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득 불평등, 가난이 개인의 탓뿐일까? [알아두면 쓸모있는 과학 (21)] (daum.net)
얼마 전 《더 해빙(The Having)- 부와 행운을 끌어당기는 힘》이란 책을 읽었습니다. 이 책의 저자는 2명인데 ‘구루’라 불리는 이의 돈에 대한 견해를 다른 한 명의 저자가 정리해 놓았습니다. 이 책의 핵심은 (적어도 제가 파악하기엔) 돈을 갖고 있다는 긍정적인 ‘해빙(having)’의 느낌을 갖게 되면 부와 행운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커피 한잔을 사 먹으며 이만큼 돈을 썼다는 생각보다는, 내가 이 커피 한잔을 살 만큼의 돈을 갖고 있다는 ‘해빙’의 느낌을 느끼라는 말입니다.
첫인상은 ‘새롭다!’였습니다. 콜럼버스의 달걀(오랫동안 믿어왔던 생각이나 관념을 과감하게 깨는 행동)처럼 어떤 일이든 뒤집어보면 새로운 길을 개척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참 새로웠습니다. 인터넷 서점 후기엔 이 책에 대한 칭찬이 이어집니다. 그런데 책장을 넘기면서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책이 말하는 대로 ‘내가 돈을 갖고 있다’는 마음을 먹는 것만으로 부자가 될까요? 부를 누릴 수 있을까요?
생각을 바꾸면 부자가 된다?
저자는 ‘신경 가소성’을 과학적 근거로 제시합니다. 뉴런은 온몸에 그물처럼 퍼져 있는 신경을 이루는 하나의 세포를 말합니다. 뉴런은 우리 몸에 수백억 개가 존재하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쭉 이어져 있습니다. 과거에는 성장기가 지나면 뉴런과 사이의 연결이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신경과학 연구가 발달하면서 환경이나 경험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해 뉴런이 연결되는 강도와 모양이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저자는 ‘해빙’을 실천할수록 신경 가소성도 높아져 실제 “돈을 쓰는 그 순간 ‘불안’ 대신 ‘있음’을 느낄 수 있게 된다”는 주장을 펼칩니다.
생각의 전환을 통해 뇌가 바뀌는 경험은 일상생활에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돈을 썼다는 느낌보다는, 돈을 이용해 서비스를 얻었다는 방향으로 생각을 전환하는 삶의 긍정성은 비관적인 자세를 가진 사람들에게 일견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주장은 위험한 논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돈이 없는 상황, 즉 가난과 빈곤의 책임을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주장의 논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소득의 불평등 지수가 악화되는 상황에서 부가 부를 낳고, 빈곤이 빈곤을 낳는 고리를 끊어내는 국가적 노력을 촉구하기보다는 개인이 빈곤을 내재화하는 논리를 주장한다면 이는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요.
1997년 IMF 경제위기가 한국사회를 덮치기 전 상황을 떠올려 볼까요? 당시는 웬만한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입사 원서를 쓰면 어렵지 않게 취직이 가능한 호황기였습니다. 대졸 신입사원 초봉 액수도 높았습니다. 그때라고 해서 취업준비생들에게 고충이 없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와 비교하면 쉽게 직장을 잡고 부를 축적할 수 있던 시기였습니다. 열심히 돈을 모아 내 집을 장만하고, 계층의 사다리를 올라가기에 상대적으로 쉬웠습니다.
반면 지금은 어떤가요? 취업이 하늘의 별 따기입니다. 사회 초년 생활을 정규직 ‘신분’으로 시작하기도 어렵고, 그렇다 보니 신입사원 초봉 액수도 적습니다. 내 집 마련까지 걸리는 시간도 급격히 늘어 월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6.9년을 모아야 처음 집을 살 수 있는 돈을 마련할 수 있다고 합니다. 전국 평균치입니다. 서울 강남권에 집을 마련하려면 그 기간은 훨씬 더 길어집니다.
이 책에서는 빌 게이츠를 예로 들면서 소수의 부호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은 그릇의 크기가 비슷하지만, 저마다 채우는 양에는 차이가 있다고 말합니다. 돈을 잘 벌지 못하는 사람은 그릇의 10% 정도만 채웠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1990년대 살았던 사람들보다 개인의 그릇을 덜 채우고 사는 것일까요? 개인의 그릇 차이가 있다는 논리는 얼핏 그럴듯해 보이지만 개인의 부의 양을 논할 때 경제구조나 환경을 고려하지 않는 실책을 범하게 됩니다. 개인의 부는 경제구조나 환경의 영향을 크게 받습니다.
실제 사회 초년생들의 사고방식과 행동이 경제 조건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는 연구결과가 있습니다. 2014년 〈Psychological Science〉에 발표된 연구를 보면 18~25세일 때 경기침체를 겪었던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자존감이 다소 낮은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이런 경향은 회사 내 CEO직군에서도 나타났습니다. 젊었을 때 경기침체를 겪었던 CEO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나이·성별·회사의 소득 및 자산규모와 상관없이 같은 업계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임금을 받고 있었습니다. 경기침체기에 사회생활을 시작한 사람들은 호황기에 일을 시작한 사람들과 출발선이 다르기 때문이었습니다. 호황기에 일을 시작하면 아무래도 급여 수준이 더 높게 마련입니다.
경제 수준이 건강에도 영향 미쳐
과학은 양극화된 사회 구조가 인체와 건강에 미치는 영향까지 연구를 확장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가난의 정도가 어린이의 뇌 발달에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결과가 나왔습니다. 미국 연방정부 설정 빈곤선(FPL)에 미달하는 빈곤층의 자녀는 MRI 검사결과 대뇌 신경세포가 모인 부분인 회백질이 또래 평균보다 8∼10% 적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빈곤 수준에 따라 장내 미생물 분포도 다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장내 미생물은 소화에 관여하는 것뿐 아니라 당뇨·비만과 같은 성인병과 암 등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건강의 지표가 됩니다. 미국 공공도서관에서 발행하는 국제학술지 〈플로스 생물학〉에 발표된 연구결과를 보면 빈곤층의 장내 유익균은 숫자가 적고 다양성도 낮습니다. 연구진은 장내 미생물이 부족해 대사질환이나 정신질환에 취약할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사회경제적 불균형이 건강 불균형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연구팀은 연구결과를 발표하면서 문제 해결을 위해 공중 보건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빈곤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노~오오오오력’ 하면 성공한다는 캐치프레이즈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환경을 만드는 것이 먼저 아닐까요. 환경으로 인한 가난이라는 측면에 관심을 갖는 노력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목정민 과학잡지 <에피> 편집장ㅣ경향신문 2022.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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