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 걷고 또 걷고 기차를 타고

[2013] 대구 근대문화골목 산책(1) 약령시약전골목, 약령시한의학박물관 (2013.05.19)

푸레택 2013. 5. 23. 10:40

 

 

 

 

 

 

 

 

 

 

 

 

 

 

 

 

 

 

■ 대구 근대화 거리 골목 산책

대구에 사는 이종사촌 동생이 딸내미 결혼식 소식을 알려왔다. 오랜만에 항일 독립 운동 정신이 깃든 문화의 도시 대구를 찾았다. 서울역에서 ktx를 타니 두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동대구역에 내려준다. 결혼식장 참석까지 시간 여유가 많아서 대구 지하철 1호선을 타고 반월당역에서 내려 골목투어를 시작했다. 약령시 약전골목과 한의학박물관을 시작으로 대구 근대화 거리 골목 구석구석을 둘러보았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일제강점기 시절, 민족시인이자 저항시인인 이상화의 고택(古宅)과 국채보상운동을 벌인 독립운동가 서상돈의 고택, 1900년대에 세워진 계산성당, 90계단 3.1만세 운동길, 대구제일교회, 선교사 고택, 가곡 동무생각의 청라언덕길을 산책했다. 따뜻한 봄 기운을 받으며 역사의 길을 걷는다. 이곳은 죽마고우(竹馬故友)와 종교 그리고 삶을 생각해 보는 공간이다. 지나간 옛 그리움을 달랠 수 있는 시간을 가져보는 곳이기도 하다.

이상화 고택과 서상돈 고택, 계산성당과 대구제일교회를 둘러보고 3.1만세 운동길과 청라언덕길을 걸은 후 김광석다시그리기길을 찾아 방천시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많은 젊은이들이 이곳을 찾아 김광석을 추억하고 있다. 이등병편지 거리에서 ‘서른 즈음에 사랑했지만 일어나 광야에서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바람이 불어 오는 곳 어느 60대 노부부의 사랑이야기’ 김광석의 노래들이 끝없이 귓가를 맴돈다. 김광석은 죽지 않았다. 아직도 아름다운 목소리와 젊은 그 모습 그대로 우리들의 가슴 속에 살아 숨쉬고 있다.

대구를 찾으니 아련한 유년기 시절의 기억들이 그리움을 안고 얼핏얼핏 스쳐 지나간다. 나는 유년기 시절을 대구에서 가까운 칠곡군 인동면에서 보냈다. 어릴 적 고향을 떠났지만 그래도 그때 기억들이 문득문득 떠오른다. 다섯살 위인 누나는 나보다 고향에 대한 기억이 더 많은 탓일까 어릴 적 뛰놀던 고향이 그리운 탓일까 가끔씩 전화 통화를 할 때면 어린 시절 추억들을 어제 일인 듯 얘기한다.


어머니와 함께 청량리역에서 탄 중앙선 완행 밤열차는 새벽이 되어서야 화본역에 도착했었지. 새벽 풀잎 이슬 바짓가랑이에 적시며 먼 길 걸어걸어 이모님 댁 찾아가곤 했었는데... “택이 왔나!” 하시며 반갑게 맞아주시던 산성면 백학리 큰이모님 목소리 아직도 귀에 쟁쟁한데... 지금도 하늘나라에서 제 이름 불러 주시려나. “일주일은 같이 지내야지. 이틀밤 자고가면 우야노. 이럴거면 다음엔 오지 마라” 하시며 못내 서운해 하시던 부계면 창평리 작은이모님. 팔공산 아래 대율 한밤마을에서 홀로 살아가시던 둘째 이모님. 서울에 있는 유명 대학을 졸업하고도 깡촌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이종사촌형. 이제는 멀고 먼 옛 이야기.

어느 해이던가, 어머니와 함께 인동 고모님댁을 찾았을 때 어머니는 “야야, 이 집이 너가 태어난 곳이다” 말씀하셨지.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겠지. “택아, 너는 어릴 때 잠자기 전에 하루도 빠짐없이 할머니한테 할매요! 나는 자누매 하고 잤는데 기억나나? 하시던 어머니 말씀. 할머니는 생각나는데 제가 말한 건 기억이 안나요. 어머니. 천사와 같았던 어머니, 어머니 사시는 하늘나라는 세상의 고통과 걱정근심 없겠지요? 이 세상에서 누리지 못한 행복 맘껏 누리세요. 어머니!


어릴 적 뛰놀던 곳, 칠곡군 인동면 진평동. 학교 다녀온 누나가 책보를 툇마루에 내던져 놓고 감나무에 올라가서 감을 따주던 기억, 벼 익어가는 들판에서 메뚜기 잡던 기억, 누나와 함께 소를 몰고 뒷산 언덕에 올라가서 놀다가 소를 잃어버려 강가를 헤매며 소를 찾던 기억, 친구와 함께 도랑물 건너 인동국민학교 찾아가서 창문 너머로 교실에 있는 누나를 불러보던 기억들이 아련히 떠오른다.

