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인생] 걷기 영양 건강 산책

[함께걷기] 성북동 골목길 산책.. 최순우 옛집, 길상사, 심우정, 수연산방, 간송미술관, 선잠단지, 서울성곽길 그리고 보성고(普成高) 옛터

푸레택 2019. 4. 24. 11:32

 

 

 

 

 

 

 

 

 

 

 

 

 

 

 

 

 

 

 

 

● 성북동(城北洞) 골짜기의 추억(追憶)

 

중학생 시절, 성북동(城北洞) 골짜기는 우리들의 놀이터이자 뒷동산이고 뒷동네였다. 쌍다리란 이름이 말해주듯 그땐 하천에 물이 콸콸 흘렀고 다리가 놓여 있었다. 한여름 더위를 피해 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면 울창한 숲 커다란 돌틈 사이로 맑은 계곡물이 흐르는 곳에 다다른다. 그곳은 그야말로 무릉도원(武陵桃源)이었다. 지금 다시 찾아가면 그곳은 흔적도 없다. 짙푸른 담쟁이덩굴 기어오르던 서울 성곽 아래쪽 산꼭대기 산동네에 친구의 집이 있었다. 친구 집에 놀러가면 할머니처럼 늙으신 친구 어머니가 가난한 살림에도 밥을 해 주시곤 했는데 어찌 그리도 밥이 맛있던지.. 그 시절 그 친구는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그때 그곳 무릉도원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내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때묻지 않은 그 때 그곳이, 그때 그 시절이 마냥 그립다.

 

● 성북동(城北洞) 골목길을 거닐며

 

또다시 신록의 계절 5월이 돌아왔다. 오늘은 역사와 문화의 향기 가득한 성북동 골목길을 걷기 위해 길을 나섰다. 4호선 한성대입구역에서 내려 5번 출구로 나와서 먼저 혜화문(惠化門)*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옛 성곽 아래쪽 길을 걸으면 경신고등학교 뒷담길이 나온다. 그곳에서 조금 아래로 내려가면 최순우 옛집이 나타난다. 길을 건너면 선잠단지(先蠶壇址)*가 보인다. 성북초등학교를 왼쪽으로 끼고 걸어 올라가면 아담한 천주교 성북동 성당이 나그네를 맞이해 준다. 계속 길을 따라 걸으니 그 유명한 길상사(吉祥寺)*가 보인다. 오색찬란한 연등이 온 절을 뒤덮고 있다.

 

백석(白石)과 김영한(金英韓)의 사랑 이야기가 생각나는 아름다운 길상사를 뒤로 하고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선생이 거처하셨던 심우장(尋牛莊)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기 싫어 집을 북향으로 지었다고 한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고교 시절 암송하던 <님의 침묵>을 중얼거려 보며 선인의 발자취를 둘러보았다.

 

심우장을 둘러본 후 서서히 비탈길을 내려오면 창립 50주년이 된 덕수교회가 보인다. 조금 더 걸어가면 소설가 이태준이 거주했던 수연산방이 나타난다. 이곳에서 잠깐 쉬었다가 간송미술관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어린 시절 성북초등학교 옆 숲속에서 친구들과 도토리도 줍고 뛰놀기도 했었는데 그 아름드리 나무 빽빽하고 석탑이 서 있던 그곳이 간송미술관인 줄은 전혀 알지 못했다. 간송미술관을 설립하신 분은 그 유명하신 문화재 수집가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 선생이다. 그분은 나의 모교 보성중, 보성고의 이사장을 역임하셨다.

 

고등학교 시절 국어 선생님은 간송미술관에서 훈민정음(訓民正音)* 원본(해례본)을 보았다고 자랑하셨다. 몇 년 전엔 고교 동문들과 함께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린 '간송 특별전'을 관람했다. 올해는 지난 1월부터 3월 말까지 '삼일운동 100주년 간송특별전 대한코콜랙숀'을 개최했다. 올해는 3.1 독립운동 1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이다. 보성고의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3.1 독립선언서'를 인쇄했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간송미술관을 뒤로 하고 유년 시절 뛰놀던 혜화동과 명륜동 그리고 성북동에 접해 있는 서울 성곽길을 걸어 보았다. 혜화동 1번지 보성중학교와 보성고등학교는 청소년 시절의 추억이 묻어있는 곳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추억이 깃든, 담쟁이덩굴 기어오르던 빠알간 벽돌 건물 보성고등학교(普成高等學校)는 이제 그곳에 없다. 서울과학고가 우뚝 서 있을 뿐이다.

