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인생] 걷기 영양 건강 산책

[고양누리길걷기] (4) 고양동누리길 제12코스: 최영 장군 묘, 밀풍군 이탄 묘, 명나라 궁녀 굴씨여인 묘 (2019.04.20)

푸레택 2019. 4. 20. 23:37

 

● 고양누리길 14개 코스 걷기 2분기 3회차 '고양동누리길 걷기'(12코스)

 

☆ 일시: 2019.04.20(토) 09:30~13:30

☆ 걷기코스: 고양동누리길(제12코스), 송강누리길(제11코스 일부) / 9.1km

 

☆ 오늘걷기: 삼송역(三松驛) 8번 출구- 774번 간선버스- 안장고개, 선유동(仙遊洞) 입구 출발- 오로시(烏鷺詩) 이직(李稷) 묘(墓)- 선유랑마을- 귀성군(龜城君) 이준(李浚) 묘(墓)- 고양향교(高陽鄕校), 중남미문화원(中南美文化院)- 대자산(大慈山)- 최영(崔瑩) 장군 묘- 밀풍군(密豊君) 이탄(李坦) 묘(墓)- 명나라 궁녀 굴씨(屈氏)여인 묘- 필리핀 참전비- 공릉천(恭陵川)- 송강(松江)마을- 정철(鄭澈) 시비(詩碑)- 850번 버스- 화정역(花井驛)- 집 도착

 

☆ 오늘 만난 나무와 풀꽃: 백목련, 목련, 자목련, 왕벚나무, 산벚나무, 능수벚나무, 개나리, 진달래, 복숭아나무, 회잎나무, 팥배나무, 신갈나무, 자작나무, 은행나무, 박태기나무, 백송, 자두나무, 서양민들레, 현호색, 노루발풀, 종지나물, 꼭두서니, 냉이, 꽃다지, 제비꽃, 비비추, 꽃잔디, 긴병꽃풀, 할미꽃, 애기똥풀

 

오늘 '고양동누리길 걷기'(12코스)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명나라 궁녀 굴씨(屈氏) 여인의 묘이다. 그래서 굴씨 여인에 관한 이야기들을 찾아 모아 보았다.

 

● 명나라 궁녀 굴씨(屈氏)가 조선에 온 이유는?

 

오늘 소개할 굴씨는 이름에서 볼 수 있듯 중국인으로, 본래 명나라의 궁녀였다. 당시 동북아시아의 정세는 명나라의 몰락과 흥기한 청나라 그리고 둘 사이에 끼어 있는 조선의 형세였다. 1636년 12월 청나라는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공했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는 47일 간의 항쟁 끝에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삼배구고두의 예를 행해야 했다. 결국 이같은 항복으로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 봉림대군 등이 청의 도읍인 심양으로 끌려가야 했으며 이 사건을 우리는 ‘삼전도의 굴욕’이라 부르며 치욕의 역사로 인식하고 있다. 서울 삼전도비. 병자호란으로 청에 항복해야 했던 조선의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한편 이 시기 명나라 쪽 사정 역시 좋지가 않았는데, 숭정제(재위 1628~1644)가 재위하던 때 산해관을 기점으로 오삼계가 이끄는 군대가 청과 대치하고 있는 가운데 명나라는 내부에서 무너지고 있었다. 그리고 결정타를 가했던 것이 바로 이자성이 이끄는 농민반란으로, 반란군에 의해 1644년 4월 북경이 함락되며 명나라는 멸망하게 된다. 이때 명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는 스스로 회나무에 목을 매어 자결하고, 이후 산해관을 지키던 오삼계가 청에 투항, 결과적으로 중국 대륙은 청의 손아귀에 넘어가게 된다.

 

명의 궁녀였던 굴씨가 당시 소현세자가 볼모 생활 중이던 심양관에 배속되면서 그 인연이 시작된다. 굴씨는 중국의 소주 출신으로, 숭정제의 왕후인 주황후를 모시던 궁녀였다. 하지만 이자성의 농민반란으로 북경이 함락되며 명이 멸망하자 굴씨는 졸지에 나라를 잃은데 이어 청의 포로가 된다. 이렇게 포로가 된 굴씨는 당시 ‘심양관’에 배속되면서 볼모 생활 중이던 소현세자와의 인연이 시작된다. 이러한 인연으로 인해 훗날 소현세자가 조선으로 귀국하면서 굴씨 역시 함께 조선으로 오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귀국한지 얼마 되지 않아 소현세자는 의문의 죽음을 맞게 되고, 그렇게 굴씨와 소현세자와의 인연은 끝이 나는 듯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청으로 돌아가지 않은 굴씨는 입궁해 궁인의 삶을 살았으며,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굴씨는 죽기 전 유지를 남겼는데, “고향으로 가는 길에 묻어 달라"라는 내용이다. 이러한 유언 때문인지는 알기 어렵지만, 현재 굴씨의 묘는 소현세자 종중인 대자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으며, 밀풍군 이탄의 묘에서 50m 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묘역의 외형은 크게 봉분과 상석만 있는 간소한 형태로, 굴씨묘임을 알리는 묘표와 안내문이 세워져 있다. 묘표의 앞면에는 ‘소현세자청국심관시녀굴씨지묘(昭顯世子淸國瀋館侍女屈氏之墓)’가 새겨져 있으며, 뒤쪽에는 묘표를 세우게 된 배경을 담고 있다.

