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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범의 행복심리학] 늘 善에 투표하는 건 아니다 (2022.04.04)

푸레택 2022. 4. 4. 11:28

[이용범의 행복심리학] 늘 善에 투표하는 건 아니다 (daum.net)

 

[이용범의 행복심리학] 늘 善에 투표하는 건 아니다

21대 국회의원 선거가 끝난 지 한 달이 넘었다. 선거 결과에 불만을 느끼는 이들 중에는 나라가 곧 망할 거라며 이민 가고 싶다는 사람도 있다. 과잉 반응이다. 이런 사람은 당선자의 결점이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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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범의 행복심리학] 늘 善에 투표하는 건 아니다

모든 이에게 투표권 있어도 발언권까지 평등한 것은 아냐
선거 책임 공동체가 짊어져야..변명해봐야 아무 소용 없어
무의식적 편향에 기대 투표..선거 예측 빗나가도 승복해야

21대 국회의원 선거가 끝난 지 한 달이 넘었다. 선거 결과에 불만을 느끼는 이들 중에는 나라가 곧 망할 거라며 이민 가고 싶다는 사람도 있다. 과잉 반응이다. 이런 사람은 당선자의 결점이 세상에 알려질 때마다 그에게 투표한 자기 손가락을 잘라버리고 싶다고 허풍 떠는 사람이다. 물론 그는 당선자를 찍지 않았다. 그의 본심은 당신 같은 우매한 다수 때문에 이 지경이 됐으니 책임을 느끼라는 것이다.

◆ 꼭 투표해야 할까

선거 제도를 운영하는 데는 엄청난 비용이 든다. 선거가 끝난 뒤 수년 동안 정치인들을 지켜봐야 하는 국민도 견디기 힘든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경제학자들이 보기에 투표는 비효율적이다. 후보를 선택하고 투표소를 오가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투입 비용에 비해 유권자가 얻을 편익이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배리 슈워츠는 '선택의 심리학'에서 이런 예를 들었다. 두 정치학자가 함께 자동차를 타고 투표하러 간다. 도중에 지지하는 후보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일까. 그것은 두 사람이 동시에 집으로 돌아가 하던 일을 마저 하는 것이다. 두 사람이 투표를 포기해도 아무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투표 제도는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근간이다. 하지만 늘 선(善)을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사회학자 윌리엄 그레이엄 섬너(1840~1910)가 1883년 제시한 유명한 예를 보자. A와 B가 사회적 약자인 X를 돕기 위한 법안 만들기에 나섰다. 그런데 법안에는 당사자가 아닌 C도 X를 도와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윌리엄 그레이엄 섬너

섬너는 자기 의지와 관계없이 X를 도와야 하는 C에게 '잊힌 사람(The forgotten man)'이라고 이름 붙였다. 사실 C는 잊힌 사람이라기보다 처음부터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A와 B가 제안한 법률이 다수결로 통과되면 C는 원치 않는 의무를 지게 된다.

보수의 아버지로 불리지만 스스로 자유주의자이기를 원한 영국의 경제학자이자 정치철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1899~1992)는 '법, 입법 그리고 자유'에서 이에 대해 인용한 바 있다. 그는 10%의 저소득층을 돕기 위해 10%의 고소득층에게 과세하는 법안에 80%가 찬성하는 것은 문제 있다고 말한다.

법안에 찬성한 80%는 무임승차자다. 이들은 아무 의무도 지지 않으면서 고소득층 10%에게 사회가 짊어져야 할 의무를 떠넘긴 것이 된다. 물론 민주주의 국가라면 이런 법률이 통과되진 않을 것이다. 이는 투표 제도의 문제점을 보여주는 상징적 비유일 뿐이다.

미국의 철학자 로버트 노직(1938~2002)이 '아나키에서 유토피아로'에서 든 예는 더 재미있다. 네 남성이 한 여성에게 청혼하는 상황을 떠올려 보자. 네 남성에게는 아무 권한이 없다. 결혼 상대를 결정할 권한은 오직 여성에게 있다. 그런데 다섯 사람이 투표해 여성의 결혼 상대를 정하는 게 가능할까.

선거 제도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모든 사람에게 투표권이 주어진다고 해서 발언권까지 평등한 것은 아니다. 또 투표권은 개인의 간절함을 반영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할 준비가 돼 있거나 투표 결과 때문에 목숨이 위태로운 사람도 한 표만 행사할 수 있다. 더구나 선거가 끝나면 당선자와 나는 아무 관계도 없다. 그들이 입안한 정책 역시 내 의사와 무관하게 결정된다.

