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보이던 염소가 한 마리도 안 보인다. 아기를 가져 배가 남산이 된 염소, 귀염둥이를 데리고 다니는 염소, 맴맴 돌다가 목줄에 감긴 염소, 우두커니 먼산바라기를 하는 수행자 염소, 뺀질뺀질한 양아치 염소, 안 가겠다고 삐대고(버티고) 앉은 떼쟁이 염소, 입삭낭구(잎사귀)를 죄다 뜯어먹고 배터지기 직전의 부잣집 염소, 졸다가 경운기 소리에 자망해서 뒤로 나자빠진 염소. 뿔자랑을 하며 깔짝깔짝 싸움을 거는 염소. 세상 뭐 있어, 디룩디룩 살찐 염소, 멀뚱멀뚱 똥개를 쳐다보는 염소, 부잡스러운 염소, 시부렁거리는 염소, 암컷을 쫓아댕기는 염소, 명주 솜털만큼 보드랍고 얌전하니 시말스러운 염소. 흑사탕처럼 검은 똥을 뻐르적뻐르적 싸놓은 염소…. 갑자기 하얗고 검은 염소들이 보고 싶어라. 내년 봄까지 기다려야 하나.
김성동의 소설 <염소>는 여덟 달을 살다간 흑염소 빼빼의 이야기. 노랑내 난다고 소금을 한 주먹 집어먹게 한 뒤 칼잡이는 빼빼에게 덤벼들고, 순간 빼빼는 지나온 시간들을 떠올린다. 충남 보령 솔미마을. 입만 열면 “떠야지, 떠야 혀”라고 말하는 주민들 속에서 어디론가 떠나고팠던 빼빼. “편지해!”라는 청삽살이의 배웅을 받으며 장으로 끌려갔다. 중간 상인을 들이받고 잠시 자유를 얻기도 했다.
“내가 사람의 손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몸을 움직였을 때, 나는 이미 힘없이 끌려만 다니던 어제의 염소가 아니라는 것을….”
빨강 에나멜 구두나 또각거리는 도심에선 볼 수 없는 염소를 만나러 북인도나 중동땅에 가고는 했다. 파키스탄에선 염소가 사람만큼 흔하다. 염소들이 맞아준 검은 밤엔 로티빵을 씹으며 염소젖을 먹어보기도 했다.
눈앞에서 사라지자 문득 보고 싶은 무엇들이 생기질 않던가. 하지만 다시 봄이 되어도 보기 싫은 얼굴들이 있다. 옥에 갇힌 적폐의 얼굴들. 그들을 누구 맘대로 석방 운운인가. 잠시 한뎃바람을 피하자는 겨울 염소도 아니고 말이다. 염소는 악마의 얼굴을 닮았다지만 진짜는 다른 데 있다.
임의진 목사·시인ㅣ경향신문 2018.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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