 

굴씨묘의 묘표 전면에는 '소현세자 청국심관시녀 굴씨지묘' (昭顯世子 淸國瀋館侍女 屈氏之墓)가 새겨져 있다. 굴씨묘는 한 인물의 삶을 통해 시대를 조명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한 번은 탐방 때문에 최영 장군의 묘를 찾았다가 어르신들을 모시고 굴씨묘를 함께 방문했다. 그리고 이날 탐방에 참여했던 어르신들이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로 굴씨묘를 손꼽았다. 이는 잘 알려지지 않은 굴씨의 생애와 현장이 주는 감동이 역사적 의미를 넘어 문학적 관점에서 충분히 와 닿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한 인물의 삶을 통해 당시의 시대를 조명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굴씨묘는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고향으로 가는 길목이자 소현세자의 종중에 묻힌 굴씨묘, 지금도 고양에 소재한 소현세자의 ‘소경원(昭慶園)’과 소현세자의 아들인 경선군과 경완군의 묘, 굴씨묘 인근에 위치한 경안군과 임창군의 묘 등 소현세자 일가와의 인연이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어 ‘인연(因緣)’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장소라고 할 수 있다.

* 뉴스타워 / 김희태 기자 기사 발췌

 

● 붉은 무덤의 여인, 명나라 궁녀 굴씨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기슭에는 명나라 마지막 궁녀인 굴씨의 묘가 있다. 맞은편에 있는 최영장군의 묘처럼 마음의 한이 풀리지 않은 탓인지 풀이 자라지 않는 붉은 무덤이다.

 

굴씨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갔던 소현세자가 데리고 온 9명의 명나라 환관, 궁녀 중 한 사람이다. 소현세자는 귀국한지 두 달 만에 의문사 한다. 청나라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소현세자가 청과 짜고 자신을 해하려 한다고 위협을 느끼고 있던 인조는 소현세자가 죽자 서둘러 동생 봉림대군(효종)을 세자로 책봉한다.

 

소현세자가 죽고 난 뒤 청나라는 함께 왔던 9명에 대한 환국령을 내리지만 굴씨는 떠나지 않았다. 본래 명나라 궁녀였던 굴씨는 오랑캐인 청나라에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하며 조선에 남았던 것이다.

 

굴씨는 인조의 계비인 장렬왕후 조씨를 모셨다가 세자를 여읜 뒤 여승이 되어 자수원(慈壽院)에서 지냈다. 이후 소현세자의 손자 임창군을 보살피다가 죽었다. 그녀는 늘 중국 쪽을 바라보며 명나라 황후의 은덕에 감사해 했고, 청나라와 여진족을 얘기할 때마다 분노에 찬 얼굴을 지었다.

 

효종 때에는 명나라 황실에서 익혔던 상투 트는 방법 등 정통 예법을 조선 왕실에 가르쳐 그것으로 본을 삼기도 하였다고 한다. 효종의 북벌 계획을 알고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으나 결국 북벌을 보지 못한 채 7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굴씨의 묘가 고양시 대자동에 자리 잡게 된 까닭은 하며 다음과 같이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다.

 

“오랑캐는 나의 원수요. 내 생전에 오랑캐의 결말을 보지 못하고 죽게 되었지만 행여라도 북벌하러 가는 군대가 있다면 내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볼 것이니 내가 죽거든 서쪽 교외 길가에 묻어주오.”

 

굴씨는 외모와 재능이 모두 남달랐던 거 같다. 특히 비파를 잘 타서 스스로 ‘고향을 생각하는 노래’를 지어 연주했다고 한다. 새와 짐승을 길들이는 재주도 있어 조선에 보급하기도 했다. 이런 재주 때문인지 굴씨에 대한 조선 지식인들의 관심은 남달랐다. 선비 신진유는 ‘굴씨사’를 남겼고, 시인 신위은 ‘숭정궁인 굴씨 비파가’를, 선비 김구는 ‘굴씨 묘를 지나며’라는 시를 남겼다. 특히 추사 김정희의 제자이자 당대의 빼어난 시인인 신위의 시는 굴씨의 비파 솜씨를 가늠하게 한다.

 

비파를 타는 여인

 

장렬왕후 궁녀 가운데 제일로 꼽혀

만수전 봄빛에 활짝 피었네

터져 나오는 소리는 은혜와 원한의 긴 여운

바람모래 부는데 비파 소리가 전각을 감도네

신령스런 솜씨, 옛 명인들을 감복시키고

눈물 고인 눈, 함께 온 고국 사람 바라보네

비파를 안고 무릎에 놓은 채 몸에서 떼지 않았으니

미인은 흙이 되어도 악기에 밴 향기 남았네.

