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개울, 겨울 들판을 거닐며, '종심(從心)의 나이' 허형만 (2021.01.03)

푸레택 2021. 1. 3. 22:29

 

 

■ 개울 / 허형만

동네 뒷산에서 흘러내려오는 개울을 집 안 마당 가로 흐르도록 울타리를 치신 할아버지 덕분에 할머니와 어머니는 웬만한 빨래는 집 안에서 하셨다. 물론 자꾸만 도망가려는 나를 붙잡아두고 홀딱 벗겨 목욕시키신 분도 이 개울이셨다

■ 겨울 들판을 거닐며 / 허형만 ​ ​

가까이 다가서기 전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 보이는
아무것도 피울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겨울 들판을 거닐며
매운 바람 끝자락도 맞을 만치 맞으면
오히려 더욱 따사로움을 알았다
​듬성듬성 아직은 덜 녹은 눈발이
땅의 품안으로 녹아들기를 꿈꾸며 뒤척이고
논두렁 밭두렁 사이사이
초록빛 싱싱한 키 작은 들풀 또한
고만고만 모여 앉아
저 만치 밀려오는 햇살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발 아래 질척거리며 달라붙는
흙의 무게가 삶의 무게만큼 힘겨웠지만
여기서만은 우리가 알고 있는
아픔이란 아픔은 모두 편히 쉬고 있음도 알았다
​겨울 들판을 거닐며
겨울 들판이나 사람이나
가까이 다가서지도 않으면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을 거라고
아무것도 키울 수 없을 거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ㅡ ‘잠시 비 그친 뒤’, 허형만 시집

■ 종심(從心)의 나이 / 허형만

참 멀리 왔다고
나 이제 말하지 않으리
나보다 더 멀리서 온 현자賢者도 있지만
앞으로 얼마나 더 갈지 모르겠다고
나 이제 말하지 않으리
어떤 이는 말을 타고 가고
어떤 이는 낙타를 타고 가나
그 어느 것도 내 길이 아니라서
하나도 부럽지 않았던 것을
이제 와 새삼 후회한들 아무 소용없느니
왔던 길 지워져 보이지 않고
가야할 길 가뭇하여 아슴하나
내 나이 일흔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마음먹은 대로 행동해도 어긋나지 않는다면
사랑하는 이여
나 이제 말할 수 있으리
그동안 지나왔던 수많은 길섶
해와 달, 낡은 발끝에 치일 때마다
내 몸이 내 것이 아니었노라고

ㅡ 허형만 시인의 시집 『가벼운 빗방울』서문

[시작노트]

종심(從心)이란 공자가 70세에 이르러 마음먹은 대로 행동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는 데서 유래한 말이다. 내 나이도 어느덧 마음을 좇는다는 이 종심에 이르렀으니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고 동시에 앞으로의 삶의 길도 내다봐야 할 나이임을 실감하면서 쓴 시이다.

그러나 되돌아보니 내가 지나왔던 길, 보이지 않음은 어인 일인가. 그것은 회한의 세월이었기 때문인가 싶기도 하고 역경의 시간들이었기 때문인가 싶기도 한데 나 스스로 더 놀라운 것은 앞으로 가야할 길 조차 가뭇하여 아슴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나는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히고 더욱 겸손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 만큼은 분명할 터.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은 나로 하여금 내가 나임을 잊고 성호를 그으며 하느님 앞에 무릎 꿇어야 함을 나는 잘 안다.

[감상과 해설]

시인은 자서에서 종심의 나이에 열다섯 번째 시집을 내며 무릎을 꿇고 모든 생명 앞에 더욱 겸손하겠다고 한다. 인생 100세 시대(百歲時代)를 살고 있는 요즘 고희(古稀)는 아직 청춘에 불과한대도 시인은 벌써 나이를 세어가며 지나온 삶을 반추하고 미래의 삶을 예견하고 있다. 일본 최고령 시인 시바타 도요는 98세에 ‘약해지지 마’라는 시집을 출간하여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는데도 말이다.

종심은 논어 위정(爲政)편에 나오는“일흔 살에는 마음 내키는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에서 차용한 것 같다. 시인은 고희를 넘어서 갖게 된 부끄러운 성찰과 고백을 더욱 절실하게 노래하며 세상을 응시하고 있다.

시인은 1973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하여 시력 40년 동안 15권의 시집을 상재할 정도로 누구보다도 많은 작품을 발표하고 연구 활동을 해 왔다. 또한 시인은 고향 순천 시립도서관에 책 1만3천여권을 기증하며 "독서의식을 높이고 문화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바탕이 되기를 바란다."는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ㅡ 김동기 (한서고 국어교사)

/ 2021.01.03 편집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