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수장마가 지나가더니 한 주에 한 개씩 태풍이 몰려온다. 극장식 일기예보. 대형 동그라미가 비닐하우스와 낡은 함석 처마, 그리고 논밭을 정조준한다. 태풍아 우리 동네로는 오지마~ 백팔배를 올리는데, 백팔배는 ‘뱃살빼’의 동음이어.
죄 없이 배고프고 뱃살이 쑥 빠지는 계절. 문밖은 온통 손길을 기다리는 일감들이다. 국화꽃이라도 볼라치면 꽃밭을 가꿔야 한다. 또 극성맞은 파리·모기에 괴롭다. 가을 태풍에 다들 날아가 버리면 좋겠다.
잠자리와 벌과 나비, 그리고 파리가 서로 자랑질. 잠자리는 나처럼 멋지게 날 수 있어? 나비는 나처럼 우아하게 날 수 있어? 벌은 나처럼 날렵하게 날 수 있어? 그러자 파리가 배를 쥐고 웃더란다. “이 모자란 것들아. 니들은 나처럼 똥 먹을 수 있어?” 모두 졌다. 파리·모기가 없는 가을은 바깥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은 촌사람들에게 고마운 계절이다.
악머구리로 시끄럽던 세상이 고요해지는 순간. 빈 들과 빈 가지. 단감을 다 수확하고 까치밥만 남은 감나무. ‘빈 들에 마른 풀같이’ 찬송가를 부르며 일을 하는 할머니들. 성크름한 날씨에도 늦은 시간까지 옴나위도 없이 꽉 찬 밭일들. 저녁이 파르께하게 찾아오면 밭고랑 백팔배를 멈추고 귀가들을 한다. 물끄럼말끄럼 쳐다보던 강아지, 그제야 밥먹게 생겼다며 좋아라 앞장을 선다. 파리·모기들 쫓는 강아지의 귀가 팔랑거린다. 사람귀도 강아지처럼 발달했으면 어쨌을까. 파리·모기도 먹고살려고 애를 쓰는 것이다. 사람도 먹고살자고 하는 일들이다.
대전 사는 스님 동생이 종종 묵어가곤 한다. 엊그제도 불쑥 찾아와 계란말이도 하고 국도 끓여서 밥을 차려주더라. 반찬 없는 냉장고 속을 보더니 “형님은 요새 살림을 허시요 마시요?” 핀잔. 그래도 집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살아 파리·모기는 없다며 칭찬도 조금. “시끄럽게 굴지 말고 조용히 있다가 가!” 그랬더니 정말 조용히 있다가 떠났다. 차비라도 줄 걸 보내놓고 마음이 쓰였다. 미안해. 파리는 용서를 싹싹 빈다. 파리는 염치도 있고 불심도 있나봐.
임의진 목사·시인ㅣ경향신문 2019.10.02
/ 2022.07.13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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