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58) / 방귀가 구한 생명 - 이창기의 '나의 아침 방귀에 당신의 신중한 하루가' - 뉴스페이퍼 (news-paper.co.kr)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58) 방귀가 구한 생명 - 이창기의 '나의 아침 방귀에 당신의 신중한 하루가'
나의 아침 방귀에 당신의 신중한 하루가 / 이창기
이른 아침
개똥을 치운 뒤
뒷짐 지고 헛기침하며
텃밭을 둘러보러
산수유나무 옆을 돌아가다
얼굴을 휘감는 거미줄을 신경질적으로 걷어냈습니다
봄 가뭄에 애지중지 살려놓은 콩 싹은
이제 절반도 남지 않았습니다
우선 눈에 띄는 참나무 꼭대기의 까치집만
서운한 눈으로 잠깐 올려다보다
길을 잘못 든 호박덩굴을
비탈 쪽으로 유인했습니다
그러다 허리를 굽혀
부지런히 몸 놀려 잎 뒤로 숨으려는
배추벌레 한 마리를
손끝으로 막 눌러 죽이려는 순간
느닷없이,
힘차게,
아침 방귀가 터져 나왔습니다
슬그머니 허리를 펴는데
새벽안개를 헤치며
서둘러 논둑길로 질러가는
시골 여학생 같은 보랏빛 나팔꽃이
잎 뒤에 얼굴을 가리고는 키득거립니다
시원했습니다만,
그러고 보니 나의 아침 방귀가
당신의 그 신중한 하루를
또다시 시끌벅적하게 만들었군요
—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문학과지성사, 2006)
<해설>
화자는 이른 아침에 일어나 개똥을 치우고 텃밭을 둘러보는 부지런한 농부다. (농부치고 부지런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만.) 밭에 나가보니 긴 가뭄에 애지중지 살려놓은 콩을 산비둘기 부부가 쪼아서 엉망으로 만들어놓았다. 길을 잘못 든 호박덩굴을 한쪽으로 유인하고 난 뒤 허리를 굽혀 얼갈이배추 잎사귀에 붙은 배추벌레 한 마리를 손끝으로 눌러 죽이려는 순간, 느닷없이, 힘차게, 방귀가 터져 나온다. 이른 아침이라서 방귀 소리를 들은 사람은 없었던가 보다.
화자의 눈에 띈 것은 보랏빛 나팔꽃이다. 나팔꽃이 앞뒤에서 얼굴을 가리고 키득거리는 것을 보고는 아, 또 시끌벅적한 하루가 시작되었구나, 생각하는 것이다. 이 시에서 ‘당신’을 사람이 아닌 신중한 나팔꽃으로 처리한 것이 재미있다. 유쾌하고 구수한 내용에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다. 허허, 방귀가 배추벌레를 살렸도다.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이승하 시인ㅣ뉴스페이퍼 2019.06.11
/ 2022.04.11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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