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삶] 살아가는 이야기

[도봉역사문화탐방] (1) 도봉의 역사의 숨결과 문화의 향기를 느끼다

푸레택 2022. 6. 18. 20:19

[도봉역사문화탐방] (1) 도봉의 역사의 숨결과 문화의 향기를 느끼다

▲ 일시: 2022.06.18(토) 10:00~16:30

▲ 장소: 역사문화진지, 전형필 가옥 외
▲ 참가자: 한샘, 김샘, 기샘, 나 (신현 4인)

▲ 탐방 코스

도봉산역~서울창포원~역사문화진지~장갑차와 용치여지도 사진전~간송 전형필가옥~북한산둘레길 방학동길~왕실묘역길~사천목씨 제실~정의공주의 묘와 양효안공의 묘~연산군묘~방학동 은행나무~원당샘공원~은행나무집 봉평메밀~김수영문학관~최승호 시인의 문학강연~마을버스~창동역~마곡나루역~집으로


/ 2021.06.18(토) 사진 촬영

십여 년 전 중랑구 신현고등학교에서 함께 근무했던 친한 교육의 벗들이 모두 은퇴했다. 화려한 백수생활을 하는 우리들은 가끔씩 만나 산행을 하거나 둘레길을 걷었고 역사문화 탐방을 했었다. 그런데 코로나 팬데믹으로 한동안 만남을 갖지 못했는데 오늘 오랜만에 만나 도봉구 이곳저곳을 탐방하기로 했다. 아침 일찍 서둘러 집을 나섰다. 도봉산역에서 내려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특수식물원이자 생태공원으로 지정된 서울창포원이다.

서울창포원은 서울 강북의 끝자락인 도봉산과 수락산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노원구에 살 때는 서울창포원을 여러 차례 찾았었다. 식물원을 가득 메운 각양각색의 붓꽃과 노랑꽃창포 꽃을 감상했던 봄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이제 봄날은 가고 여름철로 접어든 탓일까, 그 많던 아름답던 붓꽃들은 한송이도 보이지 않고, 수양버들 늘어진 연못가에 꽃창포 한 송이가 홀로 제 세상을 만난 듯 활짝 피어 나를 반겨준다. 미역취와 미국미역취가 군락을 이루어 피어있는 모습이 참 평화스러워 보인다.
 

잎이 창포를 닮은 꽃창포,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야생화다.

서울창포원 옆에는 평화문화진지가 있다. 평화문화진지는 군사시설인 옛 대전차방호시설의 흔적들을 보존한 채 새롭게 재탄생한 문화예술 창작공간이다. 마당에는 장갑차 두 대와 독일에서 가져온 베를린 장벽이 전시되어 있다. 평화문화진지 전망대에 오르니 불암산과 수락산, 도봉산, 북한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7.4 남북공동성명 50주년 기념 엄상빈 사진전 ‘용치여지도’를 잠시 둘러보고 방학동에 위치한 전형필 가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전형필 가옥은 도봉산 원통사로 가는 등산로 초입에 위치하고 있다. 방학역에서 내려 먼 길 걸어 걸어 찾아갔는데, 아쉽게도 전형필 가옥은 우리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점심시간 휴관 중이었다. 고택 담장 밖에서 고즈넉한 고택의 풍광을 감상하며 아쉬움을 달랬다. 전형필 가옥은 100여년 역사를 지닌 건축적 가치와 간송 전형필의 자취가 남아 있는 전통가옥으로 평가받아 2012년 등록문화재 제521호에 등재되었다고 한다. 방학동의 간송 고택은 간송의 양아버지이자 큰아버지인 전명기 때 지은 전통 한옥으로 1890~1900년대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나는 혜화동 시절 보성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1989년 방이동으로 이전) 보성고등학교를 다닐 때 3년 간 간송재단에서 주는 간송장학금을 받았다. 또한 어린 시절 성북동 간송미술관 뜰에서 친구들과 뛰어놀며 도토리를 줍기도 했었다. 다음은 《다음백과》에 실린 보성고 관련 글이다. 탁지부 대신이었던 이용익은 1905년 고종으로부터 '보성(普成)'이라는 교명을 하사 받아 사립보성소학교와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를 먼저 개교하였다. 그리고 다음해인 1906년 사립보성중학교(현 보성중·고등학교)를 개교하였다. 1940년 재정난에 허덕이던 민족 사학 보성고를 간송 전형필 선생(간송재단)이 인수하였다. 보성(普成)이라는 학교명은 고종이 직접 하사한 것으로 ‘널리 사람다움(인간성)을 열어 이루게 한다’라는 뜻이다.(다음백과)