 

중학교 1학년 시절 점심 시간이면 친구들과 함께 교실 바로 앞에 있는 커다란 '천년바위'(千載岩)에 올라가서 놀곤 했는데 그 바위에는 소나무 몇 그루가 자리잡고 있었고 알 수 없는 한문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그 글씨는 今古一般(금고일반,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이며 당시 노론의 영수였던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개인적으로는 좋아하지 않지만당시 정계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 성리학자)이 쓴 글씨라고 한다.

 

수 년 전 서울과학고에서 과학 실험 연수를 받을 때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천년바위'를 바라보며 철없던 중학교 시절 추억을 떠올렸다. 옛 보성고 자리인 올립픽기념 국민생활관 근처엔 '송시열 집터'라는 안내표지판이 있다. 또한 그 옆에는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선생이 전국 불교인과 학생들의 3.1 독립운동 계획을 논의한 기념터 안내판도 보인다.

 

우리는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참 많은 것들을 너무 모르고 살아간다. 자랑스런 역사든 부끄러운 역사든 우선 먼저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녹음 짙어가는 5월, 역사와 문화 향기 가득한 성북동 골목길을 거닐며 앞서간 선인들의 발자취를 더듬고 또한 나의 어린 시절 추억을 되새겨본 오늘 하루는 더없이 뜻깊고 멋진 날이었다. / 김영택 (2019.04.01)

 

* 몇 년 전 성북동 길상사와 심우장을 둘러보면서 찍은 사진을 블로그에 올렸다. 이 글은 그 때 사진과 함께 써서 올린 글을 다시 다듬고 내용을 더 추가 혼합하여 새롭게 작성한 것이다.

 

● 종례 시간 / 김영택 [졸작拙作]

 

까만 교복에 까만 모자를 쓰던

고등학교 시절, 종례시간이면

칠면조 담임 선생님은 우리에게 합창을 시켰다

 

어느 가을날 햇병아리 교생 선생님 종례시간

우리들은 때마침 음악 시간에 배운

'푸니쿨라 푸니쿨라'를 끝없이 불러댔다

삼중창 푸니쿨라가 시간을 멈춘 채

창밖 은행나무 잎사귀를 흔들어댔다

 

내 푸르던 초임 시절 종례시간

하얀 교복 입은 천사들이 합창을 한다

창밖 봉긋한 목련꽃 교실 안 기웃거리고

살구꽃잎 노래소리 타고 머얼리 흩어진다

 

목련꽃 살구꽃 하얗게 부서지는 날

내 망막엔 천사들 노래소리 알알이 맺히고

은행나무 잎새 카로틴 물들어 떨어지는 날

내 가슴엔 까만 교복 입은 까까머리들

가세 가세 저기 저곳에 푸니쿨라 노랫소리

쿵쿵거리며 아련히 들려온다

 

* 칠면조: 양복을 매일 갈아 입으시는 멋쟁이 담임 선생님 별명(普成高 1학년 5반)

 

* 홍순태(洪淳泰) 담임 선생님: 서울 상대를 나오셨으며 상업과목을 담당하셨다. 사진작가로서 당시 國展 사진 분야에 특선을 하셨고 후에 신구전문대 교수로 가셨다.

 

* 교생 선생님: 9월 어느 날 남학생과 남자 선생님들만 있는 우리 普成高에 여자 교생선생님이 오셨다. 그분이 우리 학급을 담당하셨다.

 

* 푸니쿨리-푸니쿨라: 이탈리아의 덴차(Denza, L.)가 1880년에 작곡한 나폴리 민요. 베수비오 산의 등산 철도를 완공한 것을 기념하여 만든 것이라고 한다.

