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사한 유리창 [임의진의 시골편지] (daum.net)
겨울엔 고구마를 간식 삼아 자주 먹는다. 난롯불에 구운 고구마는 혀에 닿자마자 녹는다. 나도 먹고 강아지도 먹이고 하면서 둘이 볼살이 통통 올랐다. 고구마를 먹으면서 창문 밖을 똑같이 바라본다. 하루 일과의 꽤 많은 시간을 창문 밖 구경에다 쓴다. 신문 방송에서 보는 다사다난한 바깥 세계와는 다른 ‘내면과 자연의 세계’를 마주하는 유리창. 나란한 신발과 얼멍얼멍 자란 수풀과 아물거리는 별빛이 내다보이는 창가는 어쩌면 문명과 다른 세계와의 조우다.
한 기자가 수도자에게 찾아와 물었다. “무슨 기도를 바치시나요?” “저는 주로 말하기보다는 듣습니다.” “정말이오? 그럼 하느님은 무슨 말씀을 들려주시나요?” “그런데 그분도 듣는 걸 좋아하셔서 별로 말씀이 없으세요.” 이 동네 분들은 사투리가 입에 붙어서 하늘에 ‘동시통역사’가 있어야지 안 그러면 말이 안 통해서라도 피차 침묵. 사투리 덕분에 손주들 맡아보는 수고도 덜게 되니 더욱 사투리를 쓰는 듯싶다. 손주들 맡기 싫으면 무조건 사투리로 말을 하고, 밥을 씹어서 입에다 넣어주고, 말도 못 배운 아이에게 화투를 가르치고, 방바닥 닦는 걸레로 입이나 얼굴을 닦아주면 애 엄마 아빠가 펄쩍 뛰면서 아이를 냉큼 데리고 가버린다지. 그러면 이제 나름 재미나고 고요한 여생을 마음껏 즐기면 된다. 고구마를 삶는 집집마다 연기가 송송 올라온다. 주민들은 고구마를 먹으면서 나처럼 창문 밖을 오래도록 구경하고 계실 것이다.
나는 세상을 여행하면서 많은 숙소를 옮겨 다녔다. 카운터에서 똑같은 부탁을 반복하는데, 바깥 풍경이 좋은 방을 달라는 말. 커튼을 열었을 때 햇볕이 드는 방이었으면 좋겠고 나무 한 그루쯤 보이길 바란다. 요새 가난한 청춘들은 집이 아니라 방을 전전하고, 그 단칸방도 월세가 지독하여 좁아터진 방만큼 숨 막히는 세월이라지. 사람에게는 창문이 필요하고, 마당이 필요하고, 나무와 새와 별과 구름과 햇살과 바람이 꼭 필요하다. 그래야 사람이 사람으로 완성될 수 있다. 사람이 사람으로 살 수 없는 세상은 당장 바꿔내야 한다. 모든 이들이 근사한 창문을 한 개씩 가지는 세상. 오버 더 레인보, 창문 너머 무지개가 뜨고 행복은 거기 있으니까.
임의진 | 목사·시인ㅣ경향신문 2019.01.02
/ 2022.07.30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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