◆ 왜 멍청한 인간이 선거에서 이길까

어떻게 저런 사람이 당선됐을까 싶을 때가 있다. 절차적 측면에서만 보면 가장 완전하게 평등을 구현할 수 있는 제도는 추첨이다. 그러나 추첨으로 지도자를 선출하는 것에 만족할 사람은 거의 없을 듯하다. 공동체의 미래를 운에 맡기는 것은 위험하다. 지금 같은 투표 제도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것은 더 나은 대안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민주사회에서는 선거에 따른 모든 책임을 공동체가 짊어져야 한다. 멍청이에게 투표하지 않았다고 변명해 봐야 아무 소용 없다. 당신이 멍청이가 아니라는 보장도 없을뿐더러 다른 진영에 속한 사람이 보기에 당신은 무조건 멍청이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사람들은 이성적 판단으로 지도자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호감을 느낀 정당이나 인간관계, 종교, 지역주의에 근거해 투표한다. 사실 이런 성향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수백만 년 전부터 권력자와 혈연, 지연, 인맥으로 얽혀 있는 사람이 생존에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람들이 지금도 과거의 관성에 의존해 투표한다는 사실이다. 한심한 인간이 선거에서 이기는 데는 몇몇 이유가 있다.

첫째, 우리는 대세론에 취약하다. 어떤 후보의 당선이 유력해 보이면 사람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를 지지하곤 한다. 그를 지지해서라기보다 다른 사람들과 생각이 같음을 확인하고 싶기 때문이다. 다수에 속해 있을 때 사람들은 심리적 안정을 느낀다.

둘째는 이른바 '언더도그 효과(underdog effect·절대적 강자가 존재할 때 상대적으로 약자가 강자를 이겨줬으면 하고 바라는 현상)'다. 역경을 극복해가는 약자에게 호감이 가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선거에 나선 후보들은 자기의 성공 스토리를 과장하거나 창작한다. 우리는 실력만으로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에 약하다.

셋째, 흔히들 지나치다 싶을 만큼 자신감을 보이는 후보에게 투표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일수록 멍청이일 가능성이 높다. 멍청이는 자기가 무엇을 모르는지 모른다. 따라서 남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고 용감하게 행동한다.

넷째가 동질감이다. 흔히들 똑똑한 사람이 논리적인 말만 쏟아내면 거부감을 느끼게 된다. 오히려 소주 한잔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 멍청한 해결책을 자신 있게 제시하면 금세 매료된다. 불편한 진실을 이야기하는 똑똑한 사람보다 듣고 싶은 말만 들려주는 한심한 인간을 선호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외모다. 작은 공동체를 이루며 살던 수렵·채집 사회에서는 리더가 뉘 집 자식이고 어린 시절은 어떻게 보냈는지 속속들이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생김새와 언변 말고는 개인 정보를 알기 어렵다.

2005년 미국의 심리학자 알렉산더 토도로프가 이끄는 연구진은 실험 참가자들에게 2000~2004년 미국 의회선거에서 라이벌인 두 후보의 사진을 1초 동안 보여줬다. 그 뒤 지지하고 싶은 사람을 고르도록 주문했다. 그랬더니 사진만 보고 투표한 결과가 실제 선거 결과와 70% 정도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7년 발표된 연구 결과도 비슷했다. 미국·뉴질랜드·영국에서 치러진 여덟 번의 선거에 출마한 후보들과 학생들의 얼굴 사진을 컴퓨터로 합성해 학생들에게 보여줬다. 그 뒤 선호하는 후보를 선택하도록 주문하자 실제 선거 결과와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후보자의 정책보다 외모가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이다.

사전 정보 없이 두 후보의 사진을 1초 동안 보여준 후 지지하고 싶은 사람을 선택하게 한 결과 실제 선거 결과와 70% 정도 일치했다.

◆ 내 탓이오

우리는 이성적으로 후보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 편향에 기대어 투표한다. 자기의 선택이 이성적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착각할 뿐이다. 이념에 집착하는 사람일수록 지지 후보가 선거에서 패배했을 때 스트레스는 절정으로 치닫는다.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됐을 때 한 연구진이 선거 결과에 실망한 60명과 면담하고 이들의 뇌를 촬영했다. 면담 결과 40명은 선거 결과가 향후 삶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답했다. 또 이들 중 23%는 우울증을 보였다.

심리적 고통은 변한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선거 결과가 기대하던 것과 다르다면 당신의 생각이 주류가 아님을 인정하는 게 좋다. 어떤 결과가 나왔든 당신의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다. 당신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 조금 더 많았을 뿐이다.

그것마저 인정하고 싶지 않다면 4년 후, 혹은 5년 후를 기대하며 살아가면 된다. 물론 그때도 당신의 기대가 어긋날 수 있고 세상은 다시 한번 당신에게 변화를 요구할 것이다. 그때도 생각을 바꾸기 싫다면? 다음 선거를 기다리면 된다.

이용범 소설가ㅣ아시아경제 2020.05.20

/ 2022.04.04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