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임의진의 시골편지] (daum.net)
밤새 목화꽃처럼 탐스러운 눈이 소르르 내렸다. 개울가 수렁논배미도 딱딱하게 얼어붙어 고두밥만큼 부풀었다. 성크름한 바람이 불긴 하지만 햇살이 따뜻해설랑 눈은 아침나절에 녹아버렸다. 마당에 있는 바위옹두라지에 개가 앉아 털을 고르면서 해바라기를 즐겼다. 개처럼 사람들도 가만히 앉아 비루하고 추저분한 인생을 추스를 짬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염치도 부끄러움도 없이 다시 정계에 복귀하거나, 얼굴을 뺀질댄다거나, 괘꽝스러운 망언을 해대지는 않을 것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런 글귀가 있다. “자아를 성찰함으로써, 내면의 침잠으로부터 시가 나오게 되면 당신은 그 시를 들고나가 누구에게 어떠냐 물어보지 않게 되리라. 문예지에 작품을 보내 관심이나 평가를 요구하지도 않게 된다. 이미 당신의 글은 자랑스럽고 자연스러운 재화 즉 자기 생명의 한 편린, 한 생명의 노래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내적 필연성에서 이루어진 모든 예술작품은 위대하다. 내가 드릴 수 있는 충고는 한 가지뿐. 자기 자신을 살아가며 당신 생명의 밑천으로 노래하라. 심연의 고독 속에 파고들라. 그러다보면 허깨비 시인이 되겠다는 생각을 멈추게 될지도 모른다. 시를 쓰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을까? 보통사람 가운데 한 명인 자기로의 복귀도 나쁜 건 아니다. 차라리 그 길이 시인의 길인지도 모른다.”
평온한 바다에선 뱃사람이 배울 게 없다. 일상이 힘들면 힘든 대로, 이웃의 아픔과 눈물을 헤아리는 연민으로 글감을 삼으면 된다. 릴케는 더 말하기를 “글은 최종적으로 쓰는 것이다”라고 했다. 매일 매 순간 습관처럼 쓰지 않으면 안된다. 미세먼지로 바깥출입이 어려운 때, 책을 더 읽고 글을 더 써본다면 좋겠다. 영화 <말모이>는 한글학회가 걸어온 길을 재미있게 담고 있다. 영화를 통해 엉덩이와 궁둥이 차이를 처음 알았다. 엉덩이와 궁둥이를 떡하니 붙이고서 우리말 신간을 한 권이라도 더 읽어야지 욕심 먹었다.
임의진 목사·시인ㅣ경향신문 2019.01.16
/ 2022.07.30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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