전형필 가옥 주위에 멧돼지를 조심하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다. 정의공주의 묘와 안맹담의 묘를 찾아 북한산 둘레길을 따라 걸었다. 정의공주(貞懿公主)는 세종의 둘째 딸로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세종이 중국에서 사온 안장을 손수 고치려고 칼로 깎다가 칼끝이 다리에 박히자 공주는 술을 만들고 난 지게미를 데워 상처에 붙여 부기가 빠져나가게 한 후 자석(指南鐵)을 가지고 부러진 칼끝을 빼어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성종은 공주의 건강이 좋지 않자 4남 안빈세를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명하였고, 왕비와 함께 친히 문병을 가기도 하였다. 정의공주는 1477년(성종 8)에 사망하였다.

정의공주는 총명하고 지혜로웠는데, 역산(曆算)에 능하였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에 변음(變音)과 토착(吐着)이 잘 풀리지 않아 여러 대군들과 공주에게 풀어보도록 하였는데, 공주가 이를 풀어 세종의 칭찬을 듣고 노비를 상으로 받았다고 한다. 또한 세종이 창제된 훈민정음을 공주에게 주어 민간에서 시험해 보도록 하자, 공주는 그 결과를 세종께 바쳤다고 전해진다. 정의공주는 불교에 조예가 있었다. 연창위 안맹담과 함께 세종 승하 후 소헌왕후와 세종의 명복을 기원하기 위해 문수사(文殊寺)를 중창하였다. 안맹담도 평소 불경을 읽고, 살생을 싫어하여 양잠(養蠶)도 하지 않는 등 공주 부부는 불교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다음백과)

정의공주의 묘 길 건너편에 있는 비운의 폐왕 연산군 묘로 향했다. 《다음백과》를 통해 폭군의 대명사인 연산군에 대해 알아보았다.

연산군은 무오사화, 갑자사화 등 두 차례의 사화를 일으켜 사림파를 비롯한 문신들을 대거 처형하고 언론 활동을 억압했으며, 당시 사대부들의 윤리관에 어긋나는 행동을 거듭하다가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인물이다. 덕분에 그는 대표적인 폭군으로 꼽힌다.


조선의 제10대 왕인 연산군은 성종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폐비 윤씨이다. 박종화의 소설 《금삼의 피》에는 그가 폭군이 된 이유를 모친 윤씨의 사사(賜死)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윤씨가 투기가 심했기 때문에 사사 당했다고도 하지만 윤씨보다 출신 가문이 좋은 후궁들이 예종의 비 한씨와 결탁해 윤씨를 배척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어쨌든 아들인 연산군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는 갑자사화라는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연산군의 폭정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성종이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사림파를 등용했다면, 연산군은 사림들의 주장보다는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한 인물이었다. 성종에게는 정실 소생으로 훗날 11대 왕이 된 중종이 있다. 그러나 연산군이 세자로 책봉될 때 중종은 아직 태어나기 전이었고, 폐비되었으나 윤씨는 정식 왕비였기에 연산군의 정통성에는 문제가 없었다. 1494년 연산군은 성종의 승하와 동시에 왕위에 올랐다. 연산군은 성종이 새로 맞은 정현왕후 윤씨가 어머니인 것으로 알고 성장했다.

연산군이 왕위에 올랐을 때 백성들의 삶은 매우 궁핍했다. 조세 제도의 부조리로 양반의 조세 부담은 크게 줄어든 반면, 농민들의 부담은 극에 달한 상황이었다. 관청에서는 공물을 더 많이 걷고 군역을 지는 양인 장정에게 군포(軍布)까지 걷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 많던 왕실 토지도 왕자와 공주에게 모두 나누어 주어 왕실의 곳간은 텅 비어 있었다. 왕실 재정의 악화는 자연스레 왕권의 약화로 이어졌다.