 

시인 신위(申緯, 1769-1845)의 시, 숭정궁인 굴씨비파가(崇禎宮人 屈氏琵琶歌)

 

굴씨가 신위의 관심을 끈 데는, 비파라는 악기 자체의 매력도 있었겠지만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의 황후를 모셨던 궁녀에 대한 남다른 관심이 작용했을 것이다. 조선 후기의 지식인들은 명나라에 대한 짙은 향수와 신흥 청나라에 대한 깊은 경멸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굴씨 여인의 삶은 정조 24년(1800)에 정조의 명에 따라 의례의 여러 사례를 모아놓은 ≪존주휘편≫ 에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얼마전 고양시는 한동안 방치되어 있던 굴씨 여인의 묘를 정리하고 그 앞에 안내판을 설치했다. 행여 이곳을 지나치게 되면 굴씨 여인의 붉은 묘에 들러 낯선 땅에서 생을 마감한 한 여인의 삶에 잠시 애도를 표해 보자.

* 고양소식 / 황금희 펀집위원 기사 발췌

 

● 굴씨 묘를 지나며(過屈氏墓詩) / 김구(金球)

 

풀잎은 비단이요, 꽃은 비녀 같구나

이 언덕에 그대 묻은 지 그 몇 해이던가

해마다 한식 청명 그 날이 오면

명나라 궁녀 위해 지전이나 보낼까 하네

 

*紙錢(지전): 冥錢(명전)이라고도 하며 종이로 만든 모형 돈으로 저승에서 쓸 노자돈이다. 위는 조선말 선비 김구(金球)의 ‘굴씨 묘를 지나며(過屈氏墓詩)’라는 시(詩)다.

 

● 최영(崔瑩) 장군 (1316년~1388년)

 

고려의 무신 최영은 청렴함과 충직함의 대명사로 꼽힌다.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라는 말이나 동료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고 조선을 건국할 때에도 끝까지 가담하지 않고 참수를 당하면서도 꼿꼿함을 잃지 않았다는 일화로도 그렇다.

 

최영은 왜구를 토벌한 공을 인정받아 우달치(于達赤)에 임명되면서 관직에 나갔고, 공민왕 시절 왜구와 홍건적의 침입을 수차례 물리쳤다. 1352년(공민왕 1)에 조일신(趙日新)의 난을 진압했고, 1354년 대호군에 임명되었다. 1355년부터 시작된 배원 정책에 따라 원에 속했던 압록강 서쪽의 파사부(婆娑府, 구련성) 등 3참(站)을 격파했다. 1357년 왜구가 배 400척을 이끌고 전라도를 침범하자 복병전으로 물리쳤고, 2년 뒤에는 서경에 쳐들어온 홍건적 4만 명을 격퇴했다.

 

1361년 홍건적이 다시 개경을 점령하자 안우, 이방실(李芳實)과 함께 개경을 수복했고, 그 공으로 훈1등에 도형벽상공신, 전리판서가 되었다. 1363년 김용의 난을 제압하고, 이듬해 최유가 덕흥군 옹립을 내세우며 압록강을 건넜을 때 철퇴를 내린 이도 최영이었다. 그는 공민왕이 한때 국정을 넘기다시피 했던 신돈이 없는 죄를 들어 헐뜯는 바람에 귀양을 갔지만 신돈이 처형된 뒤 풀려나 관직을 회복했다.

 

명나라에서 요구한 말 2,000필에 대해 제주도의 호목이 300필만 보내는 반란이 일어났다. 최영이 이를 진압하러 간 사이 공민왕이 시해되었으나 그 뒤를 이은 우왕의 시대에도 최영은 야전 사령관으로 수많은 전투에 참여했다. 그는 일흔 살이 다 되도록 전장에서 활발하게 뛰었다고 한다.

 

1380년 최영이 동서강에서 왜구와 전투를 벌이다 병에 걸리자 우왕은 그때까지의 공적을 새긴 철권(鐵券, 임금이 공신에게 하사하던 쇠로 만든 패)을 내려 위로했다. 이듬해 수시중에 올랐다. 그의 아버지에게도 높은 벼슬이 하사되었고, 어머니는 삼한국대부인으로 격상되었다. 최영은 1384년 문하시중을 거쳐 판문하부사에 올랐다. 그 뒤에는 조정의 부패한 무리들을 숙청했고, 1388년 딸을 우왕의 영비로 보내는 등 권력의 중심에 섰다.

