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명시감상] 비 오는 날 천양희, 함박꽃과 소 서은, 방을 얻다 나희덕 (2020.08.02)

푸레택 2020. 8. 2. 17:48






● 비오는 날 / 천양희  

잠실 롯데백화점 계단을 오르면서
문득 괴테를 생각한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생각한다
베르테르가 그토록 사랑한 롯데가
백화점이 되어 있다
그 백화점에서 바겐세일하는 실크옷 한 벌을 샀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친구의 승용차 소나타 lll를 타면서
문득 베토벤을 생각한다
베토벤의 '월광소나타' 3악장을 생각한다
그가 그토록 사랑한 소나타가
자동차가 되어 있다
그 자동차로 강변을 달렸다
비가 오고 있었다

무릎 세우고 그 위에 얼굴을 묻은 여자
고흐의 그림 '슬픔'을 생각한다
내가 그토록 사랑한 '슬픔'이
어느새 내 슬픔이 되어 있다
그 슬픔으로 하루를 견뎠다
비가 오고 있었다

● 함박꽃과 소 / 서은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
함박꽃이 활짝 피어 있었어요
옆에 할아버지가 어린 소를 데리고
밭을 갈고 있었는데
헉헉 힘들어하던 소
고삐를 느슨하게 풀자
목이 마른지 급히 꽃밭으로 뛰어가는 것이었어요
근데 있잖아요, 꽃은 놔두고
틈에 삐죽이 돋아있는 풀만 뜯어먹더라구요
함박꽃 하나 다치지 않게
커다란 멍에를 둘러맨 소가요
쑤욱 들어가더라구요

저물녘이었는데
내 안이 이상하게 출렁출렁거리며
환해지는 느낌이었어요.
천지는 함박꽃

● 방을 얻다 / 나희덕

담양이나 창평 어디쯤 방을 얻어
다람쥐처럼 드나들고 싶어서
고즈넉한 마을만 보면 들어가 기웃거렸다
지실마을 어느 집을 지나다
오래된 한옥 한 채와 새로 지은 별채 사이로
수더분한 꽃들이 피어 있는 마당을 보았다
나도 모르게 열린 대문 안으로 들어섰는데
아저씨는 숫돌에 낫을 갈고 있었고
아주머니는 밭에서 막 돌아온 듯 머릿수건이 촉촉했다
ㅡ 저어, 방을 한 칸 얻었으면 하는데요
일주일에 두어 번 와 있을 곳이 필요해서요
내가 조심스럽게 한옥 쪽을 가리키자
아주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ㅡ글씨, 아그들도 다 서울로 나가불고
우리는 별채서 지낸께로 안채가 비기는 해라우
그라제마는 우리 집안의 내력이 짓든 데라서
맴으로는 지금도 쓰고 있단 말이요
이 말을 듣는 순간 정갈한 마루와
마루 위에 앉아 계신 저녁 햇살이 눈에 들어왔다
세 놓으라는 말도 못하고 돌아섰지만
그 부부는 알고 있을까,
빈방을 마음으로는 늘 쓰고 있다는 말 속에
내가 이미 세들어 살기 시작했다는 걸

/ 2020.08.02 편집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