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34) / 저 정치가놈들! - 박병순의 ‘그대들 한 솥에 녹여’ - 뉴스페이퍼 (news-paper.co.kr)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34) 저 정치가놈들! - 박병순의 ‘그대들 한 솥에 녹여’
그대들 한 솥에 녹여 / 박병순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큰 의자만 타고 앉아,
권력으로 재고 황금으로 사람을 꼬는다
보게나 그 감투 그 금력이 몇 대 몇 해를 가나
멋도 맛도 모르는 것들이 잔뜩 허세만 부리고 서서,
허울만 보고 타산으로 사람을 맞는다
하기야 욕심만 가득 찬 네가 높고 먼 것을 어찌 보나
이 모양 요 꼴이라도 대통령도 내 속에 있다
지구도 뱃속에 돌고 우주도 이 눈에 논다
그대들 한 솥에 녹여 새롭고 참된 인간을 빚어보랴?
ㅡ 『문을 바르기 전에』(1973)
<해설>
구름재 박병순의 시조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날린 도전장이다. 최고 권력자에게 매서운 글줄을 날리고 있는데도 폭압의 시대에 시인이 온전할 수 있었다니, 그 담력이 놀랍다. 박병순은 거의 모든 작품의 말미에 탈고한 일자를 써놓는다. 그것도 반드시 단군연호로 쓰는데, 이것에서도 그의 역사의식을 엿볼 수 있다. ‘4304. 11. 7. 새벽.’이라고 부기되어 있으므로 유신헌법 반포 1년 전에 발표한 시조다.
이 작품은 김지하의 「오적」과 궤를 같이한다. 김지하가 재벌ㆍ국회의원ㆍ고급공무원ㆍ장성ㆍ장차관을 을사오적신(오적)에 못지않은 자라고 비꼬았듯이 박병순은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큰 의자만 타고 앉아,/ 권력으로 재고 황금으로 사람을 꼬는다.” 하면서 거침없이 비판한다. 제2연을 보면 비판의 강도가 더 거세진다. 제3연에 가서는 “이 모양 요 꼴이라도 대통령도 내 속에 있다”고 하는데 이는 박정희 대통령을 직접 거론한 것으로 시인의 용기가 놀라울 따름이다. 대통령을 포함하여 그대들을 한 솥에 넣고 녹여 새롭고 참된 인간을 만들고 싶다고 했으니, 그 시절에 당국으로부터 어떤 제재를 안 받았다면 운이 좋은 시인이다.
시인은 치고 박고 싸우기만 하고 국정을 돌보지 않는 국회의원들과 법망을 능구렁이 담 넘듯 잘 넘어가며 살아가는 재벌들이 얼마나 얄미웠을까. 그런데 48년이 흐른 지금도 정치는 발전한 것이 없다. 오늘이 5월 18일이다.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출처 : 뉴스페이퍼 2019.05.18
/ 2022.03.28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