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름다운 수작 / 배한봉
봄비 그치자 햇살이 더 환하다
씀바귀 꽃잎 위에서
무당벌레 한 마리 슬금슬금 수작을 건다
둥글고 검은 무늬의 빨간 비단옷
이 멋쟁이 신사를 믿어도 될까
간짓간짓 꽃대 흔드는 저 촌색시
초록 치맛자락에
촉촉한 미풍 한 소절 싸안는 거 본다
그때, 맺힌 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던가
잠시 꽃술이 떨렸던가
나 태어나기 전부터
수억 겁 싱싱한 사랑으로 살아왔을
생명들의 아름다운 수작
나는 오늘
그 햇살 그물에 걸려
황홀하게 까무러치는 세상 하나 본다
- 2003년 중학교 3학년 우리말 우리글에 ‘아름다운 수작’ 수록
■ 우포늪 왁새 / 배한봉
득음은 못하고
그저 시골장이나 떠돌던 소리꾼이 있었다
신명 한 가락에
막걸리 한 사발이면 그만이던 흰 두루마기의 그 사내
꿈속에서도 폭포 물줄기 내리치는
한 대목 절창을 찾아 떠돌더니
오늘은 왁새 울음 되어 우황산 솔밭을 다 적시고
우포늪 둔치 그 눈부신 봄빛 위에 자운영 꽃불 질러 놓는다
살아서는 근본마저 알 길 없던 혈혈단신
텁텁한 얼굴에 달빛 같은 슬픔이 엉켜 수염을 흔들곤 했다
늙은 고수라도 만나면
어깨 들썩 산 하나를 흔들었다
필생 동안 그가 찾아 헤맸던 소리가
적막한 늪 뒷산 솔바람 맑은 가락 속에 있었던가
소옥 장재 토평마을 양파들이 시퍼런 물살 몰아칠 때
일제히 깃을 치며 동편제 넘어가는
저 왁새들
완창 한 판 잘 끝냈다고 하늘 선회하는
그 소리꾼 영혼의 심연이
우포늪 꽃잔치를 자지러지도록 무르익힌다
- 2010년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 ‘우포늪 왁새’ 수록
/ 2022.04.03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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