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기의 과학카페] 소음의 두 얼굴 (daum.net)
국민 정서로는 파렴치한 중범죄인데도 형량이 의외로 가볍고 심지어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의 인권을 더 배려하는 듯한 일들을 뉴스에서 접하는 일이 잦다. 이럴 때마다 ‘도대체 법은 누구를 위해 있는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의문이 든다.
임기를 마치고 낙향한 전직 대통령을 쫓아가 두 달째 시위를 벌이고 있는 장면 역시 비슷한 맥락이다. 한적한 시골에서 조용하게 살던 주민들은 끊임없는 소음에 고통을 호소하고 있지만 놀랍게도 뾰족한 방법이 없다고 한다. 법적으로 정한 한도를 넘지 않는 선에서 교묘하게 소음을 내고 있어 경찰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음에도 법의 기준이 이렇게 느슨한 건 소음이 심신에 미치는 영향을 과소평가한 결과가 아닐까. 철길이나 공항 옆처럼 엄청난 소음으로 청각에 손상을 미칠 정도의 소음만 문제가 되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 특정 소리가 통증을 유발할 수도 있는데, 특히 편두통이 있는 사람은 이런 일이 흔해 ‘소리공포증(phonophobia)’이라는 증상을 겪기도 한다.
심지어 음악조차 듣기 싫은 걸 억지로 듣게 되면 만성 통증이 있는 사람의 경우 통증이 더 심해진다는 관찰 결과도 있다. 나 역시 버스나 택시에서 운전사가 크게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듣기 싫은 말이나 음악이 계속 나와 목적지에 내릴 때까지 괴로웠던 적이 몇 번 있다.
전직 대통령 사저 주변 시위를 계기로 소리가 심신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밝힌 연구 결과들을 제대로 반영한 소음 기준을 새로 만들어 하루빨리 관련 법을 개정하기를 바란다. 아울러 소리의 과학에 대해 좀 더 관심을 보이자는 취지에서 우리가 소리에 얼마나 민감한 존재인가를 새삼 생각하게 하는 최근 나온 흥미로운 논문을 소개한다.
5데시벨 높을 때만 진통 효과
국제학술지 ‘사이언스’는 8일 소리의 세기인 음량에 따라 뇌가 얼마나 다르게 반응하는가를 보여주는 놀라운 연구 결과가 실렸다. 연구진은 배경음보다 약간 큰 소리가 통증을 덜 느끼게 한다는 동물실험 결과로 여기에 관여하는 신경 네트워크도 밝혔다.
중국과기대 마취학·통증의학과 등 중국의 공동연구자들은 소리의 질과 세기가 통증을 지각하는데 얼마나 영향을 주는가를 동물실험을 통해 알아보기로 했다. 협화음(클래식 음악)과 불협화음, 백색소음을 배경음 대비 5, 10, 15, 20데시벨(dB) 높은 음량으로 들려준 뒤 통증 자극에 대한 행동 반응을 관찰했다. dB은 음량의 상용로그에 10을 곱한 값으로 10데시벨이 높으면 음량이 10배다. 따라서 배경소음 대비 5, 10, 15, 20dB 높다는 건 음량으로 3.2배, 10배, 32배, 100배라는 뜻이다.
그 결과 놀랍게도 소리의 성격이 아니라 음량이 통증 지각에 영향을 미쳤다. 협화음이냐 불혐화음이나 백색소음이냐에 관계없이 배경소음보다 5데시벨 높을 때 통증을 덜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보다 큰 음량을 들려줬을 때는 진통 효과가 사라졌다. 이 경우 소음의 긍정적인 측면이지만 음량이 조금만 올라가도 효과가 사라진다는 것 역시 중요한 발견이다. 사람뿐 아니라 동물도 소리에 민감한 존재라는 말이다.
연구자들은 다양한 분석기법을 동원해 소리 진통 효과에 관여하는 신경 네트워크를 밝혀냈다. 소리 자극을 처리해 지각한 청각피질이 그 정보를 시상의 특정 영역으로 보내는 활동이 억제되면서 통증 감도가 떨어졌던 것이다. 뇌의 중심에 있는 시상은 여러 감각 정보가 모여드는 중계기지로 알려져 있다. 청각 정보 역시 시상의 내측슬상핵을 거쳐 청각피질로 들어간다.
그런데 청각피질이 가공한 정보를 다시 시상의 후위핵(PO)과 배측후위핵(VP)으로 보낸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PO와 VP는 척수에서 통증 신호를 받아 체감각피질로 전달하는 중계기지다. 청각피질에서 해석한 소리 정보가 통증 지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번 연구 결과에 따르면 PO와 VP가 통증 정보를 제대로 중계하려면 청각피질에서 적절한 소리 정보가 들어와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평소 주위 소리보다 약간 더 큰 소리가 들리면 청각피질이 PO와 VP로 정보를 보내지 않고 그 결과 통증 정보 중계가 억제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왜 주위보다 ‘약간’ 큰 소리가 뜬금없이 진통 효과를 내는 것일까.
논문에서는 이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같은 호에 실린 해설에서 독일 하이델베르크 약학연구소 로히니 쿠너 교수는 흥미로운 가설을 제안했다. 진화의 관점에서 소리 크기의 미묘한 변화는 나를 노리는 적이 다가온다는 신호이고 따라서 이에 대응하기 위해 뇌의 회로는 PO와 VP에 소리 정보를 보내지 않음으로써 통증을 덜 느끼게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스트레스나 불안과는 무관
한편 소리 진통 효과가 소리의 성격과는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실험 결과도 있다. 배경음보다 5데시벨 높은 소리를 들려주더라도 호르몬 수치 등 스트레스 관련 지표에는 변화가 없었다. 이는 음악 또는 소리의 진통 효과가 스트레스 완화와 불안 감소 때문이라는 음악치료 분야의 기존 해석이 불완전함을 뜻한다. 적절한 음량의 소리를 들려주면 이런 효과와 시너지로 작용해 더 강력한 진통 효과를 볼 수 있다는 말이다.
흥미롭게도 1960년 이미 이런 관찰을 담은 논문이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에 실린 적이 있다. 당시 연구자들은 치과 치료를 받은 환자들을 대상으로 헤드폰을 낀 채 원할 때 음량을 조절하며 음악 또는 백색소음을 들을 수 있게 했다. 그 결과 65%가 치료 중 통증을 덜 느꼈다고 답했다. 놀라운 사실은 음악보다 오히려 백색소음을 들었을 때 진통 효과가 컸다고 보고한 사람이 더 많았다는 것이다.
생쥐를 대상으로 한 이번 실험 결과가 사람에게서 어느 정도 재현될지는 미지수이지만 적절한 음량의 소리를 잘 활용하면 뇌의 다양한 경로를 통해 상당한 진통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층간소음이나 시위 소음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소리는 양날의 검이 될 수도 있으므로 실제 임상에 적용하려면 최적화 조건을 찾는 많은 연구가 선행돼야 할 것이다.
※ 필자소개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kangsukki@gmail.com).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고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9월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직접 쓴 책으로 《강석기의 과학카페》(1~7권),《생명과학의 기원을 찾아서》가 있다. 번역서로는 《반물질》, 《가슴이야기》, 《프루프: 술의 과학》을 썼다
강석기 과학칼럼니스트 ㅣ동아사이언스 2022.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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