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꽃산책] 풀과 나무에게 말을 걸다

[봄꽃산책] 모정의 세월 섬국수나무, 튀긴 좁쌀 인가목조팝나무, 홍릉수목원 (2020.04.12)

푸레택 2020. 4. 14. 08:31

 

 

 

 

 

 

 

 

 

 

 

 

 

 

● 국수나무 (Lace Shrub , 小珍珠花)

 

분류 장미과

학명 Stephanandra incisa

 

숲속의 큰 나무 밑에 활처럼 휘어진 가느다란 줄기를 길게 늘어뜨리고 자라는 나무가 있다. 이와 비슷한 모습으로 자라는 나무가 여럿 있지만 그중에서도 눈에 잘 띄는 나무가 바로 국수나무다.

 

국수나무는 가지가 처음 자랄 때는 적갈색이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하얗게 변한다. 가느다란 줄기 뻗음이 얼핏 보아 국수 면발이 연상된다고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잘라서 세로로 찢어 보면 목질은 얼마 없고 대부분이 좀 푸석거리는 황갈색의 굵은 고갱이가 들어 있다.

 

우리 식물 이름 중에 국수가 붙은 나무가 여럿 있다. 족보가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나도국수나무, 산국수나무, 섬국수나무, 중산국수나무를 비롯하여 금강산에서 발견되어 북한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금강국수나무까지 있다. 나무 이름에 국수를 붙일 정도로 먹을거리 부족에 시달려온 옛사람들의 절박했던 삶의 흔적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국수를 먹기 시작한 것은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다고 한다. 기원전 6000~5000년경부터 이미 아시아 지방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일찌감치 들어왔을 것으로 보이지만, 기록으로는 《고려도경》이 처음이다. "고려의 음식은 십여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국수를 으뜸으로 삼았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특히 국수는 귀하여 큰 잔치가 있어야 먹을 수 있을 만큼 고급 음식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국수가 생일, 혼례 등 경사스러운 날의 특별 음식이 된 것은 긴 면발이 서로의 인연과 긴 수명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흔히 국수 먹는 날을 결혼식 날로 일컫는다.

 

국수는 잔칫날이나 되어야 먹을 수 있는 별미였고 가난한 백성들은 잘 먹을 수도 없는 음식이었지만, 국수나무는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쉽게 만날 수 있다. 국수나무는 봄이 짙어 갈 즈음 재빨리 잎부터 피워낸다. 자람 터가 숲속의 큰 나무 밑이라 어물거리다가는 그늘이 져 햇빛을 구경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큰 나무들의 잎으로 그늘이 생기기 전에 재빨리 광합성을 하여 한 해 농사를 서둘러 짓겠다는 계산이다. 자람의 과정을 보면 4월에 얼른 잎을 펼치고 5월에 꽃을 피우고 바로 열매를 맺는다. 그 이후로는 바람에 큰 나무들이 흔들릴 때마다 잠깐씩 들어오는 햇빛으로 조금씩 도움을 받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나무마다 들여다보면 살아가는 지혜가 사람 뺨치게 영리하고 정교하다.

 

국수나무는 땅에서 줄기가 여럿으로 갈라져 포기를 이루어 자란다. 잎은 어긋나기로 달리고 끝이 뾰족하며, 가장자리는 몇 군데 깊이 패어 있다. 가지 끝에 원뿔모양의 꽃차례를 만들고 황백색의 작은 꽃이 핀다. 열매는 타원형의 골돌(蓇葖)주이다.

 

● 조팝나무 (Bridalwreath Spiraea, 常山)

 

분류 장미과

학명 Spirea prunifolia var. simpliciflora

 

우리는 예부터 흰옷을 즐겨 입고 흰색을 좋아했다. 태양숭배 사상이 강한 우리 민족은 광명을 나타내는 뜻으로 백색을 신성시했다. 일상의 의복은 물론 제사 때도 흰옷을 입고 흰떡, 흰술, 흰밥을 쓸 정도였다. 심지어 우리 고유의 나무 꽃에는 유난히 흰꽃이 많다.

