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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칼럼]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권오길 (2020.12.07)

푸레택 2020. 12. 7. 18:23



■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 권오길

조선의 시인 고산(孤山) 윤선도의 오우가(五友歌), 고등학교 때 배운 그 빼어난 글을 아직도 생생하게 외우고 있다. '내 버디 몃치나 하니 水石(수석)과 松竹(송죽)이라/東山(동산)에 달 오르니 긔 더옥 반갑고야/두어라 이 다삿 밧긔 또 더하야 머엇하리.' 이어 그 다섯을 차례대로 설명해 가는데, 그 중에서 대나무에 관한 부분을 보면, '나모도 아닌 거시 플도 아닌 거시/ 곳기난 뉘 시기며 속은 어이 뷔연난다/ 뎌러코 四時(사시)예 프르니 그를 됴하 하노라'라고 풀이하고 있다.

여기 대(竹)의 글에서 '나모도 아닌 것이 플도 아닌 거시'라는 구절이 눈길을 끈다. 과연 대는 풀인가 나무인가? 대를 '나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여러해살이(다년생)에다 줄기가 매우 크고 딱딱하며 키가 큰 것은 30m를 훌쩍 넘기기에 '대 나무'라 부른다. 그런가 하면 대는 외떡잎(단자엽)식물이고 부름켜(형성층)가 없어 부피 자람(비대생장)을 못하니 '풀'이라는 주장도 있다. 고산께서도 익히 그것을 알고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라고 읊으셨던 모양이다. 대는 단연코 생물학적으로 외떡잎에다 부름켜가 없기에 나무가 아닌 풀이다.

대(bamboo)는 꽃의 모양이나 특성이 벼꽃을 빼닮아 벼(화본)과 식물인데, 세계적으로 400여 품종이 있으며, 주로 동남아 등의 따뜻한 곳에서 잘 자란다. 아무튼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대는 크게 왕대(중부 이남에 나는 큰 대), 조릿대(전국의 산허리에 나며 아주 작음), 해장죽(중부 이남에 살고 부채 등을 만듦), 이대(남부에 자생하고 낚싯대, 담뱃대 감)의 네 무리로 나뉜다.

대나무의 어린 순을 죽순이라 한다. 우후죽순(雨後竹筍), '비 온 뒤에 여기저기서 무럭무럭 솟는 죽순'이란 뜻으로, 어떤 일이 한때에 많이 일어나는 것을 비유하여 쓰는 말이다. 어떤 죽순은 하루에 무려 80㎝ 이상 자란다고 하니 놈들 자라는 소리에 개(犬)가 놀랄 판이다!

대는 얼마간 살고는 꽃이 핀 다음에 죽으니 그것을 '개화병(開花病)'이라고 하는데, 종류에 따라서 60년, 100년 주기로 일어난다. 다른 나무에 비하면 대나무의 일생은 그리 길지 않은 편이다. 그러나 생명은 질겨서 일부가 남아 다시 대밭을 일군다. 중국 남부의 대나무는 꽃이 진 뒤 그 자리에 빨간 열매가 맺히니 그것을 죽미(竹米)라 하며, 봉황새가 먹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대나무를 재료로 쓰는 것이 수두룩하다. 대빗자루, 죽통, 대젓가락, 퉁수, 피리, 대금, 활, 죽부인, 대자, 주판, 대소쿠리, 대바구니, 대광주리, 대삿갓, 담배통 등, 모두 다 쓰기에는 버거울 정도다. 한마디로 무궁무진하다. 대통에서 소주를 거르고 죽염을 구워내고... 대나무는 사군자(四君子) 중 하나로, 아래로 푹 숙인 바소(발채) 모양의 잎사귀와 텅 빈 속은 겸손과 무욕에 비유돼 덕을 겸비한 선비의 상징이다. 또한 대는 평안(平安)과 무사(無事)의 의미를 가지고 있어, 편지 봉투나 편지지 등의 문구류에도 그림을 그려 넣었다. 정녕 대에는 우리 조상의 혼이 가득 배어있도다! ㅡ 권오길 강원대 명예교수, 생물학

[출처] 경향신문 (2009.01.08)

/ 2020.12.07 편집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