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호의 미니픽션] 사소한 작별 /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
정용은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뭘? 뭘 어쨌다고? 같이 사는 처지에, 아니 그 정도 말도 못한단 말인가? 예전에는 더 심한 말도 했는데…. 정용은 혼자 따져보다가 기분이 더 상해버렸다. 가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지. 내가 뭐 아쉬운 게 있다고…. 정용은 그렇게 진만이 나간 방문을 바라보다가 마음의 문마저 휙 닫아버렸다.
시작은 사소한 말 한마디부터였다. 편의점 야간 알바를 마치고 돌아온 정용이 켜져 있는 컴퓨터 모니터를 보며 ‘안 쓸 땐 쫌!’ 하고 짜증을 냈다.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보고 있던 진만은 ‘왔냐?’ 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었다. 컴퓨터는 정용의 것이었고, 진만이 누워 있는 침대도 정용의 자리였다. 진만은 평소 침대 아래에 삼단요를 깔고 잤다. 가뜩이나 컴퓨터 쿨러 상태가 안 좋으니까 웬만하면 쓰지 말라고 했는데도 진만은 매번 귓등으로 흘려들었다. 정용이 낮은 한숨을 내쉬며 옷을 갈아입고 있는데 뒤에서 진만이 말을 걸었다. ‘야, 세상이 진짜 어떻게 돌아가려고 이러냐? 애견미용학원에서 강아지들을 함부로 막 다루고 그러나 봐.’ 진만은 스마트폰 화면을 정용 쪽으로 내보이며 정말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작은 요크셔테리어 한 마리가 물에 흠뻑 젖은 채 바들바들 떨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얘네들 찬물에 목욕시키고, 목도 막 비틀고 그런다네.’ 정용은 진만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네가 지금 개들 걱정할 때니? 정용은 속으로 웅얼거렸다. 진만은 지난주엔 서울시장 선거를 두고도 온갖 걱정을 늘어놓았다. 20대가 뭐? 자기들이 뭔데 가르치려 드는 거야? 어휴, 하여간 꼰대들은 자기 마음에 안 들면 다 개새끼래. 정용은 그때도 속엣말만 했다. 전라도에 사는 네가 왜 서울시장 걱정을 하니? 나는 네가 더 걱정이다…. 정용은 잠깐, 자신이 요즘 왜 이렇게 진만에게 까칠한가, 되짚어보았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예전보다 더 날카로워졌고 더 뾰족해졌다. 한때는 그래도 같이 있으면 즐겁고 우울하지 않아서 좋았는데…. 어쨌든 그건 다 지난 일이었다. 또 한편 그게 꼭 자신의 문제라기보단 진만이 자초한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무슨 성 아우구스티누스도 아니고, 언제까지 놀고먹는 백수를 바라보며 묵상만 한단 말인가. 정용은 자신의 문제는 별로 크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래서, 기어이 정용의 입에서 그 말이 튀어나온 것인지 모른다. 허기가 져 컵라면이라도 하나 먹으려고 찬장을 열었는데, 거기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어제 분명 2+1으로 신라면 블랙 컵라면을 사놓았는데… 출근 전까지만 해도 2개가 있었는데…. ‘이거 네가 다 먹었니?’ 정용이 등을 돌리지 않은 채 물었다. ‘어, 미안… 내가 내일 다시 사놓으려고 했는데….’ 그 순간 정용의 입에서 툭, 그 말이 새어나오고 말았다. ‘에이, 씨발 진짜… 무슨 거지새끼도 아니고….’ 정용은 자신의 입에서 그 말이 실제로 흘러나올지 몰랐다. 그래서 조금 당황했다. 어쩐지 조금 무안해져 말없이 바로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그냥 농담 같은 욕이니까, 옛날엔 서로 더 심한 욕들도 주고받으면서 웃었으니까. 정용은 양치를 하면서 그렇게 생각해 버렸다. 하지만 욕실에서 나온 정용 앞에 진만은 배낭과 쇼핑백 두 개를 든 채 서 있었다.
“언제까지 거지새끼처럼 계속 이러고 있는 것도 그렇고… 나머지 짐은 내가 알아서 찾으러 올게.”
진만은 그 말만 하고 원룸 밖으로 나가 버렸다. 정용은 당황했지만, 그러나 진만을 말리진 않았다. 누굴 향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화만 더 났을 뿐이다.
정용은 쉽게 잠들지 못하고 계속 뒤척였다. 잘 된 일이라고, 언젠가 따로 살날이 올지 알았다고 생각하다가도, 그래도 내일이나 모레쯤 다시 아무 일 없다는 듯 돌아오겠지, 짐작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퍼뜩, 정용은 어떤 생각이 들어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는데, 아아, 그랬구나, 그래서 그랬구나, 어두운 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보증금 때문이구나, 이 원룸 보증금을 내가 다 냈다고… 그래서 그 말이 더 상처였겠구나… 정말 거지가 된 기분이었겠구나…. 정용은 어두운 밤길을 걸어가고 있을 진만의 뒷모습을 그제야 그려볼 수 있었다.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ㅣ경향신문 2021.04.16
/ 2022.05.14(토)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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