 

최영의 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랴오둥 정벌이다. 이즈음 명나라가 원을 멸망시키고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해 철령 이북 일대를 랴오둥에 예속시키려 한 일이 일어났다. 최영은 고려의 영토를 빼앗길 수 없다며 랴오둥 정벌을 결심했다. 그는 팔도도통사로서 좌군도통사 조민수(曺敏修), 우군도통사 이성계와 함께 군사 3만 8,000명을 이끌고 랴오둥 정벌에 나섰다. 하지만 이성계의 생각은 달랐다. 이성계가 조민수를 설득해 위화도에서 회군한 것이다. 두 장수가 발을 돌리니 랴오둥 정벌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이성계는 도성까지 장악해 최영으로서도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다.

 

최영은 고향인 고봉현(高峯縣, 지금의 고양)으로 귀양을 갔고, 다시 마산, 충주 등지로 옮겨졌다가 랴오둥을 공격한 죄로 개경에 압송되어 참수되었다. 이 소식에 최영의 청렴함과 승전보를 칭송하던 백성들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성계는 조선을 세운 뒤 6년이 지나서야 최영에게 무민(武愍)이라는 시호를 내려 넋을 위로했다고 한다. (출처: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

 

● 밀풍군(密豊君) 이탄(李坦)

 

할아버지는 소현세자(昭顯世子, 인조의 長男)의 셋째 아들인 경안군 이회(慶安君 李檜)이며, 아버지는 임창군 이곤(臨昌君 李焜)이다.

 

소현세자가 일찍 죽자 세 아들이 제주도로 유배되어 맏아들 경선군(慶善君)과 둘째 아들 경완군(慶完君)은 그곳에서 죽고, 경안군만이 혼자 살아 남았으므로 그는 소현세자의 혈손이기도 하다. 밀풍군(密豊君)에 봉하여졌다.

 

1723년(경종 3년) 사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오고, 1726년(영조 2년) 다시 사은사 겸 동지사가 되어 다녀왔다. 1728년 소론파인 이인좌(李麟佐) 등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훈련대장 남태징(南泰徵)과 그의 아우인 이태적(李泰績), 이정(李檉) 등이 그를 임금으로 추대하고자 하였다는 말이 퍼지자, 난이 평정된 뒤 사사(賜死)되었다.

 

남태징 등이 끝내 불복하였음에도 연루피의자들과 무더기로 참형되었고, 또한 소현세자의 현손이라는 신분이 풍문과 관련되어 억울한 죽음을 당하였다. (Daum 백과 발췌)

 

밀풍군은 1728년(영조 4년) 3월 이인좌, 이유익, 정희량 등이 일으킨 무신난, 일명 이인좌의 난을 통하여 역사에 부각된 인물이다. 평소 온화한 인품과 범상치 않은 외교 실력으로 종실과 신료들에게 두루 신망을 얻고 있었던 그는 영조와의 관계도 매우 가까웠다. 하지만 그는 반란군의 추대를 받았다는 혐의로 집권 노론의 끈질긴 탄핵을 받아 목숨을 잃었고 집안도 풍비박산이 나버렸다.

 

그로부터 2년 뒤인 경술년에 또 하나의 역모가 드러나면서 밀풍군은 영조의 근친을 제거하려는 역신들의 모략으로 희생되었다는 증언이 나왔다. 반란을 주도한 남인과 소론 강경파가 그를 추대하여 영조의 오판을 유도한 다음 거사에 성공하면 여흥군 이해를 옹립하려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밀풍군을 변호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그는 비정한 정국의 흐름 속에 역당의 수괴로 남게 되었다.

 

종실의 대표자로 활약하다

밀풍군(密豊君) 이탄(李坦)은 1698년(숙종 24년)에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 경안군 이석견의 손자인 임창군 이곤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명은 이원(李垣)이다. 일찍이 소현세자가 청나라에서 귀국하자 왕권에 위협을 느낀 인조는 그를 독살하고 민회빈 강씨를 사사한 다음 그들의 세 아들을 제주도에 유배했다. 그 후 맏아들 경선군 이석철과 둘째 아들 경완군 이석린이 병사하고 경안군만이 살아남아 자손을 이어갔다. 인조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른 효종과 현종, 숙종은 소현세자의 후예들을 안쓰런 마음으로 후히 대접했으므로 밀풍군은 종실의 요인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1719년(숙종 45년) 10월 20일 숙종은 밀풍군 이탄의 둘째 아들 이상대를 연령군(延齡君) 이훤(李昍)의 후사로 삼고, 이름을 공(糿)이라고 지어주었다. 연령군은 숙종의 여섯째아들로 명빈 박씨 소생이었는데 1699년(숙종 25년)에 태어났으므로 연잉군과는 다섯 살, 밀풍군과는 한 살 터울이었다. 연령군은 그해에 연잉군과 함께 부왕의 기로소 입소를 적극 권유하는 소를 올리기도 했을 만큼 효성스러웠는데 갑자기 병을 앓아 불귀의 객이 되었던 것이다. 이듬해 6월 숙종이 승하했을 때 연잉군은 목욕에, 밀풍군은 염습에 집사하는 등 두 사람은 종실의 중심인물로 활동했다.

