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인생] 걷기 영양 건강 산책

[역사산책] 농부에서 하루아침에 왕이 된 '강화도령', 철종 이야기 (2020.12.28)

푸레택 2020. 12. 28. 23:09

 

 

 

 

 

 

■ 농부에서 하루아침에 왕이 된 '강화도령', 철종 이야기

1
2019년 6월 22일 나의 '예릉 탐방기'
[역사산책] (1)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철종이 잠든 서삼릉-예릉을 찾아서

오늘은 일년 중 낮의 길이가 가장 길다는 하지(夏至)다. 요즈음 날씨가 참 좋다. 미세먼지도 없고 하늘도 청명하다. 오늘은 고양시 원당동에 위치한 서삼릉(西三陵)을 찾았다. 작년에 일산으로 이사 온 후 첫 왕릉 나들이다. 몇 년 전 고등학교 동창들과 함께 다녀온 적이 있어 길도 익숙하고 산책도 할 겸 3호선 윈흥역에서 내려 도보로 찾아갔다. (삼송역 5번 출구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갈 수도 있다)

원흥역 6번 출구로 나와서 터널쪽으로 걸어가면 '농협대학교 1km'라는 커다란 입간판이 보인다. 한참을 걸어가니 청정지역에 농협대와 농장이 나타난다. 숲길을 따라 조금 더 걸어가면 너른마당이 나온다. 카카오지도를 검색해 보니 2.7km 41분 거리로 나오는데 빠르게 걸어서 갔더니 버스 종점까지 30분 만에 도착했다.

너른마당 입구에는 고구려의 웅장한 기상을 느낄 수 있는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 imitation)가 우뚝 서 있다. 중국 길림성 지안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와 같은 크기의 돌을 구해 비문까지 똑같이 본떠 옮겨왔다고 하니 실로 놀랍다. 보경지에는 연꽃이 시원한 자태를 뽐내고 있고 연못 둘레에는 온갖 동물의 석상과 조각 예술품들이 즐비하다.

너른 마당에서 작은 언덕을 넘으니 목가적 풍경이 나타난다. 경주마를 훈련시키고 기수를 교육하는 원당종마목장이다. 하얀 나무울타리 너머 시원스런 초원에 듬성듬성 보이는 말들의 모습이 한 폭의 그림인 듯 참으로 평화롭다. '1.5km 30분 산책로'라는 안내 표지판을 따라 완만한 언덕을 오르니 6월 한달 주말 축제 기간이라 갖가지 체험 부스와 무료 승마 체험장이 열리고 있다. 포토존 너머로 또 하나의 드넓은 목장 초원이 펼쳐진다.

원당종마목장을 나와 오늘의 목적지인 서삼릉으로 들어선다. 서삼릉은 3기의 왕릉과 3기의 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 11대 중종의 왕비 장경왕후의 능은 희릉, 12대 인종과 인성왕후의 박씨의 능은 효릉, 25대 철종과 철인왕후 김씨의 능은 예릉, 16대 인조의 맏아들 소현세자의 원은 소경원, 추존 장조의 맏아들 의소세손의 원은 의령원, 22대 정조의 맏아들 문효세자의 원은 효창원이다. 이중 효릉과 소경원은 공개 제한으로 들어갈 수 없다.

먼저 종마목장 안에서도 보였던 희릉부터 둘러본다. 희릉은 11대 중종의 왕비인 장경왕후 윤씨의 능이다. 조선 왕릉의 주요 상설(象設)에 관한 설명을 읽어 보았다. 왕릉에는 속세와 성역의 경계인 금천교(禁川橋)가 있다. 이곳을 지나면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는 홍살문이 있다. 홍살문은 붉은 칠을 한 기둥 위에 살을 박아놓은 것이다. 홍살문을 지나서는 향로가 아닌 어로를 따라 걸어야 한다. 향로(香路)는 제향시 향과 축(祝)을 모신다 하여 붙여졌고 어로(御路)는 임금이 다니는 길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정자각은 정(丁)자 모양의 건물로 제향을 올리는 곳이고 비각은 능 주인의 업적을 기록한 신도비를 세워둔 곳이다.

희릉의 봉분이 너무 높고 깊숙이 있어서 잘 보이지 않는다. 희릉을 뒤로 하고 예릉으로 느긋한 발걸음을 옮겼다. 예릉은 조선 제25대 철종과 철인왕후 김씨의 능이다. 강화도령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철종 임금, 시골 농사꾼에서 임금이 된 철종 이야기는 영화로 드라마로 숱하게 소개되어 모르는 사람이 없을 듯하다. 그러나 강화도령이 임금이 된 흥미로운 사실만 기억할 뿐 정작 세도정치의 폐해에 관심 갖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어리거나 무식한 사람을 허수아비 왕으로 세워놓고 뒤에서 온갖 권력을 휘두르며 부(富)과 명예를 독차지하는 세력들은 조선의 순조, 헌종, 철종 시대 이후 사라진 것일까? 노론(老論)의 후예들이 친일파로 변신하여 여전히 기득권을 움켜쥔 채 개혁과 역사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닐까?

