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 잠시 머물 때 우체국 박물관에 간 일이 있었는데, 거기서 전시된 우편마차를 보았다. 우편마차를 터는 도적떼도 있었다는데, 편지는 빼앗지 않는 나름의 룰이 있었다고 한다. 슈베르트 가곡 중에 ‘우편마차’란 노래가 있다. “우편마차 소리 듣고 내 마음 왜 이리 설레나. 내 임 소식을 날마다 기다렸다오. 편지는 그간 허사였소. 오늘 올까 내일 올까 기다릴 뿐. 왜 임의 편지 이다지도 안 오나. 날이면 날마다 기다렸다오. 산 너머 임 계신 마을 내 눈에 아롱진 그대 모습. 그리운 임 계신 마을 달려갈까나. 보고픈 심정 풀고파. 그대와 얘기하고파. 내 맘 하소연하고 싶구나. 쓰린 내 맘 쓰라린 내 하소연을 언제 말하리….” 편지란 어쩌면 하소연을 나누는 무엇일 게다. 요샌 문자나 e메일이 그 대신 역할을 하고 있지만, 또박또박 편지를 눌러쓰면서 그리고 지우개로 지우기도 하면서 쓰린 맘이 치유되기도 하고 그랬었지. 나만 해도 참 많은 편지를 친구들과 주고받았다. 침 바른 우표를 붙여 꾹꾹 누른 뒤 빨간 우체통에 집어넣고는 목 빠지게 답장을 기다렸지. 답이 없으면 없다고 또 편지를 썼다.
과거에 우체부는 단순 배달노동자가 아니었다. 고지서 때문에라도 집집마다 방문하여 안부를 묻고, 소식과 소문을 나눴다. 편지보다 소문이 더 빠른 이유는 우체부를 경유했기 때문일지 몰라. 우체부는 주민들의 친구였으며 타지로 떠난 이들과의 반가운 가교였다. 우체부가 몰던 스르렁 슬렁 자전거는 이제 오토바이로, 최근에는 경차나 미니 트럭으로까지 바뀌었다. 우리 동넨 아직까지 우체부 아저씨가 오토바이를 몰고 다니시는데, 등기우편조차 드문 세상이니 대면 기회도 없다. 가끔 친필 편지를 쓰는 사람은 나 같은 외계인뿐일 거야.
남북의 이산가족들은 서신 왕래도 없고, 여기다가 연락사무소도 폭파당하고, 우편마차는 발을 동동 구른다. 인연은 만남까지이며 나머지는 백에 백 노력이어야 한다.
임의진 목사·시인ㅣ경향신문 2022.06.18
/ 2022.06.30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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