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원 칼럼] 풀꽃들을 위한 변론 (daum.net)
[박병원 칼럼] 풀꽃들을 위한 변론 / 박병원 한국경영자총협회 명예회장
우리나라에는 풀들이 마음 놓고 살 공간이 거의 없다. 산림청이 이름 탓인지 산에 너무 부지런히 나무를 심어 세계적으로 조림에 성공한 나라를 만드는 바람에 풀들은 자투리 땅에서나 살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풀들도 생태계의 일부로 이 땅에 살 권리를 가지고 있는데 인위적으로 풀들이 살 공간을 거의 없애 놓은 것은 잘 한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온대지방의 수목한계선인 2,000 미터 이상 높은 산이 없기 때문에 자연상태에서 초원이 형성되기는 어렵다. 그래서 유럽의 알프스처럼 해발 2,000 안팎의 고원에 등반전철이나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서 탁 트인 풀밭을 거니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 웬만한 산은 정상에 가도 관상 가치도 없는 잡목림에 가려서 전망이라고 할 것이 없는 경우도 많다. 이름난 풀밭이라고는 곰배령, 금대봉, 노고단 등이 대표적인 곳인데 한마디로 너무 적고 작다. 그러다 보니 앞의 두 곳은 하루에 입장객을 제한하기까지 하고 있다.
원래부터 이렇게 풀밭이 적었던 것은 아니라고 한다. 백석산을 비롯하여 백두대간을 따라 볼만한 풀밭이 제법 있었다고 하는데 우리 산림청이 너무 부지런해서 다 조림을 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것도 일본잎갈나무(낙엽송)나 리기다소나무 같은 침엽수들로, 모든 울창한 숲은 식물 생존에 가장 중요한 요소인 햇볕을 차단하여 숲 바닥에 다른 풀들이 살기 어렵게 만들지만, 침엽수들은 풀들과 공생관계에 있는 토양미생물이 살기 어렵게 해서 풀들에게 더 결정적인 타격을 준다. 야생화를 찾아서 세계를 누비고 다니는 필자는 침엽수림을 만나면 아예 들어가 보지도 않는다. 풀꽃이 별로 없다는 것을 경험으로 아는 것이다.
나무만 살고 풀이 살지 못하는 산은 정상이 아니다. 풀은 지표면을 더 촘촘하게 덮어서 토양 유실을 방지하고, 풀과 공생하는 토양미생물들은 부식률을 높여서 토양을 기름지게 한다. 그리고 산촌 주민들에게 재배한 약초나 나물보다 훨씬 비싼 값에 팔 수 있는 나물과 약초를 제공하기도 한다.
초원, 또는 풀꽃들이 공존하는 숲은 관광자원으로도 큰 가치가 있다. 요즘 일부 지자체는 인위적으로 산수유, 벚꽃, 배롱나무 등 특정 나무를 집중적으로 심기도 하고 식물원도 만들어서 관광자원화 하고 있다. 그러나 희소성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자연이 만들어 주는 야생화가 만발한 초원이 더 많은 사람을 끌 수 있을 것 같다. 자연상태에서 풀밭이 되는 고원이 즐비한 알프스는 말할 것도 없고, 중국도 북경 서쪽의 백화산 백초반(百草畔), 북쪽의 빙산량(氷山梁), 내몽고의 회등희륵(灰騰希勒) 천연식물원 등 관광자원 조성 차원에서 인위적으로 초원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 많다. 샌프란시스코 북쪽의 포인트 레이에스도 초원을 국립공원 급으로 보호하고 있다.
지금부터라도 풀들에게도 정당한 몫의 공간을 남겨 주도록 노력하자.우선 산에 속성수를 중심으로 단일 수종을 빼곡하게 심는 것이 산림청의 일이라고 보는 생각부터 바꾸어야 한다. 산은 교목과 관목, 그리고 풀이 조화롭게 사는 공간이어야 한다. 인위적 개입으로 왜곡시켰다면 단계적으로 바로잡아야 한다.
좋은 계기가 생겼다. 2016년 8월에 태백산이 국립공원으로 승격되면서 전체 면적의 11.7%, 8.7㎢에 달하는 낙엽송 조림지에 대해서 10년에 걸쳐 다 베어내고 소나무, 참나무 등 고유 수종으로 갱신을 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1914년 우리나라에 도입된 이후 비교적 성공적으로 정착한 낙엽송을 출신이 일본이라고 해서 국립공원에서 내쫓아야 한다는 편협한 발상에는 동의할 수가 없고, 솔잎혹파리와 온난화에 시달리는 소나무나 참나무시들음병에 시달리는 참나무를 심겠다는 발상도 참 이상하다.
그래도, 무슨 이유에서든지 산에서 나무를 베어냈다면 일부라도 풀들이 살 수 있는 공간으로 '내버려 두거나', 다른 나무를 심더라도 다양한 수종을 좀 널찍하게 심어서 숲의 바닥에까지 햇볕이 닿는 건강한 숲을 만들어 풀들과 공생할 수 있도록 하면 좋지 않겠는가? 소나무, 참나무를 빼곡히 심어 놓고 나중에 비용을 들여서 간벌, 육림을 하는 것보다, 처음부터 자연에게 맡겨 두었더라면 그렇게 되었을 그 모습에 가장 가까운 숲, 더 이상 사람이 손을 대지 않아도 되는 숲을 만드는 것이 낫지 않을까 말이다.
박병원 한국경영자총협회 명예회장ㅣ디지털타임스 2019.09.10
/ 2022.06.01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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