고모님과 이모님, 외삼촌, 사촌형, 이종사촌 등 친가 외가 가깝고 먼 친척들이 살아가고 있었던/있는 군위군 효령면 화계리, 부계면 창평리(구방동), 산성면 백학리, 팔공산 대율 한밤마을, 칠곡군 인동면 진평동, 화본역 그리고 대구, 왜관, 동명, 의흥, 봉림, 우보, 탑리..... 낯익은 지명들을 떠올려 본다. 

그나저나 칠곡 인동 우리집 뒷집에 살던 죽마고우(竹馬故友) 영근이는 지금 어느 하늘 아래에서 살고 있을까? 친구의 누나 이름은 우영옥이었지. 내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죽마고우 우영근, 그 친구는 함께 뛰놀던 어릴 적 일들을 기억이나 하고 있을런지... 지금은 그저 그때 일들을 떠올려보는 것만으로도 마음 평안해지고 잔잔한 행복감이 밀려온다.

대구 근대화 거리 골목투어는 이렇게 어릴 적 옛추억을 불러일으키며 끝이 났다.

2013.05.23 글.사진=김영택 / 사진영상편집

 

 

 

 

 

 

 

 

 

 

 

 

 

 

 

 

 

 

 

 

 

 

 

 

 

 

 

 

 

 

 

 

 

 

 

 

 

 

 

 

 

 

 

 

 

 

 

 

 

 

 

 

 

 

 

 

 

 

 

 

 

 

 

 

 

 

 

 

[2013] 대구 근대문화골목 산책(1)

 

 

약령시 약전골목, 약령시 한의학박물관

향기 그윽한 한약에 취하다

 

 

● 대구 근대화 거리 골목 산책

● 대구 근대 골목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대구 도심에는 대구읍성 철거 전후(1907)를 중심으로 한 격동의 대한민국 근현대사 스토리가 집중되어 있으며, 대구읍성을 비롯하여 계산성당, 제일교회, 선교사주택, 이상화고택, 화교소학교 등 근대건축물과 3․1만세운동길, 약령시와 진골목, 화교거리와 뽕나무 골목 등 도심의 무수한 골목들이 20세기 초까지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이후 큰 변형없이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 다른 지역에서는 보기드문 역사자산으로 평가되고 있다.

● 동산 청라(靑蘿)언덕

청라언덕에서 시작해 진골목에 이르는 약 2km 구간은 대구 근대 문화의 발자취를 엿볼 수 있는 코스다. ‘대구의 몽마르트’라 불리는 청라언덕은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같은 내 동무야’라는 노래 ‘동무 생각’의 무대가 된 곳이다.

계성학교 재학 시절 신명학교 여학생을 본 뒤 한눈에 반해 사랑을 키웠던 박태준이 훗날 ‘시조 시인’ 이은상(1903~1982)에게 첫사랑에 대한 추억을 털어놓다가 곡을 만들었다고. 이은상이 그 곡에 가사를 붙여주면서 국민 가곡 ‘동무 생각’이 탄생했다 한다.

언덕에는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예쁜 집이 서 있다. ‘선교사챔니스주택(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5호)’으로 1910년경에 지어졌다고 한다. 미국인 선교사들이 그들의 주택용으로 지어 살았으나 지금은 의료박물관으로 사용된다.

● '3.1만세운동길'

청라언덕에서 대구 제일교회 옆으로 이어지는 계단 길은 ‘3.1만세운동길’이라 불린다. 1919년 1000여명의 학생들이 이 길을 통해 서문시장으로 나가 독립만세를 외쳤기 때문이다.

당시 계성학교 학생들은 학교의 감시를 피해 흰 두루마기를 입고 장꾼으로 변장해 학교를 빠져나왔고, 신명학교 학생들은 빨래하러 가는 척 대야에 헌 옷가지를 담아 학교를 빠져나왔다고 한다. 계단 양 옆에 3.1만세운동 당시의 사진들이 걸려 있다.

3.1만세운동길을 내려와 길을 건너면 고딕식 붉은 벽돌로 지은 계산성당과 만난다. 계산성당 바로 옆이 약전골목이다. 조선 효종 때부터 봄과 가을로 나눠 약령시가 열렸던 곳이다.

지금도 100곳 가까운 약업사가 몰려 있다. 약전골목의 내력을 알려주는 건물은 대구제일교회다. 1898년 남성정교회로 처음 설립된 뒤 1933년 벽돌 교회당을 짓고 지금의 ‘제일교회’로 이름을 바꿨다. 13~15세기의 중세 고딕양식으로 지어진 빨간 교회 건물을 뒤덮은 담쟁이덩굴이 인상적이다.

