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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익어가는 가을을 걷다(2).. 겸재정선미술관 (2020.10.28)

푸레택 2020. 10. 29. 18:21














오늘은 서울식물원 옆에 위치한 '겸재정선미술관'을 찾았다.

♤ 겸재 정선(鄭敾) (1676년~1759년)

조선 산수화의 독자적 특징을 살린 진경화를 즐겨 그렸으며 심사정, 조영석과 함께 삼재(三齋)로 불렸다. 강한 농담의 대조 위에 청색을 주조로 하여 암벽의 면과 질감을 나타낸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대표작으로는 '입암도', '여산초당도', '여산폭포도', '노송영지' 등이 있다.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는 조선 후기에 유행한 우리나라 산천을 실제 경치 그대로 그린 산수화를 말한다. 흔히 진경(眞境) 또는 동국진경(東國眞景)이라고도 하며, 일본에서는 신조선산수화(新朝鮮山水怜)라고도 한다. 화단에서 하나의 조류를 형성하며 성행했을 뿐만 아니라 높은 회화성과 함께 한국적인 화풍을 뚜렷하게 창출했다. 이 진경산수화라는 양식을 창안한 선구자가 바로 겸재 정선이다.

진경산수화가 유행할 수 있었던 데에는 우리의 산천을 주자학적 자연관과 접목시키고자 했던 문인 사대부들의 자연 친화적 풍류 의식과 주자학의 조선화(朝鮮化)에 따른 문화적 고유함에 대한 인식, 자주의식의 팽배 등이 컸다. 즉 실사구시의 실학적 분위기 속에에서 그전까지 지속된 화본(畵本)에 의한 관념산수화의 틀에서 벗어나 직접 눈으로 보고 발로 밟은 우리의 산천을 그리고자 하는 욕구가 커진 것이다. 이러한 조류는 당시 집권층이었던 노론 문인 사대부들과 남인 실학파들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특히 금강산과 관동 지방, 서울 근교 일대의 경관이 가장 많이 다루어졌다.

정선은 한성부 북부 순화방 유란동에서 정시익(鄭時翊)과 밀양 박씨 사이의 2남 1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선대가 관직 생활을 하기는 했으나 뛰어난 정치가나 학자는 없었으며, 더구나 예술가는 찾아볼 수 없었다. 게다가 집안은 매우 가난해 글공부에 전념하기는 힘들었다. 정선이 선비 집안에서 자라면서 화가가 되었던 것은 이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강세황은 '겸재화첩'의 발문에서 그에 대해 "동국진경을 가장 잘 그렸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는 특히 금강산과 서울 근교를 많이 그렸고 그 외에도 인물산수, 고목(古木), 노송(老松) 등을 잘 그렸다.

정선은 열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늙은 어머니를 모셨다.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는데 김창집(金昌集)의 도움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김조순의 문집에는 "겸재는 우리 선조의 이웃에 살았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으며, 집안 살림이 어렵고 부모가 늙어 나의 고조부인 충헌공(김창집)에게 벼슬자리를 부탁했다. 도화서에 들어갈 것을 권하자 벼슬길에 올랐으며, 관은 현감에 이르렀다. 여든 살까지 장수를 누리면서 교우하던 사람들은 모두 당시 명사(名士)들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세자를 보위하는 위수를 비롯해 1729년 한성부 주부를 지냈으며, 1734년 청하 현감을 지냈다. 청하 현감 시절 '교남명승첩(嶠南名勝帖)'을 그렸는데 이 화첩에는 안동 등 영남의 명승고적 58곳이 담겨 있다. 이때 그린 작품 중에는 '금강전도(金剛全圖)'도 있다. '금강전도'는 전체적으로 원형 구도를 이루며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본 모습으로 그려졌는데, 관념 산수의 틀을 벗고 우리나라의 산천을 소재로 하여 독창적이고 개성적인 표현 기법으로 그렸다는 점에서 한국 산수화의 신기원(新紀元)을 이룬 걸작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그림들을 보면 그가 고을 수령으로서의 책무보다는 그림을 그리는 데 더욱 몰두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하양 현감을 거쳐 1740년경 훈련도감 낭청, 1740년부터 5년간 양천 현령을 지냈다. 이때 그는 시인 이병연(李秉淵)과 함께 양천과 한강의 명승고적을 담은 '경외명승첩(京外名勝帖)' 등을 제작했다. 정선이 진경산수를 그렸다면, 이병연은 진경시를 지었다. 두 사람은 10대부터 대문장가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아래에서 동문수학한 죽마고우였다. 두 친구는 함께 금강산을 여행하면서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렸다. 둘은 서로의 작품을 평하며 자극하고 격려했다. 금강산을 유람하면서 쓴 시와 그림을 함께 엮은 산수화첩은 당대에도 유명했다.

