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이기호의 미니픽션] (60·끝) 말할 사람

푸레택 2022. 5. 14. 20:45

˙[이기호의 미니픽션] 말할 사람 (daum.net)

 

[이기호의 미니픽션] 말할 사람

[경향신문] 이민재, 라고 했다. 1996년생이고, 정용과 진만이 나온 대학교의 사이버보안학과를 나왔다고 했다. 아, 아직 졸업은 아니고요, 내년 2월에 졸업 예정이에요. 이민재는 들고 온 캐리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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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호의 미니픽션] 말할 사람 /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

이민재, 라고 했다.

1996년생이고, 정용과 진만이 나온 대학교의 사이버보안학과를 나왔다고 했다. 아, 아직 졸업은 아니고요, 내년 2월에 졸업 예정이에요. 이민재는 들고 온 캐리어에서 추리닝을 꺼내며 그렇게 말했다. 제대하고 복학할 무렵에 코로나 터져가지고 학교도 한 번 못 갔는걸요, 뭘. 졸업이라고 해서 별다를 것도 없고요.

 

대학 동기 상구의 부탁으로 정용이 이민재를 처음 만난 것은 12월 둘째 주의 일이었다.

“사실 걔가 내 여자친구 남동생이야. 굳이 이쪽 광역시로 나와서 살겠다고 하는데 당장 보증금 마련도 어렵고….” 상구는 정용에게 딱 한 달만 신세를 질 수 없겠냐고 물었다. 그 뒤엔 고시원이든 친구 방이든 구해서 나가겠다고 했다. 안 그러면 자기 여자친구 방으로 들어온다고 하는데, 다 큰 남매가 한 방에서 지내는 것도 그렇잖아? 정용은 상구의 말을 묵묵히 듣기만 했다. 여자친구 방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는 상구가 더 큰 문제겠지.

사이버보안학과는 뭐 하는 곳이에요? 정용이 묻자 이민재는 쑥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이렇게 말했다.

“저도 잘 몰라요. 4년 내내 게임만 하다가 졸업하는 느낌이에요.” 이민재는 키가 크고 마른 체형이었다. 이마와 뺨엔 중학생처럼 여드름이 나 있었고, 목소리는 잎이 다 떨어진 대추나무 가지처럼 얇고 날이 서 있었다. 당분간, 정용은 이민재와 함께 지내기로 했다. 원래 둘이 쓰던 방이었으니까. 정용의 머릿속에선 계속 그 말이 맴돌았다. 원래 둘이 쓰던 방.

처음 일주일 동안 이민재는 잠잠했다. 정용은 편의점 알바를 마치고 새벽 1시쯤이나 돼야 자취방으로 돌아오곤 했는데, 이민재는 첫날을 빼곤 늘 그 시간까지도 귀가하지 않았다. 벌써 야간 알바를 잡았나? 정용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잠깐 머물다 떠나는 친구나 다름없으니까. 늦은 오전 잠에서 깨어나 보면 이민재는 허리를 잔뜩 구부린 자세로 침대 아래 잠들어 있었다. 정용은 침대에 앉은 채 멀거니 그 모습을 오랫동안 내려다보았다. 때론 어떤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도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을 그즈음 정용은 깨닫고 있었다.

이민재가 본격적으로 정용의 삶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그다음 주부터였다.

알바를 마치고 자취방 욕실에서 샤워를 하고 있는데 문 밖에서 무언가 쿵, 무거운 것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수건으로 대충 몸을 닦고 욕실 밖으로 나와 보니 이민재가 신발장에 등을 기댄 채 앉아 있었다. 그의 몸에선 술 냄새가 진동했고, 게슴츠레 뜬 실눈은 자신의 종아리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용은 그를 부축해 자리에 눕혔다. 이민재는 눈을 감고 가만히 누워 있었지만 잠든 것 같진 않았다. 몇 번 발작적으로 기침을 해대기도 했다. 그러다가 정용이 바로 옆 침대에 눕자, 취기 어린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형… 형이라고 불러도 되죠?”

정용은 대꾸 없이 스마트폰만 바라봤다. 스마트폰 불빛이 자취방 벽면에 커다란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형… 나 여기 올라와서 아직까지 한 명도 만난 사람이 없어요… 형 말고 말해 본 사람도 없고… 왜 이렇게 만날 사람도 없냐, 여긴?”

이민재는 그 말을 하곤 한동안 조용했다. 정용은 슬쩍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고개를 모로 돌리고 있었다.

“형… 왜 시골 아빠들은 다 가난하지? 왜 애들 자취방 하나 못 구해줄까?”

정용은 그때부터 스마트폰을 껐다. 자취방엔 이제 어둠만이 남았다.

“가난한 아빠들이 가난한 애들을 키우고, 가난해서 술 취한 아빠들이 다시 가난해서 술 취한 아이들을 만들고….” 이민재는 라임을 맞추듯 웅얼거렸다. 정용은 그 소리가 듣기 싫었다. 더 이상 누군가를 원망하고 싶진 않았다.

“말할 사람이 없으니까요, 형… 자꾸 술하고 얘기하는 거 같아요.” 정용은 그래도 대꾸하지 않았다. 대꾸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형… 나 여기서 형하고 더 같이 살아도 돼요? 아이 난 참… 그래도 누가 옆에 있는 게 좋거든요.”

이민재는 그러곤 쌕쌕, 일정한 숨소리를 냈다. 정용은 눈을 감지 않은 채 어두운 자취방 벽을 바라보았다. 그 벽에 손가락으로 아무 의미 없는 글씨를 써 나갔다. 말할 사람. 말할 사람. 정용은 자신이 무엇을 쓰는지도 알지 못한 채 계속 자신의 손가락을 움직였다. 어둠 속에서 손가락에 무언가 살짝 닿는 느낌이 들었다.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ㅣ경향신문 2021.12.24

/ 2022.05.14(토)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