● 계산성당

길 건너편 낯익은 성당이 보이는데, 언뜻 보아선 서울의 명동 성당과 닮았다. 계산 성당이다. 설계는 프랑스의 로베르 신부가 했지만, 건립에 명동 성당 공사를 담당했던 중국인이 참가했다. 이 건물은 서울과 평양에 이어 세 번째로 세워진 고딕양식 성당으로, 당시 대구에 처음 세워진 서양식 건물이다. 현존하는 1900년대의 성당건축물로 유일한 것이어서 중요한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 이상화 고택(古宅)

이상화는 유명한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지은 대구출신 시인으로, 일제 강점기 민족의 아픔과 향토적 세계를 시로 노래했다. 현재 고택은 고층빌딩과 주택 사이에 위치했는데, 1999년 이상화 고택을 보존하자는 100만인 서명운동을 시작으로 현 모습을 지킬 수 있게 된 사례를 가졌다.

대구 계산동 2가 84번지에 위치한 고택은 항일문학가로 잘 알려진 이상화(李相和, 1901 ~1943) 시인이 1939년부터 작고하던 1943년까지 거하던 곳이다.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광복을 위해 저항 정신의 횃불을 밝힌 시인 이상화선생의 시향이 남아있는 곳이다.

이상화 고택은 암울한 시대를 살면서 일제에 저항한 민족시인 이상화의 정신을 기리고 후손에게 선생의 드높은 우국정신과 문학적 업적을 계승하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된다.

● 서상돈 고택(古宅)

서상돈(徐相敦, 1851~1913)은 조선 말기의 기업인이자 관료였고 민족 독립운동가였다. 대구에서 지물 행상과 포목상으로 성공한 인물로, 정부의 검세관이 되어 조세곡을 관리하기도 하였다. 1907년 정부가 일본에 빚을 많이 져 국권을 상실한다고 생각하여 대구 광문사 사장인 김광제와 함께 금연으로 나라의 빚을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을 벌였다, 대구시는 계산동 이상화 고택 옆에 있었던 서상돈의 생가를 복원하였고 국채보상공원을 조성하고 동상을 세우는 등 그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있다.

● 방천시장 '김광석다시그리기길'

방천시장에서는 한 시절을 풍미했던 가수 고 김광석을 만날 수 있다. 시장 어귀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져있다. 다리를 비스듬히 꼬고 앉아서 기타를 치고 있는 모습이 마치 살아 있는 것만 같다.

김광석의 동상이 이곳에 서 있는 까닭은 그가 이곳 대봉동에서 태어났기 때문. 애잔하고 서정적인 노랫말과 폭발적인 가창력으로 한국 모던포크의 계승자로 주목받던 그는 1996년 1월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쓸쓸하게 세상을 저버렸지만 그의 팬들은 아직도 그를 잊지 않고 이곳을 찾아 그를 그리워한다. 그의 동상부터 방천시장 동편 신천대로 둑길을 따라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이 100여 미터 남짓하게 이어지는데, 김광석의 얼굴과 노래 가사 등을 주제로 다양한 벽화들이 그려져 있다.

● 대구 약령시(大邱藥令市)

350여 년의 전통인 약령시의 역사와 약전골목의 유래를 한눈에 볼 수 있고 체험할 수 있는 전시문화 공간인 약령시 한의약 박물관은 1993년 공식 개장하였다.

박물관 3층에는 약령시의 유래와 발전과정 등을 그래픽과 애니메이션으로 4개 국어로 소개하고 각종 희귀 한약재를 비롯해 동의보감 등 한의서, 약작두 등의 한방 관련용품 300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1910년대 약전골목과 약국의 모습 100여 년 전 주막과 객주들모습. 약초를 손질하고, 달이고 진맥하는 모습, 약이 되는 동물과 광물, 약초에 대한 이야기와 채취와 보관과정, 잎, 뿌리 열매를 사용하는 약재의 종류, 약초를 캐고 담고 무게를 다는 저울 달이는 도구 등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전시되어 있다.

2층에는 어린이들이 한방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게임을 통한 한방 체험프로그램들이 많다. 체험프로그램은 도포입고 사진촬영하기, 한약재 썰기, 약첩(방향제)싸기, 한방족탕 체험, 한방차 무료시음코너를 운영한다. 문화관 입구에 대형약탕기가 눈길을 끌고 1층에는 전국유일의 (주)한약재 도매시장이 있다. 5일마다 장이 서며 전국의 한약재가 들어온다고 한다. 300여평의 부지에 각종 약초를 심고 지압보도 등 건강 휴게 시설인 약령공원이 있고 박물관 마당에서 전통놀이도 체험할 수 있다.

/ Daum 백과 발췌

* 대구광역시 중구 <대구약령시문화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