주말인데도 찾는 사람들이 없어 왕릉은 고요하고 호젓하기만 하다. 주위에 빽빽이 늘어선 소나무들만이 역사의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말없이 능을 지켜본다. 흘러가는 저 구름아, 너는 아는가? 슬픈 운명의 주인공들을. 자고가는 저 구름아, 너는 아는가? 역사에 이름 한 줄 남기지 못하고 잡초처럼 살다간 수많은 민초(民草)들을.

예릉 바로 옆쪽에 의령원과 효창원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의령원은 사도세자의 맏아들인 의소세손의 원인데, 의소세손은 왕세손으로 책봉되었으나 3세로 세상을 떠났다. 효창원은 정조의 맏아들인 문효세자 원이다. 문효세자는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5세로 세상을 떠났다. 소경원을 비롯하여 폐비 윤씨의 묘인 회묘, 소현세자의 두 아들 묘, 후궁들의 묘는 그 땅이 사유지란 이유로 공개를 제한하고 있었다.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와 더불어 인조의 아들인 소현세자를 비운(悲運)의 세자라고 한다. 왕이 되지 못한 그러나 여느 왕들보다 훌륭했던 슬픈 운명을 안고 태어난 비운의 세자, 소현세자의 원인 소경원을 못 본 것이 아쉽다.

최근 몇 년 동안 조선의 왕릉과 원, 묘를 많이 둘러보았다. 구리에 있는 동구릉과 고양에 있는 서오릉, 남양주에 있는 홍릉과 유릉, 사릉을 찾아가 보았다. 그리고 서울에 있는 선릉과 정릉, 경기도 화성에 있는 융릉과 건릉, 남양주에 위치한 세조의 능 광릉도 둘러보았다. 그런데 정작 가까이 있는 서울의 태릉과 강릉, 의릉은 아직 탐방을 못했다.

오늘은 서오릉을 찾아 조선왕릉을 유유자적 둘러보았다. 덤으로 원당종마목장에서 목가적 풍경을 보며 산책도 하고 연꽃 넘실대는 보경지(寶慶池)와 조각석상, 광대토대왕비도 보았다. 쾌청한 날씨에 왕릉의 호젓함이 더해져 몸도 마음도 절로 가볍다. 돌아올 때는 종점인 서삼릉·종마목장 입구 정류장에서 30분 간격으로 출발하는 041 A번 마을버스를 탔다. 마을버스는 매 시간 10분과 40분에 삼송역을 향해 출발한다.

/ 2019.06.22 김영택 씀 .

☆ 문화재청 서삼릉 홍보물에는 예릉(睿陵)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예릉은 조선 제25대 철종과 철인왕후 김씨의 능이다. 철종(1831~1863, 재위 1849~1863)은 전계대원군과 용성부대부인의 아들로, 1849년 헌종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순원숙황후(순조의 왕비)의 명으로 순조의 아들로 입적되어 왕위에 올랐다.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지방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이를 수습하기 위한 정책을 시행하였으나 안동 김씨의 세도로 인해 국정을 바로잡지 못하였다. 1863년 33세로 세상을 떠났다. 철인장황후(1837-1878)는 김문근의 딸로 1851년(철종 2)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1858년(철총 9) 원자를 낳았으나 일찍 죽는 비운을 겪었다.

 

youtu.be/ChtBeBNUCO4

youtu.be/vKHGF4c-Qho

blog.daum.net/mulpure/15854657

 

[역사산책] (1)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철종이 잠든 서삼릉-예릉을 찾아서 (2019.06.22)

■ 농부에서 하루아침에 왕이 된 강화도령 철종 이야기 2019년 6월 22일 나의 '예릉 탐방기' [역사산책] (1)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철종이 잠든 서삼릉-예릉을 찾아서 오늘은 일년 중 낮의..

blog.daum.net

2
1849년. 평화로운 강화도에 한 무리의 행렬이 나타났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농사를 짓던 한 청년은 그 행렬을 보고 자신의 작은 형과 함께 산 속으로 도망을 쳤다. 그의 할아버지와 큰 형은 역모에 연루되어 처형 당했고 그와 그의 작은 형은 강화도에 유배 중이었다. 그는 그의 큰 형과 할아버지처럼 잡혀가 처형당할 것이란 생각에 자신을 애타게 부르는 행렬을 피해 계속해서 도망쳤다. 하지만 얼마 못가 그의 형이 다리를 접질렀고, 결국 그는 형과 함께 붙잡히게 된다. 그는 가마에 실려 서울 창덕궁으로 끌려가게 된다.