그 뒤 약 10년간의 활동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70대에 들어선 후에는 남성적인 필치가 두드러지는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대표작은 1751년 그린 '인왕제색도(仁旺霽色圖)'이다. '인왕제색도'는 여름 소나기가 지나간 뒤 비에 젖은 인왕산 바위를 그린 작품으로 생략과 함축 그리고 절제가 돋보이는 걸작으로, 적묵법(積墨法)을 이용한 것이다. 적묵법은 옅은 색의 먹으로 먼저 그리고 나서 완전히 마르고 난 다음 좀 더 짙은 먹으로 덧칠하는 방법이다. 널찍한 붓으로 여러 번 짙은 먹을 칠해 바위를 그려 무게감을 잘 드러내고 있다.

수많은 작품들 중 최고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 작품은 당시 병상에 있던 이병연의 쾌유를 기원하면서 그렸다고 한다. 이 때문에 그림 속 기와집은 이병연의 집으로 여겨진다. 이때부터 그의 그림에는 번잡함이 사라지고 담묵(淡墨)의 구사가 맑고 부드러워졌으며, 화면 구성은 광활해지고 중량감은 전보다 더 강해졌다.

'사공도시품첩' 당나라 시인 사공도가 쓴 '시품'을 소재로 정선이 그리고 이광사가 원문을 필사한 서화첩이다.

1754년에 궁중의 쌀과 장을 공급하는 사도시 첨정, 1755년에 첨지중추부사, 1756년에는 화가로서는 파격적인 가선대부 지중추부사라는 종2품직에 제수되기까지 했다. 화가로서 높은 벼슬을 얻자 주변에서는 따가운 눈총을 보냈다. 그러나 영조는 그를 매우 아꼈고, 한강을 오르내리며 강 주변의 승경(勝景)을 그리도록 배려하기도 했다. 그는 여든 살 무렵에도 “붓놀림이 신기에 가깝다.”라는 말을 들을 만큼 정력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정선은 조선 시대의 어느 화가보다 많은 작품을 남겼다. 뿐만 아니라 선비나 직업 화가를 막론하고 크게 영향을 주어 19세기 초까지 겸재파 화법이라 할 수 있는 한국 진경산수화의 흐름을 이어 가게 했다. 진경산수화풍을 이어받은 이들로는 강희언, 김윤겸, 최북, 김응환, 김홍도, 정수영, 김석신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두 아들 만교(萬僑)와 만수(萬遂)는 아버지를 잇지 못하고 손자인 황(榥)만이 할아버지의 화법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진경산수화는 19세기 초부터 급속하게 쇠락했다. 진경산수화의 쇠락에 대해 강세황은 이렇게 지적했다. "정선은 평생 익힌 능숙한 필법으로 마음먹은 바를 유려하게 그려 냈는데 바위의 형태와 봉우리를 막론하고 거친 열마(裂麻) 준법으로 일관해 난사(亂寫)하였다. 그래서 사진(寫眞)의 부족함이 드러난다. 심사정의 것은 정선보다 나은 편이나 역시 폭넓고 고랑(高朗)한 시각이 결핍되어 있다."

이후 산수화는 김홍도풍으로 바뀌는데 정선의 산수화가 서양의 인상파적 성향이 강했다면, 김홍도의 산수화는 정형산수로 치밀한 사생이 특징이다. 이러한 김홍도의 화풍은 겸재의 화풍을 압도하고 새로운 시대의 화풍이 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이후부터는 정선의 진경산수화나 김홍도의 풍속화도 쇠퇴하면서 청나라의 남종화풍이 본격적으로 유행하게 된다.

[출처] 네이버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