 

밀풍군은 26세 때인 1723년(경종 3년) 11월에 사은정사로 청나라에 건너가 한해 전에 등극한 옹정제를 배알했고, 1726년(영조 2년) 7월에도 사은정사, 11월에는 동지정사로 임명되어 명사변무(明史辨誣)의 해결에 진력했다.

 

당시 《명사(明史)》의 《희종실록》과 《양조종신록(兩朝從信錄)》에 인조반정은 왕위 찬탈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때문에 조선에서는 틈만 나면 사신을 보내 《명사》의 개정을 간청했지만 청나라에서는 자구 몇 개를 고치는 것으로 생색을 낼 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조선은 친청파였던 소현세자의 후예인 밀풍군을 사신으로 파견하여 그들을 설득하려 했던 것이다.

 

그렇듯 대청외교의 주요현안을 담당했던 밀풍군은 무역 분쟁의 해결책까지 제시하는 등 적극적으로 영조를 보좌했다. 그 무렵 조선에서 채굴한 은(銀)이 무역대금으로 대량으로 청나라에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조선 상인들이 은에 납을 섞어 유통하다 발각되어 문제를 일으켰다. 이에 따라 영조가 고심하자 밀풍군은 조정에서 은화를 주조할 때 상평통보처럼 표준을 정하면 위조를 방지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그가 경제적인 지식도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1727년(영조 3년) 9월 9일, 밀풍군은 10세가 된 영조의 장남 효장세자의 관례에서 종실의 대표인 주인(主人)으로 참례했다. 주인이란 임금을 대신해 상징적으로 행사를 주관하고 손님을 접대하는 종실의 어른을 말한다. 그렇듯 영조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밀풍군은 갑자기 반역을 도모한 소론 강경파와 남인들에 의해 차기 대권주자로 거론되면서 일생일대의 위기를 맞게 된다.

 

이인좌의 난, 궁지에 몰리다

소론 강경파인 준소와 남인들은 영조의 즉위와 함께 경종 대에 노론 세력 축출에 앞장섰던 김일경, 목호룡 등이 처형되고 자신들이 정계에서 소외되자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동조자들을 규합하면서 영조가 숙종의 아들이 아니고 경종이 영조에게 시해 당했다는 소문을 퍼뜨려 민심을 뒤흔들었다. 그런데 영조가 정미환국으로 민진원, 정호 등 일부 노론 대신들을 축출하고 이광좌, 조태억 등 소론 온건파인 완소를 등용함으로써 반란의 명분이 약화되자 다급하게 거사를 도모했다.

 

반란의 주도 세력은 이인좌를 필두로 영남의 정희량, 호남의 박필현, 경기의 권서린 등이었고, 평안병사 이사성, 총융사 김중기와 금군별장 남태징, 전라감사 정사효, 충청감사 권첨, 담양부사이자 경종의 처남 심유현 등이 동조했다.

 

1728년(영조 4년) 정월, 이인좌는 서울에 올라가 이하, 이유익 등을 만나 병력 동원 문제를 협의했고, 다시 영남으로 내려가 김홍수와 정희량과 함께 거병 날짜를 저울질했다. 하지만 그들의 계획은 안성에 있던 봉조하 최규서가 영조에게 달려와 고변하고, 서울에서 내응하기로 했던 남태징과 김중기, 남하하려던 평안병사 이사성 등이 즉각 체포됨으로써 뒤틀리기 시작했다.

 

다급해진 이인좌는 3월 15일, 서둘러 반란군을 이끌고 청주성을 급습하여 충청병사 이봉상과 청주영장 남연년 등을 살해하고 청주병영을 점령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오명항·박찬신·박문수에게 훈련도감 마병이 포함된 정예 군사를 내주어 반란을 진압하도록 했다. 관군은 서둘러 남하한 뒤 안성과 죽산 등지에서 반란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대승을 거두고 이인좌를 생포하기에 이른다. 신천영의 지휘로 끝까지 저항하던 청주의 반란군 역시 상당산성이 함락되면서 와해되었다.

 

정희량이 이끌던 영남의 반란군은 3월 20일 안음에서 반란을 일으켜 거창, 합천까지 진격한 뒤 청주로 향하다가 관군의 반격으로 거창까지 밀려난 뒤 토벌되었다. 박필현이 이끌던 호남의 반란군도 전라감사 정사효의 변심으로 이렇다 할 전투조차 못한 채 죽거나 생포되었다.

