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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범의 행복심리학] 두려운가? 이 공포에 냉정하자 (2022.04.04)

푸레택 2022. 4. 4. 11:26

[이용범의 행복심리학] 두려운가? 이 공포에 냉정하자 (daum.net)

 

[이용범의 행복심리학] 두려운가? 이 공포에 냉정하자

바이러스에 감염됐는지 100% 진단할 수 있는 검사법이 있다. 그런데 이 검사법에 약간의 오류가 있어 감염되지 않았는데도 양성으로 나올 가능성이 5%다. 지금 당신이 머물고 있는 크루즈 선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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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범의 행복심리학] 두려운가? 이 공포에 냉정하자

전염병 둘러싼 과도한 공포.. 이웃에게 쉽고 빠르게 전파
감염자에 대한 차별과 비난.. 과학적·도덕적인 시선 필요
공포는 무지를 먹으며 성장.. 서로 힘이 돼 주려 노력할 때

바이러스에 감염됐는지 100% 진단할 수 있는 검사법이 있다. 그런데 이 검사법에 약간의 오류가 있어 감염되지 않았는데도 양성으로 나올 가능성이 5%다. 지금 당신이 머물고 있는 크루즈 선박에 500명의 승객이 있고, 그 중 한 명이 바이러스에 감염됐다고 가정하자. 전수검사를 진행한 결과 당신은 양성으로 판정받았다. 그렇다면 당신이 바이러스에 감염됐을 확률은 얼마인가.

◆ 감염의 공포

당신은 감염됐을 확률이 95%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감염되지 않았는데도 양성으로 판정받는 사람이 5%라는 점을 명심하자. 즉 감염자 1명과 실제 감염되지 않은 사람을 포함해 26명이 양성으로 판정받았을 것이다. 감염자는 26명 중 1명이므로 당신이 양성으로 판정됐더라도 실제 감염됐을 확률은 4% 정도다.

1978년 한 연구진이 하버드 의과대학의 인턴 20명, 4학년 학생 20명, 의사 20명에게 이 질문을 던져봤다. 그랬더니 절반 이상이 자기가 감염됐을 확률을 95%라고 답했다. 전문가들조차 확률을 잘못 계산한 것이다.

우리는 확률을 무시하고 위험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가까이서 위험을 목격하면 감염의 공포는 더욱 커진다. 최근 유행하고 있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국내 사망자 수가 160명을 넘어섰다. 많은 숫자지만 해마다 감기로 사망하는 사람이 국내에서만 수천 명에 이른다. 이를 감안하면 공포에 사로잡힐 만큼 치명적인 위협은 아니다.

물론 확률이 낮다는 것과 위험하지 않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확률이 낮아도 복권에 당첨되는 사람은 주마다 나온다. 또 벼락 맞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도 비 오는 날 온 국민이 들판에 서 있으면 사망자가 대폭 증가한다. 1918년 유행한 스페인독감의 치명률은 2.5%에 불과했지만 수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확률이 낮아도 방치하면 위험하다.

자동차 사고 사망자 수는 전염병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다. 하지만 우리는 자동차로부터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 왜 우리는 살인병기와 다름없는 자동차보다 전염병에 더 공포를 느끼는 걸까.

인간은 전염병에 두려움을 갖도록 진화했다. 2008년 '인간광우병'으로도 불리는 변형 크로이츠펠트-야콥병(VCJD)이 국민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이를 예로 들어보자. 역사상 VCJD로 사망한 사람은 세계적으로 수백 명에 불과하다. 그나마 영국에서 사망한 사람을 제외하면 수십 명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쇠고기 수입에 대한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던 미국에서 VCJD로 사망한 사람은 한쪽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지구상 존재하는 어떤 희귀질환보다도 위험하지 않은 것이다.

[이미지출처=EPA연합뉴스]

◆ 공포는 전염된다

우리는 합리적이지 않다. 역설적이게도 인류는 전염병을 둘러싼 과도한 공포 때문에 멸종하진 않았다. 전염은 집단의 문제다. 방심하면 공동체 전체가 완전히 사라질 수도 있다. 멸종의 위험을 막아준 것은 공포심이다. 감염에 둔감했던 조상보다 공포심에 사로잡혔던 조상의 생존 가능성이 훨씬 높았던 것이다. 감염 공포가 생존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따라서 인류는 선천적으로 감염에 대비한 위험경보 장치를 갖고 있다. 이 장치로 좀더 쉽게 이웃들에게 공포를 전염시킨다.

인간만이 아니다. 식물은 화학신호로 위험을 알린다. 동물은 냄새로 위험신호를 보낸다. 하지만 인간은 유인원을 거치면서 후각 능력이 점차 퇴화했다. 그럼에도 인간이 냄새로 공포를 전염시킨다는 연구결과가 나와 있다.