그 청년 농부의 이름은 '이원범(李元範)'이다. 이원범은 끌려간 그곳에서 조선의 25대 왕 철종(哲宗)이 되었다. 철종(1831 ~ 1863) 조선의 25대 왕 철종은 ‘강화도령’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그가 즉위하기 전에는 강화도에 살면서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지어진 별명이다. 철종이 강화도에서 생활한 것은 5년 정도였고 그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철종이 즉위 당시 19살이었으니 인생의 1/4정도만 강화도 생활을 한 것이다.

이원범은 어떻게 강화도로 가게 되었을까? 이원범'의 아버지인 이광은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의 동생, 은언군(恩彦君)의 아들이다. 이원범의 할아버지인 은언군 이인은 1786년 역모 혐의를 받고 순조 때 사사되었다. 이광은 아버지의 역모 혐의로 모든 식구가 교동도로 유배를 떠나게 된다. 하지만 왕가에 직계혈통이 부족해지자 왕실에서는 이광을 다시 한성으로 부른다. 여기서 이광은 셋째인 이원범을 낳게 된다. 그렇게 한성에서 태어난 이원범은 왕가의 종친 신분으로 편안한 생활을 했다. 그런데 이원범이 14살이 되던 해인 1844년, 무인 출신인 민진용이 이원범의 큰 형인 이원경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역모를 꾸미게 된다. 이에 이원경은 처형당하고 이원범은 작은 형인 이경응과 강화도로 유배된다. 강화도로 유배된 이원범은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게 된다. 그러다가 무리에 의해 한성으로 끌려간 그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강화도에서 농사를 짓던 이원범은 어떻게 갑자기 왕이 된 것일까?. 철종의 선대왕인 헌종이 후사 없이 23세라는 젊은 나이에 갑작스럽게 승하하게 되자, 조선 왕가에서 정조의 직계자손 혈통이 끊어져 버리게 된다.
이에 왕가는 정통성을 가진 왕족을 찾기 위해 영조의 후손을 살피고 있었다. 그러던 중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정조의 동생인 은언군의 아들 이광의 자손을 찾아나서게 된 것이다. 이광의 큰 아들 이원경은 역모 모의에 연루되어 처형되었고, 작은 형 이경응은 몸이 좋지 않아 결국 셋째 아들인 이원범이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철종은 왕위에 오른 이후에도 사대부와 백성들로부터 '강화 도령', '꼭두각시', '허수아비 왕'으로 기억되곤 했는데 실제로는 서울에서 태어나 4세에 천자문을 배웠고, 통감과 소학도 읽었으니 글을 모르는 바보라는 말은 와전된 것이다. 5년 정도의 강화도 생활로 공부와 멀어졌고, 즉위한 19세에는 부족한 면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나 어릴 때 공부했던 것들을 바탕으로 즉위 3년 후부터는 친정을 시작했으며, 자신의 의견을 펼치기도 했다. 특히 자신이 농사를 지으며 직접 겪은 백성들을 고통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을 위한 구휼이나 여러 개혁 정책을 추진하려 했다. 하지만 당시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안동 김씨 세력에 의해 무산되고 만다.

철종은 안동 김씨의 세력에 맞서 개혁을 시도했지만 혼자만의 노력으로 삼정의 문란을 막을 수 없었다. 결국 개혁 대상자들에게 개혁을 맡긴 꼴이 되었고 백성들은 큰 고통을 받았다. 개혁대상자에게 개혁을 맡긴 철종. 역사는 반복되는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1862년 진주를 시작으로 ‘임술농민봉기’가 일어나고, 1860년에는 최제우가 '동학'을 설립하여 더욱더 혼란한 시절이 되었다. 철종은 이런 세도정치로 인한 무력감과 허탈감에 '술'과 '색(色)'에 빠지게 된다. 농사를 지으며 튼튼했던 그의 몸은 점점 망가지게 되어 1863년 33세의 나이로 승하하게 된다.

