 만월대 황성옛터 불렀던 그 시절은 그래도 고향에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도 그곳엔 고향이 있는데 이념은 38선을 그어 놓고 말았다.

[출처] 양주/동두천신문(2009.06.19)

■ 황성옛터 - 이애리수

1928년 늦가을, 악극단 취성좌(翠星座, 1929년에 이 멤버들이 주축이 되어 조선연극사로 통합됨) 멤버들이 지방공연을 위해 황해도 배천에 왔을 때, 비가 내려 공연을 할 수 없어 모두 여관에서 할일 없이 죽치고 있게 되었다. 극단의 배경음악 연주자였던 바이올리니스트 전수린은 창가에 후두둑 떨어지는 비를 바라보면서, 이곳에 오기 전에 전속 극작가 왕평과 함께 들렀던 자기 고향인 개성의 만월대와 고려성지를 떠올리고 있었다.

500년 전에 번성하던 고려 왕도 개성의 영화 는 온데간데 없고, 무성한 잡초 속에 묻혀있는 옛 궁궐의 주춧돌과 흐트러진 성벽의 일부만 초라하게 남아 있는 것을 보고, 권력의 무상함과 나라 잃은 사람들의 아픔이 지금 일제 치하에 있는 우리 민족과 자기들의 서글픈 신세와 다르지 않음을 떠올리며 쓸쓸히 돌아왔던 기억들이, 창밖에 내리는 비속에서 어른거렸던 것이다.

그래서 바이올린을 들어 그 착잡했던 심정을 연주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소리를 들은 왕평이 이 선율을 악보화 하도록 하고 스스로 가사를 지어 붙인 것이 지금까지 우리 민족이 즐겨 부르고 있는 ‘황성옛터’[처음 제목은 황성의 적(荒城의 跡)]가 된 것이다.

당시 새 노래가 나오면, 신파연극 공연의 막간에서 부르는 막간가요로서거나, 아니면 활동사진이 상영되는 극장무대 아래서 반주 팀이 부르는 주제가로서 불리어져 대중에게 전달, 확산되었는데, ‘황성의 적‘은 막간에서 앳띤 미녀 가수 이애리수가 막간에 나와 불러 인기를 끈 막간 가요였다.

1932년 발매된 '황성옛터'의해 음반은 무려 5만장이 판매되면서 그 인기를 증명했다. '황성옛터'는 왕평이 작사하고 전수린이 작곡한 곡으로, 최초로 한국인이 작사 작곡한 대중가요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이씨는 1930년대 결혼과 함께 연예계를 떠나 가정주부로 생활하며 종적을 감췄다.

이씨는 개성 출신으로 10세 무렵부터 배우로 활동하며 막간 가수로도 무대에 올랐으며, 18세 때 '황성옛터를 부르며 '국민가수'로 떠올랐다. 그는 22세 때 연희전문학교(현재 연세대학교) 학생이었던 남편 배동필씨를 만나 결혼을 약속했지만, 배씨의 집안에서 결혼을 반대하는 바람에 가수 생활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이 씨는 자신의 존재를 철저히 감추고 2남7녀의 어머니로서만 살아왔다. 당시 남편의 집안에서 가수라는 사실을 발설하지 않는 조건으로 결혼을 승낙했기 때문이다.

극단 취성좌(뒤에 조선연극사)가 단성사에서 공연할 때, 이애리수 자신도 이 노래의 노랫말과 선율에 담긴 비통한 감정을 가누지 못하여 3절을 부르다가 흐느껴 울어버린 해프닝이 생겼다. 가수가 부르던 노래를 중단한 것은 큰 실수였지만, 그것이 오히려 관중들의 감동을 일으켜 객석에서는 오히려 폭풍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고 재청이 터져 나왔다. 이애리수는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노래를 불렀으나, 순조롭게 흐르던 선율이 어느덧 흐느끼면서 또 다시 노래반, 울음반이 되고 말았다.

가수도 관객들도 눈물을 걷잡지 못하였고, 떠나갈 듯한 박수 속에 앵콜이 요구되어 다음 막의 연극을 시작해야 한다는 사회자의 말은 묻히고, 일곱번이나 앵콜을 받아야 했다. 관중들은 열광하며 따라 불렀고, 언제나 노래의 3절에 이르러서면 가수와 관중 모두가 노래 반, 눈물 반이 되어버렸다.

공연이 있을 때마다 이러한 눈물의 합창이 나오게 되자, 종로서 임석 일본 경관이 무대 위로 올라가 공연을 중단시켰고 이 노래를 부르지 못하도록 했다. 이 노래의 작사자 왕평과 작곡가 전수린은 종로서에 끌려가 밤을 세워가며 조사 받고서야 풀려난 적이 있었고, 총독부는 한때 이 노래에 대해 금지곡 처분을 내리기도 했으며, 대구의 한 보통학교에서 음악시간에 이 노래를 가르친 교사는 파면을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황문평은 이 노래를 극장에서 먼저 부른 가수는 극단 동방예술단의 기생출신 가수 신일선이며, 그녀의 노래에 관중들이 흥분하여 극장을 눈물바다로 만들자 임석 경관이 노래를 금지시켰고, 이로 인해 왕평과 전수린이 종로서에 불려가 취조를 받았다고 했다. (신성원 '우리 대중가요' 현암사, 2008)

/ 2021.01.06 편집 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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