 

* 박일환 음악선생님: 이탈리아 테너 가수 질리(Beniamino Gigli/1890~1957)를 좋아하셔서 스스로를 '질리', '박질리'라고 하셨다. 음악 시간이면 우리들 성화에 못이기는 척 이태리 민요 '오 솔레미오'(O sole mio,나의 태양)를 자주 불러주셨고, 우리들에게 푸니쿨리 푸니쿨라를 가르쳐 주셨다.

 

● 푸니쿨리 푸니쿨라 (Funiculi Funicula)

 

무서운 불 뿜는 곳 저기 저 산에

올라 가자 올라 가자

그곳은 지옥 속이 솟아있는 곳

무서워라 무서워라

산으로 올라가는 수레 타고

모두 가네 모두 가네

 

가세 가세 저기 저곳에

가세 가세 저기 저곳에

푸니쿨리 푸니쿨라 푸니쿨리 푸니쿨라

모두 타는 차 푸니쿨리 푸니쿨라

 

가세 가세 저기 저곳에

가세 가세 저기 저곳에

푸니쿨리 푸니쿨라 푸니쿨리 푸니쿨라

모두 타는 차 푸니쿨리 푸니쿨라

 

* 초임 학교: 서울 동작구 상도동 상도여중(상현중)

 

● 혜화문(惠化門)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4소문(小門) 중의 하나로 동쪽의 소문이다. 숙정문을 대신하여 한양의 북쪽 관문 역할을 하였다. 동소문(東小門)이라는 속칭이 있는데, 이는 조선 초기부터 불린 이름이다.혜화문은 한양도성의 축조와 함께 1396년에 건립되었다. 1592년 문루가 불타 1744년에 재건하였으나, 일제 강점기에 파괴되었고 1994년 복원되었다.일반적으로 홍예 안쪽 천장에는 용이 그려져 있으나 혜화문에는 봉황이 그려져 있다. 문 주변에 새가 많아 용 대신 새들의 왕인 봉황을 이용하여 새들을 쫓고 악한 기운을 막으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 선잠단지(先蠶壇址)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에 있는 고려 시대의 제단. 고려 성종 2년(983)에 처음 쌓았고, 단의 앞쪽에 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키우게 하였다. 매년 3월에 제사를 지내다가, 1908년에 신위를 사직단으로 옮겼다.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사적 정식 명칭은 ‘서울 선잠단지’이다.

 

● 길상사(吉祥寺)

본래는 '대원각'이라는 이름의 고급 요정이었으나 요정의 주인이었던 고 김영한(1916~1999, 법명 길상화)이 법정 스님에게 자신이 소유한 요정 부지를 시주하여 사찰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김영한(金英韓)은 일제 시대의 시인 백석(白石)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 등장하는 나타샤로 알려져 있으며, 백석은 연인이었던 그녀에게 자야(子夜)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처음 1985년에 김영한으로부터 자신의 재산을 희사해 절을 짓게 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법정은 이를 간곡히 사양하였으나, 김영한은 10년 가까이 법정을 찾아와 끈질기게 부탁했고 이에 법정 또한 이를 받아들여, 1995년 6월 13일 대한불교조계종 송광사 말사인 '대법사'로 등록하여 처음 사찰이 되었고, 초대 주지로 현문이 취임하였다. 1997년에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로 이름을 바꾸어 재등록되었고 같은 해 2월 14일에 초대 주지로 청학이 취임하였다.

 

김영한은 평생 백석의 생일인 7월 1일에는 식사를 하지 않았고, 길상사에 기부된 김영한의 대원각 재산은 시가 천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그 많은 재산이 아깝지 않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김영한은 '1000억은 그 사람의 시 한 줄만 못하다'고 대답했다고 할 정도로 백석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1999년 11월 14일에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의 유해를 눈이 오는 날 길상사 경내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길상사 경내의 길상헌 뒤쪽 언덕에는 김영한의 공덕비가 세워졌다.

 

●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선생의 일화

만해 한용운, 그는 3·1 만세운동 선언자 33명 가운데서 변절하지 않은 지사로 알려져 있다. 만해에 관한 일화는 참으로 많은데 그를 회유하려고 조선총독부가 성북동 일대 나라숲 20만 평을 넘겨주겠다는 것을 한마디로 거절하고, 총독부의 지시를 받은 청년이 돈보따리를 들고 오자 뺨을 때려 쫓아 보냈다고 한다.