 

당시 반란세력들은 공공연하게 경종의 복수와 함께 밀풍군 이탄의 옹립을 부르짖었다. 그들은 영조의 등극으로 인해 ‘효종·현종·숙종’으로 이어지는 삼종의 혈맥이 끊긴 것으로 보고 새 임금은 소현세자의 혈통에서 나와야 한다는 정통론을 앞세운 것이었다. 그 때문에 밀풍군은 반란 초기였던 3월 20일에 체포되어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이어지는 증언, 퇴로가 없다

이윽고 반란이 평정되자 관련 죄인들에 대한 국청이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반란 주모자들은 너나할 것 없이 밀풍군에 대한 불리한 증언을 늘어놓았다. 생포된 뒤 한양으로 압송된 이인좌는 3월 26일 영조가 친국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이유익과 한세홍은 항상 밀풍군이 인망이 있다 했고, 이유익이 가서 보고 말했더니 밀풍군이 대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말은 밀풍군이 자신들에게 적극 동조하지는 않았지만 불충한 마음을 품고 있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침묵이 부정이 아니라 긍정으로 읽히던 시대였다.

 

박필몽의 아들 박사관은 또 3월 30일의 공초에서 맨 처음 반역 의사를 밝힌 사람은 이하였는데, 그의 사위 조덕정이 영조에게 끝까지 저항했던 소론 김일경의 외손이었으므로 영조가 즉위하자마자 역심을 품었다고 밝히고, 그가 이웃에 살던 밀풍군을 추대하려 했다고 증언했다. 5월 2일, 임환의 증언은 더욱 강렬했다.

 

“심유현이 역심을 품었을 뿐만 아니라 밀풍군을 추대하려 했습니다. 밀풍군은 그 사실을 몰랐지만 늘 황포를 몸에 걸친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황포(黃袍)란 임금의 옷이니 밀풍군이 내심 보위에 뜻이 있었다는 뜻이다. 국청에서 그런 표현이 나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밀풍군은 이미 죽은 목숨이었다. 영조는 적당들이 일제히 그를 거론하는 것이 간계임을 의심했지만 정황상 풀어줄 명분이 없었다. 고심하던 5월 8일 국청을 앞두고 밀풍군에게 가벼운 칼을 씌우고 양 손에 고랑을 채우지 못하게 하며, 미리 먹을 것을 주고 땅에 자리를 깔아주라는 특명을 내렸다. 영조는 밀풍군의 처벌은 어쩔 수 없지만 그 과정에서 고통만을 덜어주려 했던 것이다.

 

그날도 역시 밀풍군에게 유리한 진술은 나오지 않았다. 그는 한결같이 자신의 무고함을 호소했지만 조동규는 밀풍군이 이유익으로부터 거사가 실패하면 노량진 한강변으로 가서 배를 타고 도망쳐 외부의 반란군의 구원을 받으라는 말을 들었다면서, 밀풍군 추대가 확실하게 본인에게 전해졌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또 이유익으로부터 평양감사 이사성과 이탄이 함께 총관(摠管)이 되었으므로 입직한 가운데 익숙하게 상의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토설했다.

 

심성연의 고변, 빗나간 기회

그때까지의 심문 결과만으로도 밀풍군은 역모 죄로 능지처사에 처하는 것이 마땅해 보였다. 하지만 영조는 다른 관련자들을 심문하면서 차일피일 처결을 미루었다. 혹시라도 그의 무죄를 증명할 만 한 증언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것만 같았다.

 

노론 신료들은 연일 왕법을 내세우며 역도의 수괴인 밀풍군을 처단하라고 보챘다. 그런데 6월 29일 영조가 고대하던 새로운 증언이 나왔다. 그날 춘천에 사는 심성연이라는 자가 나타나 역당이 추대하려던 사람은 밀풍군 이탄이 아니라 여흥군 이해라고 고변했던 것이다. 그는 오촌지간인 심상관이 역모에 필요한 돈을 빌려달라고 요구했지만 들어주지 않자 어미를 통해 자신을 독살하려 했으므로 발고하는 것이라 했다.

 

그가 고발한 반란 계획은 매우 자세했다. 역도들은 각각 급당(急黨)·완당(緩黨)으로 나누어 일을 도모했는데, 급당은 이인좌·이사성·이유익 등으로 무신년에 난을 일으킨 급진세력이었고, 완당은 심상관의 가문인 청송 심씨와 음죽 목씨 등이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또 심상관 무리가 이전부터 반역에 동조하는 무리와 ‘강아지씨혼사간선(江阿只氏婚事看選)’이라는 암호로 소통하면서 큰 배를 사서 세곡을 훔치려 했고, 화폐 위조와 군기 제조, 요인 암살 등을 계획하고 10여 년 동안 실행에 옮기려 했다고 말했다. 아울러 여흥군 이해 집안에는 대대로 전해오는 은자가 있는데 이번 거사의 자금으로 쓰였다고 했다.

 

이와 같은 심성연의 증언은 무신난과 함께 은밀히 진행되었던 또 하나의 역모를 묘사하고 있었다. 영조는 즉시 국청을 열고 심상관을 잡아들여 심성연과 대질시켰지만 중도에 심성연의 말문이 막히면서 일방적인 무고로 결론지어졌다. 이에 실망한 영조는 그를 사형에 처했다. 그날 여흥군과 여릉군도 끌려와 심문을 받았지만 무사방면되었다. 그와 함께 밀풍군 이탄의 마지막 구명줄이 사라졌다.