 

조팝나무는 늦은 봄 잎이 피기 조금 전이나 잎과 거의 같이, 산자락이나 들판에 사람 키 남짓한 작은 떨기나무가 떼로 자라면서 새하얀 꽃들이 수백 수천 개가 무리 지어 핀다. 흰빛이 너무 눈부셔 때늦은 눈이 온 줄 알고 깜짝 놀란다. 버들잎 모양의 잎이 꽃과 같이 피는 모습을 두고 일본 사람들은 눈버들(雪柳)이란 낭만적인 이름을 붙였다.

 

조선 후기의 고전소설 〈토끼전〉에는 별주부(자라)가 육지에 올라와 경치를 처음 둘러보는 장면이 실감나게 묘사되어 있다. "소상강 기러기는 가노라고 하직하고, 강남서 나오는 제비는 왔노라고 현신(現身)하고, 조팝나무에 비쭉새 울고, 함박꽃에 뒤웅벌이오"라고 했다. 멍청이 별주부가 토끼의 꼬임에 빠져 처음 육지로 올라왔을 때가 마침 봄이었나 보다. 지금도 조팝나무 꽃은 어디에서나 흔하게 피어 있으니, 별주부가 토끼를 꼬여내던 그 시절에는 더더욱 흔한 꽃이었을 것이다. 잘 보일 것 같지 않은 별주부의 작은 눈에도 육지에 올라오자마자 금세 눈에 띄었으니 말이다.

 

조팝나무는 좁쌀로 지은 조밥에서 유래되었다고 본다. 우리의 먹을거리는 쌀, 보리, 조, 콩, 기장의 오곡(五穀)으로 대표된다. 조는 땅이 척박하고 가뭄을 타기 쉬운 메마른 땅에 주로 심었으며, 오곡의 세 번째 자리를 차지할 만큼 중요한 곡식이었다. 조밥은 하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노랗지만, 그릇에 담아둔 조밥처럼 작은 꽃이 잔뜩 핀 모양을 비유한 것이다. 사실 하나하나를 떼어 놓고 보면 조팝나무보다 작은 꽃도 여럿 있으나 무리를 이루므로 좁쌀 밥알에 비유될 만큼 꽃이 작아 보인다.

 

《동국이상국집》에는 〈기장밥꽃(黍飯花)〉이란 시 한 수가 있다. “꽃은 잘고 둥그나 누른빛이 아니라네/기장밥과 견주어 봐도 서로 다르네/이 꽃 이름 굶주린 아이들에게 알려주지 마오/탐내어 숲속에서 밥 냄새 찾으리니”라는 시다. 시의 내용을 보아 기장밥꽃은 지금의 조팝나무 꽃으로 짐작된다.

 

조팝나무의 원래 쓰임새는 꽃을 감상하는 것보다 약용식물로 더 유명하다. 《동의보감》에는 조팝나무 뿌리를 상산(常山), 혹은 촉칠(蜀漆)이라 하여 “여러 가지 학질을 낫게 하고 가래침을 잘 밭게 하며 열이 오르내리는 것을 낫게 한다”라고 했다. 오늘날 널리 쓰이는 아스피린(Aspirin)에는 해열·진통효과가 있는 아세틸살리실산을 함유하고 있다. 이 성분은 조팝나무(속명 Spiraea) 종류에도 널리 포함하고 있으므로 'spir'를 어간으로 따오고, 접두어로 아세틸살리실산의 'a'와 당시 바이엘 사의 제품명 끝에 공통적으로 쓰던 'in'을 접미어로 붙여서 만든 말이다.

 

조팝나무 무리는 진한 분홍빛 꽃이 꼬리처럼 모여 달리는 꼬리조팝나무를 비롯하여 작은 쟁반에 흰쌀밥을 소복이 담아 놓은 것 같은 산조팝나무와 당조팝나무, 공조팝나무 등 수많은 종류가 있다. 조팝나무는 아름다운 꽃으로 뒤덮어 봄날의 우리 산천을 한층 풍성하게 만든다.

 

[출처] 박상진 교수의 《우리나무의 세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