 

또한 최린과 3·1운동을 주도했던 그는 감옥에서 일부 민족대표들이 사형당할 것을 두려워하자 "목숨이 그토록 아까우냐?"라며 똥통을 뒤엎기도 했고 그토록 가까웠던 최린, 최남선, 이광수가 변절하자 얼굴조차 보지 않았다. 벽초 홍명희는 "만해 한 사람 아는 것이 다른 사람 만 명을 아는 것보다 낫다"고 했으며, 만공선사는 "이 나라에 사람이 하나 반밖에 없는데 그 하나가 만해"라고 했다.

 

만해 한용운이 1933년부터 1944년까지 살았던 집 심우장(尋牛莊)이 서울 성북동에 있다. 심우장은 서울기념물 7호로 지정되었는데 심우장이란 이름은 선종(禪宗)의 '깨달음'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열 가지 수행 단계 가운데 하나인 심우(尋牛)에서 유래한 것이다. 보통 집들은 남향으로 짓는데 이 심우장은 북향으로 지었다. 남향으로 터를 잡으면 조선총독부와 마주 보게 되므로 이를 마다하고 반대편 산비탈의 북향터를 선택했기 때문이지요. 그런 만해가 해방을 한 해 앞두고 세상을 뜬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 선생 (1906~1962)

휘문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와세다대학 법학과를 졸업했다. 일제강점기 때 문화재가 일본으로 반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고서화와 골동품 등을 수집했다. 1934년 성북동에 북단장(北壇莊)을 개설하여 본격적으로 골동품과 문화재를 수집하는 한편, 1938년 한국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보화각(葆華閣)을 북단장 내에 개설하여 서화뿐만 아니라 석탑·석불·불도 등의 문화재를 수집·보존하는 데 힘썼다.

 

그의 소장품은 대부분 국보 및 보물급의 문화재로 김정희·신윤복·김홍도·장승업 등의 회화 작품과 서예 및 자기류·불상·석불·서적에 이르기까지 한국미술사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1940년대에는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인수하여 육영사업에 힘썼고, 8·15해방 후 문화재보존위원으로 고적 보존에 주력했다. 1960년 고고미술동인회를 결성하고 동인지 <고고미술 考古美術> 발간에 참여했다. 1962년 대한민국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1966년 보화각은 간송미술관으로 개칭되었다.

 

● 훈민정음(訓民正音) 해례본(解例本)

세종대왕이 작성한 《훈민정음》의 원본이다. 세종이 창제한 글자인 ‘훈민정음’의 제자원리와 운용법 등을 설명한 한문 해설서다. 해례(解例)가 붙어 있어 ‘훈민정음 해례본’ 혹은 ‘훈민정음 원본’이라 한다. 해례는 보기를 들어 내용을 풀이한다는 뜻이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었으며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훈민정음은 책자 이름과 세종이 창제한 문자를 뜻하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훈민정음은 1443년 음력 12월에 창제되어 1446년 음력 9월에 반포되었다. 훈민정음(訓民正音)이란 ‘백성을 위한 바른 소리’라는 뜻이다. 훈민정음의 글자는 총 28자로 현재는 4글자가 소멸하여 24자가 한글로 쓰이고 있다.

 

●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白石)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 응앙 울을 것이다.

 

* 마가리: 오막살이

 

● 고향(故鄕) / 백석(白石)

 

나는 북관(北關)에 혼자 앓어 누워서

어늬 아츰 의원(醫員)을 뵈이었다

의원(醫員)은 여래(如來) 같은 상을 하고 관공(關公)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녯적 어늬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드니

문득 물어 고향(故鄕)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平安道) 정주(定州)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씨(氏) 고향(故鄕)이란다

그러면 아무개씰(氏) 아느냐 한즉

막역지간(莫逆之間)*이라며 수염을 쓴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醫員)은 또다시 넌즈시 웃고

말없이 팔을 잡어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故鄕)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 막역지간(莫逆之間): 거스름이 없는 사이라는 뜻으로, 허물이 없이 매우 가까운 친구 사이를 이르는 말

 

● 님의 침묵(沈默) / 한용운(韓龍雲)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黃金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盟誓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微風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追憶은 나의 운명의 指針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 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 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이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源泉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리에 들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 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沈默을 휩싸고 돕니다.