 

영조의 비탄 속에 자결하다

1728년(영조 4년) 7월 10일, 판의금 이집은 이탄의 죄명이 확실하니 왕법에 따라 처형하라고 상소했다. 그러자 이틀 뒤인 7월 13일 영조는 대신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밀풍군 이탄은 사람됨이 결코 이인좌 등과 반역할 자가 아니다. 흉적의 관문(關文)·격문(檄文)에 그 이름이 낭자하지만 추대한 사람을 어찌 글에 나타내어 고할 수 있겠는가? 조덕정을 형신할 때마다 혹 밀풍에게 해로운 일이 있을까 염려했는데, 마침내 형장을 맞다가 죽었다. 조덕정은 역적 김일경의 외손이고 역적 이하의 사위인데, 그가 밀풍에 끌어댈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어찌 형장을 참고 승복하지 않으려 했겠는가? 전에 비몽사몽간에 문득 밀풍과 서로 만나 흐느껴 울다가 목이 메어 놀라 깨었다. 그때에 처분하려 했으나, 조동규의 공초가 때마침 나왔으므로 결말을 짓지 못했다. 이제 조덕정이 죽었으므로 내 마음에는 의심할 만한 것이 없다. 하지만 이 일은 여흥군의 경우와 다르므로 그를 석방하면 조종 때에 법을 세운 뜻에 어그러질 것이니, 참작하여 부처하라.”

 

그처럼 영조는 끝까지 밀풍군을 죽이지 않고 유배형에 처하는 것으로 마무리하려 했다. 그러자 대신과 간관들이 크게 반발했다. 대사간 강필경은 어명의 부당함을 따지며 하루 빨리 그를 처형하라고 종용했다.

 

“예전부터 종신(宗臣)이 추대된 죄명을 지고도 천지 사이에서 편히 사는 자는 없었습니다. 역적의 공초와 격문이 낭자하여 엄폐하기 어려운데다가, 법이 지극히 중대하고 공론이 또한 엄하므로 한때의 사사로운 은혜로 굽힐 수는 없습니다. 청컨대 죄인 탄을 참작하여 부처하라는 명을 빨리 거두고 율문에 따라 처단하소서.”

 

이에 영조는 성인이 세상을 다스릴 때도 유언비어는 늘 있었는데, 자신은 이를 참작하여 처분한 것이니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맞받아쳤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라도 밀풍군의 삶을 유예시켜주려는 뜻에 불과했다. 경위야 어쨌든 왕권에 도전한 종친의 운명은 곧 죽음이었다. 신하들도 그런 임금의 결정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면 그 역시 불충이 될 것이었다.

 

1729년(영조 5년) 2월 10일 도승지 조현명은 이탄이 체포된 지 1년이 지났는데도 국법을 행하지 않음은 대간들의 게으른 탓이라고 질타했다. 그러자 28일 대사간 오명신은 종실이 군주로 추대되었는데 살려둔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면서 하루빨리 처단하라고 상소했다.

 

3월 28일 대사헌 송인명 등이 또 다시 처결을 강요하자 영조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그를 자결토록 명하면서 친족들을 교화시키지 못해 흉적들의 구실을 삼게 했으니 통한스럽다고 탄식했다. 그러면서 이탄이 자결할 때 독촉하지 말고, 검험할 때도 부관(部官)·의생(醫生)·부리(府吏)만 들어가 예를 갖추라고 명했다. 그렇듯 밀풍군 이탄은 영조에 의해 역신의 수괴가 아니라 억울한 왕족으로서 최후를 마칠 수 있었다. 당시 그의 나이 32세였다.

 

경술년의 역모, 무신년의 진상을 드러내다

의금부와 사간원에서는 밀풍군이 죽자 역적에 대한 연좌법에 따라 그의 재산을 적몰하고 가족들을 노적(孥籍)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적이란 국사범의 중죄인으로서 본인을 극형에 처하고 그 처자를 노비로 삼으며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는 조치를 말한다. 그러나 영조는 종친에 대한 신료들의 계속되는 압박에 기분이 상했는지 허락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731년(영조 7년),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두 가지 사건이 연달아 발생하면서 조정을 뒤흔들었다. 첫 번째 사건은 무신난 잔당들의 지시를 받은 궁녀 박순정, 김순혜, 무당 태자 등이 뼛가루를 창경궁의 양화당, 세자궁, 빈궁의 침실 등에 묻고, 세자와 옹주에게 타 먹이는 저주행위를 하다가 들킨 것이었다.

 

영조는 그해 11월 효장세자의 갑작스레 병을 앓다가 죽은 이유가 저들이 몹쓸 것을 먹였기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그 무렵 화순옹주도 홍진을 겪은 뒤 하혈하는 증세를 보였는데, 당시 태어난 네 명의 옹주에게도 독약을 먹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는 점진적으로 영조의 혈족을 제거하고 궁극적으로 영조까지 몰아내 정권을 빼앗으려는 무서운 음모였다.