훈구파와 사림파의 극심한 대립 또한 연산군을 힘들게 했다. 부왕인 성종은 훈구 세력을 억누르기 위하여 사림들을 등용했지만 두 세력 사이의 대립은 불가피했다. 또한 왕의 입장에서도 두 세력 모두 온당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훈구 세력은 왕실과 왕권의 절대성을 옹호했지만 이를 빌미로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했고, 사림은 왕에게 명나라의 제후로 본분을 다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왕권을 상대적인 위치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산군은 쿠데타로 집권한 세조의 훈구대신들을 더욱 못마땅하게 여겼다.

무오사화를 통해 사림들을 축출한 후 연산군은 왕권의 위력을 실감했고, 더욱 포악하게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반대파를 제거한 훈구 세력들의 입지도 강화되었다. 연산군은 여기에서 다시 대신들과 대립했다. 그러던 중 훈구 세력의 재산마저 거두어들이려고 한 것이 대신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났다. 직접적인 배경은 폐비 윤씨의 사사 사건이지만, 갑자사화 전후로 연산군은 훈구 세력들이 사소한 잘못을 저질러도 재산을 몰수했다. 또한 자신의 정통성에 문제가 있다고 깨달은 순간부터 광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 과정에서 성종의 두 후궁과 그 소생 왕자를 때려죽이기도 했다.

두 차례의 사화로 훈구파와 사림파의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이로 인해 연산군은 폭군이라는 별칭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간과하는 부분이 있다. 신료들을 제거한 것보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이 과정에서 연산군의 전횡을 막을 세력이 소멸되어 그 피해가 백성에게까지 미쳤다는 것이다. 연산군은 만 명이 넘는 기생을 뽑아 ‘흥청(興凊)’이라 칭하고 잔치에 동원했으며, 경회루 연못가에 만세산을 만들어 놀았다. 성균관을 흥청들과의 놀이터로 사용했고, 서울 동북쪽 100리를 금표로 지정해 사냥터로 만들기도 했다. 이런 연산군의 사치와 놀이에 수많은 비용이 들어가면서 국가의 재정은 더욱 악화되었고 그 부담은 모두 백성들의 몫이 되었다.

연산군은 이 과정에서 자신을 비난하는 자는 죽이거나 온갖 고문으로 잔혹하게 죽였다. 그는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폭군이었다. 상황이 이러하자 조정에서는 바른말을 하는 대신들이 사라지고, 높은 자리를 얻기 위해 연산군의 가마를 메는 대신들이 많아졌다. 김처선(金處善) 같은 환관도 바른말을 하다가 죽임을 당했다. 연산군이 폭군으로 낙인찍힌 이유 중에는 신료들과의 소통 부족 문제도 있다. 이러한 소통 부족과 대립이 사화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두 차례의 사화 이후 연산군은 신하들과 대화를 단절했고, 오직 강력하게 처벌하는 것으로 모든 일을 해결하려고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급기야 민심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1506년 성희안, 박원종 등이 연산군의 폐위를 모의했다. 반정에 성공한 박원종 일파는 군사를 몰아 텅 빈 경복궁에 들어가 성종의 계비이자 진성대군의 어머니인 대비 윤씨의 허락을 받고 연산군을 폐하여 강화도에 안치했다. 그리고 다음 날, 진성대군이 근정전에서 왕위에 올랐다. 그가 중종이다. 연산군은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어 강화도 교동에서 그해 11월 병사했다. 그의 묘는 양주군 해등촌(海等村,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에 있다. 이곳에는 ‘연산군지묘(燕山君之墓)’라고 적힌 석물 외에 아무런 장식이 없다. 연산군은 15대 광해군과 함께 조선 시대 폐주(廢主) 가운데 한 사람이며, 《선원계보》에도 묘호와 능호 없이 일개 왕자의 신분으로만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의 재위 기간의 실록도 《연산군일기》로 통칭된다.(다음백과)

550살로 추정되는 나무 높이 25m, 둘레 10.7m 서울시 보호수 제1호 '방학동 은행나무'

연산군 묘 바로 아래쪽에 장엄한 은행나무 한그루가 있다. 나무 높이 25m, 둘레 10.7m로 서울시 보호수 제1호인 ‘방학동 은행나무’다. 국립산림과학원에서 추정한 수령은 약 500 ~ 600년이라고 한다. 예로부터 마을 주민들은 신령이 깃든 나무로 여겼고, 대대로 제사를 지냈다. 제사는 1960년대이후에 끊겼다가1990년대 다시 부활하여 지금도 치러진다고 한다. 다만 예전처럼 무거운 분위기는 아니고 마을 잔치같은 성격으로 바뀌었다.

