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인생] 걷기 영양 건강 산책

[골목걷기] (5) 성북동 역사 문화 탐방 골목길 산책 : 북정마을, 비둘기공원, 심우장, 간송미술관 (2019.05.02)

푸레택 2019. 5. 2. 22:53

 

 

 

 

 

 

 

 

 

 

 

 

 

 

 

 

 

 

 

 

 

 

 

 

 

 

 

 

 

 

 

 

 

 

 

 

 

 

 

 

■ 성북동 역사 문화 탐방 골목길 산책

* 2019.05.02(목) 10~15시

* 천왕님, 대장님, 성춘샘, 호헌샘, 택 5人

* 탐방 일정

1 한성대입구역(4호선) 6번 출구 am 10:00

2 혜화문 / 한중 평화의 소녀상 ☆

3 마을버스 2번

4 길상사 ☆

5 천주교성북동성당 ☆

6 선잠단지(공사중)

7 성북선잠박물관 ☆

8 최순우 옛집(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 1호) ☆

9 간송미술관(전형필) ☆

10 마을버스 3번

11 북정마을 / 비둘기공원(김광섭) ☆

12 심우장(만해 한용운) ☆

13 성북누룽지백숙 수제비(점심) pm 1:00

14 이태준 수연산방 ☆

15 서울성곽(한양도성)

16 서울과학고 / 보성(普成)옛터 (나의 母校)

17 장면 가옥 ☆

18 혜화동주민센터

19 혜화역(4호선) pm 3:30

20 집으로 Go home~!

 

● 성북동(城北洞) 골짜기의 추억(追憶)

 

중학생 시절, 성북동(城北洞) 골짜기는 우리들의 놀이터이자 뒷동산이고 뒷동네였다. 쌍다리란 이름이 말해주듯 그땐 하천에 물이 콸콸 흘렀고 다리가 놓여 있었다. 한여름 더위를 피해 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면 울창한 숲 커다란 돌틈 사이로 맑은 계곡물이 흐르는 곳에 다다른다. 그곳은 그야말로 무릉도원(武陵桃源)이었다. 지금 다시 찾아가면 그곳은 흔적도 없다.

 

짙푸른 담쟁이덩굴 기어오르던 서울 성곽 아래쪽 산꼭대기 북정마을 근처 산동네에 죽마고우(竹馬故友)인 친구의 집이 있었다. 친구 집에 놀러가면 할머니처럼 늙으신 친구 어머니가 가난한 살림에도 밥을 해 주시곤 했는데 어찌 그리도 밥이 맛있던지.. 그 시절 그 친구는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그때 그곳 무릉도원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내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때묻지 않은 그 때 그곳이, 그때 그 시절이 마냥 그립다.

 

● 간송미술관과 천년바위의 추억(追憶)

 

심우장을 둘러본 후 서서히 비탈길을 내려와서 조금 더 걸어가면 소설가 이태준이 거주했던 수연산방이 나타난다. 이곳에서 잠깐 쉬었다가 간송미술관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어린 시절 성북초등학교 옆 숲속에서 친구들과 도토리도 줍고 뛰놀기도 했었는데 그 아름드리 나무 빽빽하고 석탑이 서 있던 그곳이 간송미술관인 줄은 전혀 알지 못했다. 간송미술관을 설립하신 분은 그 유명하신 문화재 수집가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 선생이다. 그분은 나의 모교 보성중, 보성고의 이사장을 역임하셨다.

 

고등학교 시절 국어 선생님은 간송미술관에서 훈민정음(訓民正音) 원본(해례본)을 보았다고 자랑하셨다. 몇 년 전엔 고교 동문들과 함께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린 '간송 특별전'을 관람했다. 올해는 지난 1월부터 3월 말까지 '삼일운동 100주년 간송특별전 대한코콜랙숀'을 개최했다. 올해는 3.1 독립운동 1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이다. 보성고의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3.1 독립선언서'를 인쇄했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간송미술관을 뒤로 하고 유년 시절 뛰놀던 혜화동과 명륜동 그리고 성북동에 접해 있는 서울 성곽길을 걸어 보았다. 혜화동 1번지 보성중학교와 보성고등학교는 청소년 시절의 추억이 묻어있는 곳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추억이 깃든, 담쟁이덩굴 기어오르던 빠알간 벽돌 건물 보성고등학교(普成高等學校)는 이제 그곳에 없다. 서울과학고가 우뚝 서 있을 뿐이다.

