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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철의 꽃이야기] 수국 같은 여인, 조국과 일본인 동시에 사랑했다가..

푸레택 2022. 7. 7. 12:00

[김민철의 꽃이야기] 수국 같은 여인, 조국과 일본인 동시에 사랑했다가.. (daum.net)

 

[김민철의 꽃이야기] 수국 같은 여인, 조국과 일본인 동시에 사랑했다가..

박경리 소설 ‘토지’에는 많은 인물이 등장하지만 독립 운동가이면서 일본인 오가다를 사랑한 유인실이라는 인물은 특히 인상적이다. 식민지 조선의 신여성으로, 조국과 일본인을 함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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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소설 ‘토지’에는 많은 인물이 등장하지만 독립 운동가이면서 일본인 오가다를 사랑한 유인실이라는 인물은 특히 인상적이다. 식민지 조선의 신여성으로, 조국과 일본인을 함께 사랑하다 큰 갈등을 겪는 여인이다. 서희, 임명희와 함께 작가가 빼어난 미인으로 묘사한 여성 중 하나이기도 하다. 작가는 유인실을 특히 눈이 예뻐 ‘이지적인 아름다움’이 있는 여인으로 묘사했다.

유인실은 일본 유학 중 관동대지진 때 오가다와 함께 조선인들을 구했고 귀국 후 일제가 얽은 계명회라는 조직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다. 서희의 남편 길상과 오가다도 연루된 조직 사건이었다. 유인실은 일본 여자대학을 졸업한 수재이지만 계명회 사건과 오가다와 관계가 알려지면서 야간 학교의 교사로 일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일본인과 사귀는 조선 여성에 대한 사회의 시선이 그만큼 엄격했기 때문이다.

유인실 자신도 일본인과 사랑에 큰 갈등을 느끼는 것으로 나와 있다. 그래서 오가다와 하룻밤을 보낸 뒤에 ‘생명보다 중한 것을 주었다’고 표현했다. ‘그것은 단순히 여자의 순결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조국에 헌신할 것을 맹서한 여자가 그 조국에 반역 행위를 했다는 뜻이 더욱 깊’었다. 유인실은 오가다의 아이를 가졌을 때 동경에 사는 지인 조찬하를 찾아가 아이를 맡아달라고 했다. 조찬하가 임신한 유인실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러니까 유인실이 조국과 일본인 연인 사이에서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조찬하는 유인실이 수국 같다고 느낀다.

<”내일이라도, 제가 한 사람 보내드릴까요?”

“아닙니다. 아직은, 혼자 있고 싶으니까요.”

“식사 준비까지 하시려면… 그리고 방도 어디 아래층으로 옮기든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발.”

인실은 순간 애원하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사양이 아닌, 제발 날 가만히 내버려두어 달라는 부탁인 것이었다. 일어서야 마땅한 것인데 찬하는 몸이 붙은 것처럼 일어설 수가 없었다. 혼자 있고 싶어 하는 인실이, 찬하 역시 숨이 막힐 것 같은 장소에서 피해 달아나고 싶었는데… 역시 연민이었다. 그것은 찬하 가슴 밑바닥에서 우러나는 연민 때문이었다. 찬하는 지금 자기집 뜰에 한창인 수국(水菊) 생각을 하고 있었다. 축축한 음지에서 흐드러지게 핀 수국, 병자 방에는 꽂지 않는다는 그 수국이 녹색으로 변했을 때, 찬하는 히비야 공원에서 녹색의 여인으로 착각한 인실의 모습을 연상했던 것이다.>

구례수목원에 활짝 핀 산수국. / 뉴시스

이후 유인실은 오가다 아들을 출산해 조찬하에게 맡기며 아이는 오가다의 자식도, 유인실 자신의 자식도 아닌 이 시대가 낳은 생명일 뿐이라며 그 아이는 일본에 있어야 한다고 했다. 아이를 맡긴 유인실은 조국을 배신했다는 죄의식을 갖고 독립운동을 하러 만주로 떠나는 것으로 나오고 있다.

‘토지’를 읽은 다음부터 수국을 보면 유인실이 떠오르는 것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마침 요즘이 수국이 피는 계절이다. 요즘엔 이르면 3~4월에도 피는 수국도 볼 수 있지만,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수국은 물을 좋아하고 피는 시기도 6~7월 장마철이 제철이다.

수국.

수국은 원산지가 중국인데 유럽·일본 사람들이 가져다 다양하게 개량해 오늘날 우리가 보는 원예품종 수국으로 만들었다. 멀리서 보면 큰 꽃 같지만, 사실은 작은 꽃송이들이 동그랗게 모여 큰 공 모양을 이룬 것이다. 꽃색은 토양의 산성농도 등에 따라 여러 가지로 변한다. 중성이면 하얀색, 산성이면 청보라색, 알칼리성이면 연분홍색으로 변하는 식이다. 그래서 토양에 첨가제를 넣어 꽃 색깔을 원하는대로 바꿀 수 있다. ‘토지’에 ‘수국이 녹색으로 변했을 때’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꽃이 시든 다음 꽃잎이 녹색으로 변하는 것을 묘사한 것 같다.

수국이 필 즈음 숲속에서는, 요즘은 공원 화단에서도 산수국이 피어난다. 산수국은 가장자리에 곤충을 부르는 역할을 하는 무성화, 안쪽에 실제 꽃가루받이를 해서 열매를 맺는 유성화가 함께 피는 꽃이다. 야생의 산수국에서 유성화는 없애고 무성화만을 남겨 크고 화려하게 개량한 것이 바로 수국이다. 산수국과 수국의 관계와 똑같은 것이 백당나무와 불두화의 관계다. 백당나무도 전체 꽃덩이 가장자리에 무성화가 있고, 안쪽에 유성화가 있다. 백당나무에서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무성화만 남겨놓은 것이 불두화다.

산수국.

최근 서울 도심엔 수국 비슷하면서 하얀 꽃이 피는 작은 나무를 많이 심어 놓았다. 광화문 곳곳 도로를 좁히고 새 보도와 화단을 만들면서 화단에 많이 심은 것이 나무수국이다. 요즘 막 하얀 꽃봉오리가 맺혔고 일부 하얗게 핀 것도 있다. 나무수국은 수국·산수국과 같은 속(屬)이니 형제 식물이다.

광화문 나무수국.

소설 막판엔 ‘누가 뭐래도 인실은 조선의 딸이고 조선의 잔다르크’라는 표현이 나온다. 만주에 도착한 유인실은 자살 유혹을 받을 정도로 ‘바위 같은 죄의식’을 벗어나지 못하다 해란강 강가에서 중학생들이 부르는 ‘선구자’ 노래를 듣고 심기일전해 독립 운동에 뛰어드는 것으로 나오고 있다. 소설에 만주에서 유인실의 독립운동 활동이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는 점이 아쉽긴 하지만 식민지 조국과 피지배국 연인 사이에서 번민하다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당찬 여성임에는 틀림 없다. 그런 점에서 유인실은 수국 같은 여인이라기보다는 불꽃 같은 여인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잘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글=김민철 논설위원ㅣ조선일보 2022.06.28

/ 2022.07.07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