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시대의 인문학>⑤ 관계, 타인은 정말 '지옥'일까 (daum.net)
[팬데믹 시대의 인문학] ⑤ 관계, 타인은 정말 '지옥'일까
■ 팬데믹 시대의 인문학 - 새로운 일상의 탄생
코로나 시대 고독감과 무력감 속에서 인간에겐
특별히 강렬하게 나타나는 ‘열정’이 생기게 된다.
그것은 다른 인간이나 집단과 하나가 됨으로써
고독감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열정이고
자신의 능력을 확인함으로써 무력감에서 벗어나려는 열정이다.
‘타인은 나의 지옥이다’라는 말은 2차 세계대전 이후 1950년대와 1960년대를 풍미했던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의 말이다. ‘타인은 나의 지옥이다’라고 말할 때 사르트르가 무엇보다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메두사의 시선처럼 나를 화석으로 만들어 버리는 타인의 차가운 시선이다.
우리는 자신을 자유로운 주체라고 생각한다. 설령 우리는 자신이 흉악한 범죄를 저질렀어도 죄를 뉘우치고 선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사업에 실패했어도 재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나를 이렇게 자유로운 주체로 보지 않는다. 사람들의 시선은 곤충을 핀으로 고정시켜 놓듯이 나를 악당으로 혹은 실패자로 확정해 버린다.
20세기의 명저 ‘존재와 시간’에서 마르틴 하이데거가 말하듯이 일상세계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종사하는 일의 수행자나 세간적인 가치의 구현자로서 나타난다. 사람들은 훌륭한 사업가나 무능한 사업가로, 혹은 훌륭한 직원이나 무능한 직원으로, 혹은 부자나 가난한 자로, 혹은 도덕적인 인간이나 비도덕적인 인간으로 나타난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항상 비교되면서 그 등급이 매겨지는 존재로 나타나는 것이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이렇게 암울하게 묘사한 철학자는 사르트르나 하이데거뿐만이 아니다. 염세주의 철학자로 유명한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에게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고슴도치들 간의 관계다. 고슴도치들이 서로 가까이 있으면 서로를 찌르듯, 우리 인간도 가까이 있으면 서로를 찌른다. 서로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자주 또한 더 혹독하게 서로를 찌른다. 코로나 사태 이후로 서로 붙어 있는 시간이 늘면서 이혼하는 부부가 늘었다는 것도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고슴도치들 사이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혼자 사는 것도 쉬운 것은 아니다. 더 이상 찔리지는 않겠지만 얼마 가지 않아 외로움의 한기에 떨게 되면서 다른 사람들의 따뜻한 살을 그리워하게 된다. 코로나 사태 이후 사람들이 거리두기 운동에도 불구하고 극구 서로 만나려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외로움에 지쳐서 서로에게 다시 다가가더라도 서로가 느끼는 살가움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조금만 더 오래 함께 있으면 우리는 다시 서로 찌르기 시작한다.
코로나 사태와 함께 우리는 사람들과의 접촉을 최대한 피하면서 살아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될 경우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 타인을 화석으로 만드는 메두사의 시선은 더욱 차가워지고, 고슴도치들처럼 서로를 찌르는 가시는 더욱 예리해질 것인가? 아니면 이 사태가 기회가 되어 우리의 시선에 온기가 깃들게 되고 우리 몸의 가시가 떨궈질 것인가?
우리 인간은 다른 동물과는 달리 무력감과 고독감에 쉽게 사로잡히는 존재다. 우리는 동물처럼 본능에 따라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계획하고 개척해 나가야 한다. 그러나 삶은 계획과 바람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우리는 예상치 못한 많은 장애에 부딪히게 되면서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 또한 자신의 삶을 개척하는 데 여러 사람이 도움을 줄 수도 있지만, 결국 자신의 삶에 대해서 책임질 사람은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뿐이라고 생각하면서 고독감에 빠지곤 한다. 언제 끝날지 도무지 기약도 할 수 없는 이 사태에 대해 우리가 울분을 느끼는 것은 사실 우리의 내면에서 은밀히 자라나고 있는 이런 고독감과 무력감 때문이다. 더군다나 코로나 사태가 몰고 온 경제위기와 함께 생존의 벼랑에 서게 된 수많은 사람이 느끼게 될 고독감과 무력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코로나 사태 이후로 우울증과 자살률이 증가했다는 소식이 들리지만, 이는 고독감과 무력감에 시달리는 사람이 그만큼 증가했다는 말일 것이다.
이런 고독감과 무력감에서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우리 인간에게만 특별히 강렬하게 나타나는 열정이 생기게 된다. 그런 열정이란 다른 인간들이나 집단과 하나가 됨으로써 고독감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열정이고, 자신의 능력과 힘을 확인함으로써 무력감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열정이다. 이런 열정들은 진화론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의 가장 근본적인 욕망으로 보고 있는 생존욕망보다 더 강렬한 것일 수 있다. 우리는 그런 열정들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고독감과 무력감에 시달리다가 생존을 포기할 수도 있는 것이다.