 

중학교 1학년 시절 점심 시간이면 친구들과 함께 교실 바로 앞에 있는 커다란 '천년바위'(千載岩)에 올라가서 놀곤 했는데 그 바위에는 소나무 몇 그루가 자리잡고 있었고 알 수 없는 한문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그 글씨는 今古一般(금고일반,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이며 당시 노론의 영수였던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개인적으로는 좋아하지 않지만 당시 정계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 성리학자)이 쓴 글씨라고 한다.

 

수 년 전 서울과학고에서 과학 실험 연수를 받을 때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천년바위'를 바라보며 철없던 중학교 시절 추억을 떠올렸다. 옛 보성고 자리인 올립픽기념 국민생활관 근처엔 '송시열 집터'라는 안내표지판이 있다. 또한 그 옆에는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선생이 전국 불교인과 학생들의 3.1 독립운동 계획을 논의한 기념터 안내판도 보인다.

 

우리는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참 많은 것들을 너무 모르고 살아간다. 자랑스런 역사든 부끄러운 역사든 우선 먼저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녹음 짙어가는 5월, 역사와 문화 향기 가득한 성북동 골목길을 거닐며 앞서간 선인들의 발자취를 더듬고 또한 나의 어린 시절 추억을 되새겨본 오늘 하루는 더없이 뜻깊고 멋진 날이었다.

 

● 磨杵絶葦(마저절위)

"쇠공이를 갈고 갈아 바늘을 만들고, 대나무책의 가죽끈이 닳고 닳아 끊어지도록 학업에 정진한다."

* 만해 한용운 선생의 심우장에 있는 글귀입니다. 위의 사진에서 보입니다.

 

● 님의 침묵(沈默) / 한용운(韓龍雲)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黃金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盟誓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微風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追憶은 나의 운명의 指針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 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 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이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源泉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리에 들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 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沈默을 휩싸고 돕니다.

 

● 성북동 비둘기 / 김광섭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廣場)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祝福)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직한 마당은 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採石場) 포성(砲聲)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 앉아

아침 구공탄(九孔炭)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 1번지 채석장에 도로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溫氣)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聖者)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서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平和)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 저녁에 / 김광섭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 심우장(尋牛莊) / 한용운

 

잃은 소 없건마는

찾을 손 우습도다

만일 잃을 시 분명타 하면

찾은들 지닐소냐

차라리 찾지 말면

또 잃지나 않으리라

 

● 독립운동가 김동삼(金東三)

 

독립기념관에 옥중 유언인 다음 문구를 적은 어록비가 세워져 있다.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하느냐.

내 죽거던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

 

고향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278번지 생가 자리에는 그의 생가 터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김동삼은 유교적 학식과 함께 '만주의 호랑이', '남만의 맹호’로 불릴 정도로 용맹한 기질을 겸비하여 김좌진, 오동진 등과 3대 맹장으로 불리기도 했다.

 

1931년 하얼빈에서 이원일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37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시신은 한용운이 수습하여 장례를 치렀다.

 

●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의 일화

만해 한용운, 그는 3·1 만세운동 선언자 33명 가운데서 변절하지 않은 지사로 알려져 있다. 만해에 관한 일화는 참으로 많은데 그를 회유하려고 조선총독부가 성북동 일대 나라숲 20만 평을 넘겨주겠다는 것을 한마디로 거절하고, 총독부의 지시를 받은 청년이 돈보따리를 들고 오자 뺨을 때려 쫓아 보냈다고 한다.

 

또한 최린과 3·1운동을 주도했던 그는 감옥에서 일부 민족대표들이 사형당할 것을 두려워하자 "목숨이 그토록 아까우냐?"라며 똥통을 뒤엎기도 했고 그토록 가까웠던 최린, 최남선, 이광수가 변절하자 얼굴조차 보지 않았다. 벽초 홍명희는 "만해 한 사람 아는 것이 다른 사람 만 명을 아는 것보다 낫다"고 했으며, 만공선사는 "이 나라에 사람이 하나 반밖에 없는데 그 하나가 만해"라고 했다.

 

만해 한용운이 1933년부터 1944년까지 살았던 집 심우장(尋牛莊)이 서울 성북동에 있다. 심우장은 서울기념물 7호로 지정되었는데 심우장이란 이름은 선종(禪宗)의 '깨달음'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열 가지 수행 단계 가운데 하나인 심우(尋牛)에서 유래한 것이다. 보통 집들은 남향으로 짓는데 이 심우장은 북향으로 지었다. 남향으로 터를 잡으면 조선총독부와 마주 보게 되므로 이를 마다하고 반대편 산비탈의 북향터를 선택했기 때문이지요. 그런 만해가 해방을 한 해 앞두고 세상을 뜬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 2019.05.02 편집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