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김석봉의 산촌일기] 아내가 들려준 이야기 (2022.03.25)

푸레택 2022. 3. 25. 19:42

[김석봉의 산촌일기] 아내가 들려준 이야기 < 진주사람 < 삶의 향기 < 기사본문 - 단디뉴스 (dandinews.com)

 

[김석봉의 산촌일기] 아내가 들려준 이야기 - 단디뉴스

오래전 아내가 속삭인 말이었다. 추운 날 이부자리 속에서였을 것이다. “휘그이 아부지. 이야기 하나 해주께. 오늘 들은 이야기야.” 누워있던 아내가 이야기를 시작하려 몸을 돌려 엎드렸다.

www.dandinews.com

[김석봉의 산촌일기] 아내가 들려준 이야기

실연당한 젊은이가 노부부의 농가에 하룻밤을 묵게 된 거야..

오래전 아내가 속삭인 말이었다. 추운 날 이부자리 속에서였을 것이다. “휘그이 아부지. 이야기 하나 해주께. 오늘 들은 이야기야.” 누워있던 아내가 이야기를 시작하려 몸을 돌려 엎드렸다. “실연을 당한 젊은이가 있었어. 그 젊은이가 정처 없이 여행을 하다 강원도 심심산골에서 하룻밤 묵게 된 거야. 그 농가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단 둘이 사는 집이었어. 옆방에서 잠을 청하는데 두 노인네가 끝도 없이 말다툼을 하는 거야. ‘이 영감탱이가 빨리 안 죽고 사람 고생만 시킨다’며 할머니가 아웅 거리면 ‘이 할망구가 저나 빨리 죽지 왜 날 빨리 죽으라는 거냐’며 할아버지가 다웅거리더라는 거야.”

김석봉 농부

참 나, 늙은이들이 뭐 그래?” 별로 재미없는 이야기일 거라는 생각에 어느새 나는 심드렁해졌다. “들어봐, 끝까지 들어봐. 재미있어.” 아내는 내가 잠이라도 들까봐 어깨를 흔들면서 말을 빠르게 이어나갔다. “이 젊은이가 잠을 설치고 아침에 일어나 밖으로 나오니 할아버지가 마당을 쓸고 있었어. 젊은이는 할아버지에게 다가가 말했어. ‘어젯밤 할머니께 너무 심하게 말씀하시던데요. 그 연세에 서로 빨리 죽으라고 성화시니 듣기에도 민망하고.’

그러자 할아버지가 젊은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렇게 답을 하더라는 거야. ‘저 할망구가 못난 나를 만나 고생고생하며 살았는데 나보다 먼저 죽어야 양지바른 곳에 묻어 주기라도 할 것 아닌가.’ 그 말을 들은 젊은이가 이번에는 부엌에서 밥을 짓는 할머니께로 다가가 물었어. ‘아이구. 할머니. 왜 밤새 할아버지 빨리 죽으라는 성화셨어요.’ 그러자 할머니의 답은 이랬어. ‘저 영감탱이가 이 못난 년 만나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겠소. 그래 나보다 빨리 죽어야 내가 눈물이라도 흘려주고 죽지.’ 이러더라는 거야.”

이야기를 맺으면서 아내는 ‘우리도 그렇게 살아보자’는 말은 안 했었다. 비록 말은 안 했어도 부디 이렇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라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이후 나이를 먹어가면서 결혼식 주례를 몇 차례 맡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이 말을 해주었다. 서로를 보배롭게 여기면서 살아가길 바라면서.

아내는 머나먼 제천까지 음식강의 나가고, 나는 홀로 하루종일 밭이랑을 타며 양파모종을 심었다. 온 몸이 뒤틀리고 허리가 끊어질 듯 했다. 무릎은 심하게 저렸다. 여덟 단을 모두 심고 나니 해가 졌다. 왜 양파를 심는가. 밭이랑을 타며 수없이 많은 질문을 던졌었다.

모든 노동이 그렇듯 결론은 단순했다. 살아가기 위해서였다. 지금 양파를 심어 내년 춘궁기에 수확해서 팔아야 우리가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른 이유는 그야말로 사치스러운 군더더기에 지나지 않았다. 오직 살아가기 위해서였다.

이런 결론 앞에서 나는 한동안 넋을 놓았다. “이렇게 살아가야 하나.” 이번엔 이런 질문을 던져보았다. 막막했다. 내년, 내후년, 이후로도 계속 이 계절에 나는 여전히 이처럼 끊어질 듯한 허리를 부여잡고 양파모종을 심어야할 거였다. 겨울이면 화목 해 나르고, 봄이면 밭갈이하고 씨 뿌리고, 여름이면 풀 뽑고, 가을이면 이런저런 것들 수확해서 팔고, 그렇게 살아갈 일만 남았다. 몇 년을 더 기다려 기십만 원의 국민연금을 받고 기초노령연금 지급일을 기다리며 살아갈 일만 남았다. 내 나머지 세월은 이렇게 정해져 버렸다.

어느 순간 모든 것이 끝나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전지를 잊어버린 저 벽장시계처럼 속절없이 불가역적으로. 거친 오르막을 마주하거나, 험한 가시밭길을 만나거나, 가끔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야 할 이 고달픈 인생역정이 그냥 이쯤에서 멈춰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문득 아내의 그때 그 이야기가 떠오르곤 한다. 아내는 나보다 열배 백배 더 힘든 세월을 살았다. 어렵고 서러운 세월을 살았다. 더 그늘진 곳에서 더 낮은 모습으로 살았다. 더 부대끼면서 더 떠밀리면서 살았다.

이젠 나아져야 한다. 오로지 내 책임이다. 일부러 아내가 없는 날을 택해 양파모종을 심었다. 양파모종을 심는 그 힘든 일을 차마 아내에게 시킬 수 없어 홀로 감내한 노동이었다. 이박삼일 일정을 마치고 오늘 오후 아내가 돌아온다. 오늘은 바깥마당까지 환하게 쓸어놓을 작정이다.

글=김석봉ㅣ단디뉴스 2018.10.25

/ 2022.03.25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