3
조선 말기는 사회적으로도 격변기였고 왕실 내부에서도 복잡한 양상이 전개되었던 때였다. 역사학자들은 이 시기를 ‘민란의 시대’라고 한다. 이 시기를 살았던 조선조 제25대 왕 철종(哲宗, 1831~63, 재위1849~63)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우리의 관심을 끈다. 비록 33세의 나이에 요절했지만 14년 동안이나 왕위를 누렸으니 비운의 왕이라 부를 수는 없겠다. 그러나 그를 비운의 왕이라 하는 이유를 다음 이야기를 통해서 알 수 있다. 1849년 헌종은 젊은 나이에 후사 없이 죽었다. 왕이 아직 23세의 나이였기에 비록 왕자는 없었지만 후사를 염려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는데, 왕이 갑작스레 죽자 세도를 부리던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세력은 허둥댔다. 젊은 대비인 김씨와 왕비인 조씨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그도 그럴 것이 죽은 왕의 6촌 안에 드는 왕족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먼 일가라고 할 수 있는 7촌 이상의 왕족은 몇 명 있었다. 후계의 왕은 원래 항렬로 따져 동생 또는 조카뻘로 왕통을 잇는 게 원칙이었다. 그런데도 안동 김씨들은 조씨들을 누르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계산을 한 뒤, 강화도에 살던 헌종의 7촌 아저씨뻘인 이원범을 왕위에 추대했다. 철종은 종묘에서 조카뻘 되는 헌종에게 절을 하는 꼴을 보이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를 통틀어 이렇게 법도에 어긋나게 왕통이 이어진 것은 이때가 세조 다음으로 두 번째였다. 안동 김씨 세력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왕가의 법도를 깡그리 무시했다. 봉건왕조의 처지에서 볼 때에 이런 처사는 조정의 기강이 극도로 문란했음을 뜻한다. 이때 철종의 나이가 19세였다.

철종의 증조부는 저 유명한 사도세자이다. 사도세자는 아들 다섯을 두고 죽었다. 그 다섯 아들 중 혜경궁 홍씨에게서 난 첫째 아들은 일찍 죽었고 둘째 아들인 정조가 왕위에 올랐다. 그 아래 세 아들은 모두 후궁에게서 태어났다. 정조가 세손으로 있을 당시, 사도세자의 죽음을 방조한 세력들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정조를 세손의 자리에서 몰아내려고 했다.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에 대한 복수의 칼을 들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이때 세손 반대세력이 새 왕자를 추대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이 일이 발각되어 막내아들 은전군 찬은 정조의 명에 의해 자결했고, 은언군 인과 은신군 진(흥선대원군의 할아버지)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은신군은 제주도에 유배 도중 그곳에서 병사했고, 은언군은 강화도로 유배지를 옮기게 되었다. 이때부터 은언군의 후손들은 강화도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은언군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큰아들 또한 음모에 걸려 죽었고, 둘째 아들 당(瑭)과 셋째 아들 광(㼅)이 살아남아 강화도에서 유배생활을 계속했다. 그런데 1812년 홍경래의 주도로 관서농민전쟁이 일어났을 때에 이들은 또 한번 역모에 휘말렸다. 곧 서울에 있는 박종일 · 이진채 일파가 당과 광을 추대하여 변란을 꾸민 것이다. 이때 변란세력들은 형제간에 왕위다툼이 벌어질 것이니 동생 광을 죽여 없애자는 공론을 꾸미기도 했다. 이 광이 바로 철종의 아버지이다. 이 변란이 진행될 때에 철종은 태어나지도 않았다. 이 일이 발각되어 두 형제는 죽음을 당할 뻔했으나 사촌뻘 되는 순조의 간곡한 배려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 뒤 이들 형제는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자유민이 되었다. 철종의 아버지인 광은 서울에 돌아와 경행방(慶幸坊)에서 살았다. 왕족으로 여러 번 역모에 걸리기도 하고 귀양살이도 했으니 재산이 남아 있지 않았고, 일정한 생업도 가지지 못했으니 생활이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가정에 또 한 차례의 불행이 몰아쳤다. 1844년(헌종10), 광의 큰아들, 곧 철종의 맏형인 명(明)을 추대하고 헌종을 몰아내려는 민진용 일파의 음모 사건이 발각된 것이다. 이때는 광이 죽은 지 3년이 되던 해였으며, 명의 나이 18세였고 철종의 나이 14세였다.

이때 명은 죽음을 당했고 경응(둘째 아들)과 원범(철종)은 또다시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고아인 이들 형제는 강화도에서 땔나무를 하며 푸성귀로 연명하며 생활했다. 때로는 강화도의 유력자이며 종친인 이시원(한말 명문장가인 이건창의 할아버지) 같은 인사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으나 생활이 말이 아니었다. 철종은 여느 초동들과 어울려 지게목발을 두들기며 나무를 했고, 공부를 변변히 못하고 자랐다. 그러나 자연 속에서 노동을 하며 자라 몸은 튼튼했다. 철종의 윗대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철종이 태어나 왕위에 오른 것이 얼마나 기구한 내력을 지니고 있었는지 알 것이다. 조정에서 많은 벼슬아치들이 강화도로 들이닥쳐 원범을 모셨다. 원범을 연에 태운 행렬이 이어지자 강화도 사람들은 자신들의 눈을 의심할 정도로 놀랐다고 한다. [출처] 다음백과

/ 2020.12.28 편집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