이 나무는 수나무로, 원래는 암나무가 근처에 있었다. 몇 백 년 동안 함께 지냈는데 아파트가 세워지면서 암나무는 베어지고 말았다. 수나무는 살아남았지만 아파트를 비롯한 여러 주택들로 인해 생육에 지장을 받았다. 그러자 주민들이 은행나무를 위한 환경을 만들자는 민원을 제기했고, 이에 도봉구에서는 인근 빌라 한 동을 매입한 뒤 헐어 은행나무가 잘 자랄 수 있는 공간을 확보했다. 또한 가지들을 지탱하는 지지대도 설치하고 썩은 부분을 도려내는 치료해 주었다. 서울시 보호수 제1호로 지정 받았고, 2013년 서울시 기념물 제33호로 지정 받았다.(다음백과)

내가 만난 김수영, 어두운 시대의 위대한 증인
최승호 시인 초청강연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원당샘 근처 은행나무집에서 봉평메밀국수로 점심 한끼를 때우고 오늘의 마지막 탐방 코스인 김수영문학관으로 향했다. 문학관 2층 전시관 김수영 시인의 서재에 걸려있는 붓글씨 작품이 내 발걸음을 오래 머물게 했다. 상주사심(常住死心), 늘 죽음을 생각하며 살아라. 김수영 시인의 좌우명이었다고 한다. 가슴이 뭉클했다. 마침 오늘 오후 3시 김수영 시인의 54주기를 맞아 명사 초청 강연회를 개최한다고 한다.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문학관 4층 강당에 올라가니 벌써 많은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다. 김수영 시인의 시 을 낭송하며 시작한, 승호 시인이 들려주는 시작(詩作) 강연을 한 시간 가량 경청하였다

오늘 교육의 벗들과 함께 서울창포원에서 시작(始作)한 도봉구 역사문화탐방은 김수영문학관에서 개최한 최승호 시인의 시작(詩作) 강연으로 끝으로 일정을 마무리하였다. 초록빛 물결 가득한 서울창포원, 평화의 소중함을 깨닫게 한 역사문화진지, 고즈넉한 정취 간직한 전형필 가옥, 역사를 되새긴 정의공주 묘와 연산군 묘,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게 한 장엄한 은행나무, 어린 시절 동네 마을 추억을 소환한 원당샘, 가슴뭉클한 김수영의 시(詩)와 그의 삶. 보람된 만남, 뜻깊은 시간이었다.  

글=김영택 / 2022.06.18(토) 사진 촬영

김수영문학관 입구
상주사심(常住死心), 늘 죽음을 생각하며 살아라. 김수영 시인의 좌우명.


https://youtu.be/DCwhJmenCcs

https://youtu.be/lfqBKVWuvbU

https://youtu.be/eXyNsMbE9C4

https://youtu.be/GKPCx3ngKC0

https://youtu.be/tMduSuzA8Z8

https://youtu.be/A4ov01RvjqM

https://youtu.be/DT7YwS7cvUE

https://youtu.be/XqMdZcZ_Muo

서울창포원

김샘과 한샘
김샘과 한샘 서울창포원에서
기샘과 김샘 그리고 나
기샘과 김샘 그리고 나, 서울창포원에서
평화문화진지, 베를린 장벽

김샘과 한샘, 기샘.. 역사문화진지 장갑차
기샘, 한샘, 김샘.. 역사문화진지 베를린장벽
역사문화진지 전망대

간송 전형필 가옥
정의공주의 묘, 양효안공의 묘
세종대왕의 딸째 딸 정의공주의 묘, 사위 양효안공의 묘
연산군묘 입구
연산군의 묘
550살로 추정되는 나무 높이 25m, 둘레 10.7m 서울시 보호수 제1호 '방학동 은행나무'
600년 전부터 원당마을 주민들이 식수로 이용한 원당샘.
김샘과 한샘, 기샘.. 원당샘공원. 2022
양심과 자유의 시인 김수영(金洙暎)
은행나무집에서 봉평메밀국수로 점심을..
내가 만난 김수영, 어두운 시대의 위대한 증인
김수영문학관 입구
상주사심(常住死心), 늘 죽음을 생각하며 살아라. 김수영 시인의 좌우명.

/ 2022.06.18(토) 사진 촬영

https://youtu.be/DCwhJmenCc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