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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고땡의 식물 이야기] 무수한 실패 끝에.. 나도 잘 키울 수 있구나

푸레택 2022. 7. 9. 13:04

무수한 실패 끝에.. 나도 잘 키울 수 있구나 (daum.net)

 

무수한 실패 끝에.. 나도 잘 키울 수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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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고땡의 식물 이야기] 향기롭진 않지만 제법 괜찮은 녀석, 제라늄 / 김이진 기자

제라늄은 어린 시절 엄마가 키우던 식물이었다. 시골집 마당 한켠에 놓여있던 제라늄은 붉은색 꽃을 피웠고, 잎에서는 지독한 냄새가 났다. 그 냄새가 싫으면서도 부러 손으로 비비적거려 냄새를 맡아보고 얼굴을 찡그리곤 했다. 잎은 싱그러운 녹색이 아니라 얼룩덜룩한 무늬가 있고 뻣뻣했다. 어린 나에게는 냄새 고약한 그다지 볼품 없는 화분이었다. 그래서일까. 오랫동안 내게 제라늄은 촌스럽다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유럽의 풍경을 보면 주택에서 정원을 가꾸는 일상이 자연스럽고, 특히 담장이나 창가에 화분을 키우는 모습이 흔하다. 이런 공간에는 걸이 형태로 화분을 매달아 키우는 경우가 많은데, 자주 볼 수 있는 식물 중 하나가 제라늄이다.


빈티지한 토분에 심어 담장에 턱 하니 걸린 제라늄을 보면 어린 시절에 봤던 그 식물이 맞나 싶을 정도로 평화롭고 멋스럽다. 세월의 켜가 쌓인 유럽 주택과 특유의 문화 분위기가 빚어낸 착시 효과인지 모르겠지만, 그 속에 스며든 제라늄의 존재감은 특별하게 와 닿았다.

나도 한번 키워보기로 했다. 제라늄 자체가 특별히 아름답지 않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고, 그냥 내가 사는 공간에 함께하는 정도로 만족하자는 마음이었다. 처음 키울 때는 어린 잎이 오밀조밀 달린 작은 포트 화분이었다. 꽃대가 채 올라오지 않아 어떤 색깔의 꽃을 피우는지 몰랐다. 햇빛이 잘 드는 베란다에 놓아 두고 가끔 물을 주면서 보살폈다. 포트가 초라해 보여 제대로 된 화분으로 옮겨 주었고, 가끔씩 분갈이도 했다.

어느날 보니 꽃대가 쑤욱 고개를 내밀더니 꽃봉오리가 맺혔다. 엷은 분홍색 꽃이 피었다. 작은 꽃들이 모여 덩어리꽃을 이룬다. 불쑥불쑥 그렇게 꽃을 보여주었다. 좋았다. 그 모습이 예뻐 코랄핑크 꽃을 피우는 제라늄을 하나 더 들였다.

투박한 토분에 심어 놓았더니 둘이 알아서 주거니 받거니 세월의 멋을 더해 간다. 토분 표면에는 허옇게 일어나는 백화 현상이 오고, 이끼도 조금씩 끼고, 제라늄은 제멋대로 줄기가 뻗어간다. 햇볕을 쫓아가면서 줄기가 자라기 때문에 순식간에 줄기가 휘기도 한다. 적당하게 방향을 돌려줘야 균형을 잡을 수 있다. 안타깝게도 내가 키우는 제라늄은 얼기설기 줄기가 얽혀들었다.

몇 해 동안은 봄이나 가을 무렵에 꽃을 피우더니 햇볕이 잘 드는 남향집으로 이사온 뒤로는 사계절 내내 쉬지 않고 꽃대를 올려댄다. 제라늄은 건조한 것을 좋아하는 편이라 습한 여름에는 휴면기에 들어간다. 이 시기에는 꽃을 보기 어렵다. 그런데 우리집 제라늄은 여름이고 겨울이고 꽃이 피고 진다. 겨울에 집에 놀러온 친구는 활짝 핀 제라늄 꽃을 발견하곤 "어머, 이렇게 추운데 꽃 핀 거 아니지? 저거 조화지?" 물었다.

제라늄은 무던하게 잘 살아가는 식물이다. 한마디로 맷집이 좋다. 햇빛이 좀 모자라거나 강하거나, 습하거나 건조해도, 바람이 좀 덜 통해도, '에이 뭐 이왕 이곳에 자리 잡았으니 잘 버텨보자' 이런 마인드로 묵묵히 살아간다.

적응력이 뛰어난 식물답게 줄기꽂이 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반듯한 줄기를 깨끗하게 잘라내 흙에 꽂은 뒤 그늘에 놓아두면 천천히 주변을 살피면서 슬그머니 자리를 잡는다. 며칠이 지나면 줄기에 빳빳하게 힘이 들어가고, 새 잎이 돋아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게 제라늄과 함께한 세월이 6년쯤 흘렀다. 그야말로 반려식물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초라했던 녀석은 줄기가 단단하게 목질화되었고 풍채가 위풍당당하다. 어린 시절 고약하게 느껴졌던 냄새도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제서야 엄마의 마음을 알 것 같다. 가난한 시골집에서 강팍한 살림을 꾸리던 엄마가 오일장이 열리는 날에 큰 맘 먹고 화분을 사기도 하고, 동네 이웃집에서 줄기를 얻어와 식물을 키우던 모습이 떠오른다. 어린 내 눈에는 그깟 손가락만한 식물 줄기 몇 개 얻어오면서 연신 고마워하고 신나하는 모습이 없어 보이기도 하고 의아했었다. 엄마에게는 이 식물들이 작은 위로가 되어주는 반려식물이었겠구나.

제법 괜찮은 녀석이다. 옆에 두면서 지내 보니 진국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무수히 식물 기르기에 실패하고 자책을 하던 내가 제라늄을 키우면서 마음의 상처를 보듬을 수 있었다. 나도 잘 키울 수 있구나! 사실은 내가 잘한 건 별로 없고 제라늄이 생명 근성이 강하고, 좋은 환경을 만난 덕분이지만.

환경에 까다로운 식물이 있다. 희소성 있는 식물이 대부분 키우는 게 어렵다. 작은 것에도 예민하고 카탈을 부리는데 물 주는 주기는 세심하게 살펴야 하고, 분갈이를 하면 한번씩 앓아 눕기도 하고, 꽃 피는 기간은 아주 짧게 제한하는 녀석들이다. 비싸게 군다. 대신 이런 식물들은 신경 쓰이게 하는 만큼 아주 예쁜 꽃을 피워 심미적인 만족감을 채워준다.

나는 그냥 제라늄의 덤덤함을 좋아할란다. 10년이 지나면 어떤 모습일까. 그때도 내 옆에 있어 줄까. 정지용의 시 <향수>에 나오는 구절처럼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처럼 되어 있을까.

김이진 기자ㅣ오마이뉴스 2019.04.24

/ 2022.07.09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