2015년 네덜란드 연구진은 백인 남성 12명에게 특정 영화를 보여줬다. 영화는 각각 행복감, 공포심, 중립적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영화 상영 후 연구진은 이들 12명의 겨드랑이에서 땀을 채취했다. 그리고 백인 여성 36명에게 이들의 땀 냄새를 맡도록 주문했다. 이후 여성들의 얼굴 근육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분석했다.

그 결과 여성들은 공포영화를 보면서 흘린 남성의 땀 냄새에 두려운 표정으로 반응했다. 행복한 영화를 보면서 흘린 남성의 땀 냄새에는 행복한 표정으로 반응했다. 연구진은 사람의 감정이 땀 냄새로 타인을 전염시킨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정서전염(emotional contagion)'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타인의 감정을 모방할 뿐 아니라 행동까지 흉내낸다. 공포는 공포를 낳는다. 미국의 대공황(1929~1939) 당시 수만 명이 공포에 질려 은행에서 현금을 인출했다. 그 바람에 멀쩡한 은행이 파산하는 사례가 빈번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겁에 질린 유인원의 후손들이 세계 곳곳에서 휴지 사재기로 그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공포의 감정은 쉽게 멀리 빠르게 전파된다. 공포심이 밀려올 때 우리는 인간의 모습을 잃고 포식자에게 쫓기는 동물 무리가 돼버린다. 정서전염은 구성원들을 하나의 감정으로 묶는다. 인류는 정서전염으로 집단 내부를 정렬시켜 왔다. 집단의 위계질서와 충성심, 공동체 의식은 이로부터 비롯됐다.

2017년 캐나다 연구진은 정서전염이 발신자와 수신자의 뇌를 동조화시킨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연구진은 쥐에게 상당 기간 스트레스를 준 뒤 짝에게 돌려보냈다. 그리고 얼마 후 쥐의 뇌를 해부해봤다.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던 쥐도 연구원의 손아귀에서 스트레스를 경험한 쥐처럼 해마 부위의 신경회로가 바뀌어 있었다. 스트레스가 전염돼 다른 쥐의 신경회로까지 바꿔버린 것이다.

[이미지출처=EPA연합뉴스]

◆ 냉정하게 바라보자

2008년 국내에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시위가 들불처럼 번졌다. 이는 정부가 대중의 공포심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이었다. 당시 정부의 대응은 미숙하고 서툴렀다. 사실 시위의 근본 원인은 VCJD 자체보다 부자를 위한 경제정책, 영어교육 열풍, 극우세력 준동, 민주주의 후퇴, 인사의 편중, 일방적인 의사결정에 대한 분노였다. VCJD는 시위의 동기를 제공했을 뿐 본질적 이유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정부는 대규모 시위의 원인을 VCJD에 대한 국민들의 무지 탓으로 돌렸다. 불만이 임계상태까지 이르면 사소한 자극에도 예측할 수 없는 변동성이 나타난다.

한 번 공황에 빠진 사람들은 위협이 줄어도 여전히 민감하다. 2018년 하버드대학의 심리학자들은 위험 빈도가 줄어도 우리 뇌는 이전의 위험 빈도를 그대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음을 발견했다.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됐음에도 사람들은 상황이 점차 나빠지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경제 상황이 나아진 뒤에도 자영업자들은 전보다 손님이 줄었다고 투덜대는 것과 비슷하다.

감염자 차별과 비난은 어느 사회에든 있었다. 차별이나 도덕적 비난은 혐오의 감정에서 비롯된다. 운전하다 실수로 사람을 다치게 했다고 치자. 사람들은 운전자를 도덕적으로 비난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기가 감염된 줄 모르고 있다가 우연히 다른 사람을 감염시키면 엄청난 비난과 혐오의 대상이 된다.

쥐나 모기처럼 전염력을 가진 것에 대한 공포는 역겨움이나 혐오의 감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사람들은 VCJD를 두려워한다. 이는 우리 조상들이 상한 고기에 역겨운 감정을 느끼도록 진화했기 때문이다. 감염자에 대한 차별 역시 상한 음식을 피하려는 심리와 유사하다. 이는 심리적으로 자연스런 현상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도덕 기준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근거 없는 차별을 최소화하려면 과학의 눈으로 현상을 바라봐야 한다.

오래 전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었을 때 교회는 신의 징벌이거나 흉악한 마귀가 벌이는 짓이라고 선전했다. 공포는 대중의 무지를 먹고 자란다. 오늘날에는 교회 대신 언론이 무지의 빈틈을 파고든다. 사람들은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뉴스를 읽는다. 그러나 뉴스를 읽음으로써 오히려 공포에 사로잡히는 역설이 발생한다. 더구나 몇몇 언론은 공포 전염으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고 혐오와 차별을 조장하며 수익을 얻는다. 다행히 국내에서는 전염의 파고가 점차 낮아지고 있다. 이제 전염의 공포에서 벗어나 서로에게 힘이 돼주려 노력할 때다.

이용범 소설가ㅣ아시아경제 2020.04.01

/ 2022.04.04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