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인종들이나 밥맛 잃었을 때 “에잇 살맛이 안 나네” 그런다고 한다. 에잉. 식인종들은 ‘산채 비빔밥’을 최고로 친다는데, 여긴 산골이라서 진짜 산채 비빔밥으로도 유명해. 입맛이 떨어지는 겨울엔 김장김치에 막 비벼가지고 먹으면 입꼬리가 귀 끝에 걸린다. 식인종들도 우리 동네 와서 입맛을 바꾸길.
어제 오늘 흰 눈이 펑펑. 소녀 애너벨 리를 얼어 죽게 만든 한밤의 차가운 바람, 에드거 앨런 포의 바닷가 왕국 이야기는 이 숲속에도 퍼졌나봐. 웅크리고 있다가 군불을 모으고, 눈에 푹푹 빠진 양말과 신발을 말렸다. 만화영화 주인공 ‘스노우맨’처럼 사뿐사뿐 눈길을 걷다왔다.
“올 한 해 수고했어.” 나무들에게 인사하고 골짝물에게도 인사한다. 수백만년 전 원시인들은 아프리카의 원시림을 거쳐 멀리 북극을 돌고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갔대. 그때 비로소 불을 수중에 넣게 되었으며 말을 길들여 사냥에 이용하고 숲속에 집을 지어 밭을 일구기도 했다지. 집과 마을은 누구 하나 얼어 죽지 않도록 단단히 방도를 했고, 난로나 구들을 만들어 싸늘한 한기를 견뎌냈다. 예부터 겨울나기를 터득하면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다. 식량 비축과 땔감은 부족의 사활이 걸린 일.
내가 사는 동네는 배달음식도 없고 도시가스가 들어오지 않으며 식수도 마을 공동우물을 파서 분배받는데, 이 상수도 시설이 자주 고장을 일으킨다. 불편한 가짓수가 차고도 넘친다. 올여름 폭우에 개울둑이 모두 무너졌고 더러 산사태도 났다. 아직도 수리가 되지 않은 채 새해를 맞게 생겼다. 멀리 내다볼 겨를도 없다. 다만 이 추위와 눈보라만 견디자는 심정이다.
눈이 덮인 마을 집들을 보면서, 이장도 아니면서, “올 한 해 수고했어요” 인사를 나눈다. 산채 비빔밥 같은 마을. 얼지 않고 산 채로 또 내일 봐야지.
임의진 목사·시인ㅣ경향신문 2020.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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