 

● 성북동 비둘기 / 김광섭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직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 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 1번지 채석장에 도로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서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 보성사(普成社)와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

 

보성사는 1906년 대한제국 말기 고종의 측근이었던 이용익이 러시아어학교 자리에 보성중학교를 설립하면서 학교 교재 출판을 위해 학교 구내에 설치한 인쇄소였다. 그러나 재정난으로 인하여 1910년 천도교로 경영권이 넘어가게 되면서 최린이 보성고보의 교장을, 이종일이 보성사 사장을 맡았다. 그 후 중앙교당의 인쇄소인 창신사와 병합하여 그 명칭을 그대로 보성사라 하였다. 보성사는 30평 정도의 2층 기와 벽돌집으로 한국 최초의 인쇄소였다.

 

보성사는 최남선이 설립한 광문회의 신문관과 더불어 당시 인쇄계를 주도하였다. 보성사는 교회 서적 및 학교 교과서의 인쇄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한국 출판 문화 향항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보성사는 8면 활판기 등을 독일에서 수입하고 석판 인쇄시설까지 갖춰 당시 한국인 인쇄소로서는 시설이 가장 좋았다.

 

3.1운동을 위한 준비가 한창이던 1919년 2월, 최남선이 기초한 독립선언서가 신문관에서 조판된 뒤 보성사로 넘겨졌다. 같은 달 27일, 보성사의 사장 이종일은 공장 감독 김홍규 총무 장효근과 함께 극비리에 총 2만 1000매의 독립선언서를 성공적으로 인쇄하였다.

 

보성사에서 인쇄된 독립선언서는 서면자들의 연고지인 서울, 평양, 청주, 용강, 해주, 선천, 원산, 의주 등지로 철도편을 통해 전달되었다. 1919년 3월 1일, 이른 아침부터 집집마다 독립선언서가 배달되었고 곳곳에 격문이 붙었다. 별도로 천도교 측의 임규는 27일 일본에 보내는 통고서를 가지고 서울을 출발하여 3월 1일 일본 동경에 도착한 후 이를 일본어로 번역하여 일본 정부와 귀족원, 중의원에 우편으로 발송했다.

 

이렇게 보성사에서 인쇄된 독립선언서를 통해 예정된 대로 3.1운동을 진행할 수 있었다. 보성사는 1919년 일본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천도교라는 종교적 이름을 앞세워 일본의 눈을 피해 인쇄소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었다. 이처럼 3.1운동에 있어서 중요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반포한 점에 있어 보성사는 독립 운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던 도중 일본에 협력하던 순사 신승희가 그 현장을 목격하였다. 이에 보성사 사장인 이종일은 신승희에게 5500원을 주며 설득하여 위기를 모면하였다. 하지만 인쇄가 끝난 후 선언서를 옮기던 도중 일본 경찰의 검문이라는 또 한번의 위기와 마주쳤다. 때마침 정전으로 불이 꺼져 있어 이종일 등이 단순히 인쇄된 족보일 뿐이라고 경찰을 속여 무사히 독립선언서를 옮겼다.

 

이렇게 독립선언서는 무사히 전국으로 퍼지게 되었고 민족의 독립에 대한 의지를 분출한 3.1운동은 예정대로 진행될 수 있었다. 그 후 신승희는 비밀이 탄로되어 5월 헌병대에 체포되었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비밀을 누설하지 않고 자결하였다.

 

1919년 2월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후 보성사는 일제의 탄압에 대항하는 조선독립신문을 계속 발행하였다. 그 결과 일본 경찰은 보성사를 즉각 폐쇄하였고, 같은 해 6월 불을 질러 건물을 전소시켰다. 그로 인해 민족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문서를 쉼없이 찍어내던 보성사는 현재 그 터만 남아 오늘날에 전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