 

이에 큰 충격을 받은 영조는 사건 가담자들을 색출하여 모조리 처형했다. 한데 그 와중에 환관 최웅필이 궁궐에 침입하여 화약을 훔쳐 방화하려다 체포된 사건까지 일어났다. 최응필을 심문한 결과 궐내에 불이 나서 사람들이 뛰쳐나가면 은밀히 자객 이태건을 들여보내 영조를 죽이려 했음이 밝혀졌다.

 

일련의 두 사건은 우연히 발각되었지만 경각심을 품은 영조는 의금부에 엄중한 수사를 명했다. 그 결과 이 사건은 심성연의 고변대로 급수(急手)로 행해진 무신난의 연장선상에서 함께 이루어졌던 완수(緩手)의 일환이었다.

 

매흉·화흉·방화로 이어진 그들의 계획은 여흥군 이해의 오촌 이엽이 구상했는데, 무신난이 실패로 돌아간 뒤 본격적으로 실행에 옮긴 것이었다. 그들은 이전에 안흥에서 조세미를 탈취하여 막대한 군량을 확보하려고까지 했다. 곧 대대적인 관련자 색출과 체포가 이어졌다. 혐의자의 대부분은 무신난 당시 희생당한 소론과 남인의 후예들이었다. 한데 그들의 입에서 밀풍군 이탄에 대한 새로운 증언이 나왔다.

 

당시 체포된 심익연의 진술에 의하면 이사성·정사효·이인좌 등 준소 측 인물들은 밀풍군을 위해 일을 꾸몄지만 실패하면 여흥군 형제를 위해 재차 시도하겠다고 했고, 완소 측 인물들은 밀풍군이 유약하다는 이유로 여흥군 형제를 내세웠다. 4월 16일에 심문 받은 성탁은 이인좌가 반란을 벌일 때 밀풍군을 거론한 것은 실제로 그를 추대하려 한 것이 아니라 제거하기 위해서였다고 자백했다.

 

그처럼 죄인들은 한결같이 ‘밀풍군은 허세이고 여흥군이 실세’라고 진술했다. 이같은 정황은 여흥군 이해의 아들과 동서지간이었던 심종연과 심지연 등 청송 심씨들의 심문과 진술을 통해 보다 확실해졌다. 그때에 이르러 영조는 2년 전 심성연의 고발 내용이 사실이었음을 알고 마른 침을 삼켰다.

 

그렇게 해서 영조 등극 초기에 소론 강경파와 남인에 의해 벌어진 일련의 반역사건의 진상이 완전히 밝혀졌다. 무신년에 이인좌, 이사성 등이 시도한 급수는 밀풍군을 추대했고, 경술년에 권중경, 권숙경, 심상관 등이 주도한 완수는 여흥군과 여릉군을 추대했다는 것이다.

 

경술년의 사건에서 궁중저주사건으로 청송 심씨, 나주 나씨가, 방화미수사건으로 사천 목씨가 멸문지화를 당했다. 아울러 여흥군 이해와 여릉군 이기가 교형에 처해졌고, 이엽, 이전, 이형은 물고되거나 유배되었다. 하지만 밀풍군 이탄에 대한 신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쨌든 그는 반역자들에게 추대되었음이 명백해졌기 때문이다.

 

조선의 멸망과 함께 복권되다

1737년(영조 13년) 8월 28일, 대사헌 송성명과 대사간 성덕윤은 밀풍군을 처단한 뒤 노적(孥籍)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며 하루빨리 국법대로 시행하라고 상소했지만 영조는 들어주지 않았다. 그 후에도 노론의 공세는 끝없이 이어지면서 영조를 괴롭혔다. 결국 26년이 지난 1755년(영조 31년) 6월에 이르러 영조는 대사간 유언민, 집의 서명응의 소청에 따라 밀풍군의 가족에 대한 징계를 허락했다.

 

이때 영조는 자신이 10년 동안 서로 버티어 온 것은 슬픈 마음을 견디지 못해서였는데 이제는 참기 어려우므로 윤허한다고 밝혔다. 그해 7월에는 밀풍군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던 양반 송유가 종성부로, 그의 부친은 정의현으로 유배되었다.

 

1864년(고종 1년) 7월, 고종은 홍계희, 심환지, 김달순, 김관주, 박엽, 신의학 등과 함께 밀풍군과 여흥군을 사면하고 복권시켜 주었다. 1908년(순종 1년) 4월 30일에는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의 소청에 따라 한효순, 이징옥,정인홍, 김일경, 윤휴, 윤원형 등 종래에 역신으로 규정되었던 77명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었는데 여기에는 밀풍군 이탄과 함께 무신난을 주도했던 박필현, 심유현 등이 포함되었다.

 

[출처] 한국사 인물 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