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참 간사해서 언제 더웠는지 기억조차 없다. 더위를 정녕 ‘보’내기 싫으면 가위와 바위를 내면 돼. 훗~. 어디를 쳐다보나 가을가을 한다. 은행잎은 노란리본을 흔들기 시작. 자연은 제 목소리를 분명히 낸다. 입이 달린 모든 생명은 제 소리를 내고 산다. “우리 시대 전환기의 최대 비극은 악한 사람들이 내뱉는 거친 아우성이 아니라 오히려 선한 사람들의 소름끼치는 침묵이다.” 마틴 루서 킹 목사의 말을 기억한다. 거친 아우성이나 침묵은 가을의 진중하면서도 분명한 표현력과는 딴판. 인간은 자연에게서 배울 게 많다.
올 들어 처음 군불을 때고 누웠다. 따뜻하니 좋구나. 좋을 일도 참 많다고 그러시겠다. 무엇보다 손발이 따뜻한 게 참 좋아. 나는 얼음송송 아이스 아메리카노, ‘아아’는 잘 안 마신다. 한여름에도 ‘따아’를 마신다. 후후 불어마시면 속이 데워져서 그런지 바깥 더위를 잊게 된다. 추운 겨울에 어찌 살까 약간 걱정이 드네. 기십년 겨울나기에 이력이 붙기는 했으나 추위는 정말 질색이야. 부지런히 호롱불을 걸어두고 군불을 때고 해야지 별 수 있는가.
노처녀가 시집을 간 첫날밤. 신랑 뺨을 냅다 후려갈겼다지. “아니 왜 그래요 갑자기?” “야 이눔의 자식아. 왜 이제야 나타나서 나를 감동 주는 겨?” 밀어뜨려 이불 속으로 쏘옥.
더운 날에는 담양대나무로 만든 죽부인이 있었으나 추운 날에는 부인 가출 실종이렷다. “해 저무는 들녘 하늘가 외딴 곳에 호롱불 밝히어둔 오두막 있어 노을 저 건너의 별들의 노랫소리 밤새도록 들리는 그곳에 가려네. 이리로 또 저리로 비켜가는 그 사이에 열릴 듯 스쳐가는 그 사이 따라. 해 저무는 들녘 밤과 낮 사이에 이리로 또 저리로 비켜가는 그 사이에….” 김민기 아저씨의 ‘그 사이’ 밤과 낮 그 사이에 시방 서있다. 더위와 추위 그 사이에 서 있다. 그러다가 점차 기울어진다. 밤으로 그리고 추위에게로. 당신과 함께했던 밤과 추위를 생각하면 온몸 가득 온기가 솟아오른다. 그 기억으로 충분해. 이 세상의 밤과 추위쯤.
임의진 목사·시인ㅣ경향신문 2019.10.23
/ 2022.07.13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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