고독감과 무력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는 정치집단이나 종교집단을 비롯한 여러 집단에 참여하고, 또한 정치 이데올로기나 종교를 비롯한 갖가지 이념들에 매달리기도 한다. 혹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선망하는 부나 권력을 확보하려고 한다. 아니면 서로 무리를 지어 특정한 사람을 호기심과 험담으로 난도질하기도 한다. 이런 방법들을 통해 고독감과 무력감은 완화될 수 있겠지만 그 대신에 사람들은 집단과 이념 혹은 부와 권력의 노예가 되거나 잔인하고 천박한 존재가 된다. 그리하여 니체는 인간을 ‘병든’ 동물이라고 불렀다. 끊임없이 고독감과 무력감에 시달리면서 그것들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이 만들어낸 허구적인 이념들이나 허구적인 가치들의 노예가 되거나 한없이 천박한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코로나 사태는 우리 인간의 이런 병적인 성격을 더욱 강화할 것인가? ‘소유냐 존재냐’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들로 유명한 에리히 프롬은 고독감과 무력감은 어느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 사랑과 연대의 정신에 의해서만 건강하게 극복될 수 있다고 말했다. 진부하고 뻔한 이야기지만 여전히 진실일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롤프 데겐이라는 독일의 심리학자는 ‘악의 종말’이라는 책에서 우리에게는 의외로 많은 선함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힘없는 노인이나 아녀자의 돈을 강탈하지 않으며 그렇게 강탈했다는 인간의 소식을 들으면 분노한다. 우리에게는 악하고 병든 심성보다는 이런 선한 심성이 더 많이 존재하기 때문에 사회가 유지될 수 있다. 토머스 홉스가 말하듯 우리 인간의 관계가 ‘인간은 서로에 대해 늑대’ 식의 관계라면 아무리 국가권력이 강하게 통제를 하더라도 하나의 사회가 제대로 유지되기는 힘들다.
우리는 서로를 메두사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고슴도치처럼 찌르면서도 이런 인간관계에 대해서 염증과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한다. 우리는 또한 조성모가 부른 ‘가시나무새’의 노랫말에서처럼 ‘가시가 너무나 많아 다른 사람의 쉴 곳이 될 수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한탄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우리는 에마뉘엘 레비나스가 말하듯 전쟁고아처럼 무방비 상태로 곤경에 처한 타인의 얼굴을 볼 때 가슴이 아리면서 책임감과 함께 죄책감을 느끼기도 한다.
사르트르 역시 우리에게는 메두사의 시선만이 존재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 역시 여러 작품에서 사랑과 연대의 따뜻한 시선을 묘사하고 있다. 하이데거 역시 비교의식과 호기심 그리고 험담으로 점철돼 있는 삶을 비본래적인 실존이라고 부르면서 우리에게는 이런 비본래적인 실존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쇼펜하우어 역시 우리가 고슴도치처럼 찌르거나 외로움에 시달리는 관계를 넘어서 서로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말한다.
코로나 사태는 우리에게 잠재하는 이런 사랑과 연대의 가능성을 일깨우면서 구현하는 사태가 될 수도 있다. 희생적으로 환자를 돌보는 의료진,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방역의 책임을 묵묵히 다하는 공무원들, 많은 자원봉사자는 코로나 사태가 우리의 선한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때 코로나 사태는 우리가 평소에 느끼는 고독감과 무력감을 심화시키는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생산적이고 건강한 방식으로 극복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박찬국 서울대 철학과 교수
박찬국 /서울대 철학과 교수. 니체와 하이데거의 철학을 비롯한 실존철학이 주요 연구 분야로 원효학술상, 운제철학상, 반야학술상 등을 받았다. 저서로는 ‘사는 게 힘드냐고 니체가 물었다’ ‘들길의 사상가, 하이데거’ 등이 있다.
[문화일보·도서관 길위의 인문학 공동기획]
■ 성찰을 위한 액션 플랜
타인은 내 삶에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타자를 ‘보는’ 것은 ‘나’를 보는 것과 같다. 목적은 명확하다. ‘함께’ 존재하기 위해. 이러한 ‘타자성의 철학’을 정립한 인물은 리투아니아 출신 프랑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1906~1995)다. 그는 자기중심적인 기존 서양철학을 비판, 타자에 대한 책임을 우선시한 윤리학을 전면에 내세웠다.
레비나스 철학의 핵심을 명쾌하게 설명한 책으로는 우치다 다쓰루 일본 고베여대 교수의 저서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갈라파고스)을 꼽을 수 있다. 그는 레비나스의 ‘사제론’과 ‘타자론’, ‘에로스론’ 등에 대한 개인적 고찰을 통해 연대가 점차 사라지는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왜 타자를 향해 따뜻한 시선을 가져야 하는지 설파한다.
오스트리아 사회학자 라우라 비스뵈크가 쓴 ‘내 안의 차별주의자’(심플라이프)는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가 옳다고 확신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숨은 독선과 혐오, ‘경계 짓기’의 시선을 비판적으로 성찰한다. ‘우리’와 ‘남들’에 대한 구분이 폭력적 차별로 이어지는 과정을 다양한 이론과 실제 사례를 중심으로 파헤치면서 서로 다른 생각을 지닌 이들이 제대로 관계 맺는 길을 제시한다. 저자는 “차별과 구분은 민주주의 사회의 안정과 결속을 해친다”며 “함부로 타인에게 손가락질하지 않는 연대와 품위, 공감의 자리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박동미 기자문화일보 2020.11.02
/ 2022.03.23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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