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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시대의 인문학] ② 세계와 개인 그리고 소명 : 팬데믹 시대의 성찰 (2022.03.23)

푸레택 2022. 3. 23. 17:44

<팬데믹 시대의 인문학>② 세계와 개인 그리고 소명 : 팬데믹 시대의 성찰 (daum.net)

 

<팬데믹 시대의 인문학>② 세계와 개인 그리고 소명 : 팬데믹 시대의 성찰

■ 팬데믹 시대의 인문학 - 새로운 일상의 탄생 코로나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다른 형태의 삶에 대해 검토하기 시작했다는 점은 적어도 긍정적이다. 그것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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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 백두리 작가
우치다 다쓰루

[팬데믹 시대의 인문학] ② 세계와 개인 그리고 소명 : 팬데믹 시대의 성찰

■ 팬데믹 시대의 인문학 - 새로운 일상의 탄생

코로나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다른 형태의 삶에 대해 검토하기 시작했다는 점은 적어도 긍정적이다. 그것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나는 실은 무엇을 하고 싶었던가’ ‘내가 필요한 곳은 어디인가’라는 질문을 할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코로나 이후 ‘세계’는 어떻게 변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국제정치라든가 국제경제라든가, 범위가 넓을수록 예측은 쉽다. 글로벌 자본주의는 잠시 정체될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반성 속에 그 명맥이 흔들릴 것이다, 자국 우선주의·내셔널리즘·배외(排外)주의도 만연할 것이다,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줄어들고 환경파괴 속도가 조금 늦춰질 것이다. 이 정도 전망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시스템이 크면 클수록 그만큼 ‘타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 작은 현상이라면 어떨까. 개인의 일상은 아주 작은 외부의 자극에도 크게 요동치곤 한다. 그만큼 예측도 어려워진다.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상황에서 지금 세계의 시스템 중 어디가 취약한지, 우린 아주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이번에 밝혀진 것 중 하나는 (별로 지적하는 사람이 없지만) 미국의 세계 전략에 큰 ‘구멍’이 있었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가장 먼저 대규모 집단 감염이 발생한 곳은 크루즈선이었고 미국 해군의 항공모함 시어도어 루스벨트 호도 지난 3월 태평양 항해 중 100명이 넘는 감염자를 냈으며, 이들의 퇴피(退避)를 위해 작전 행동을 변경해야 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함선은 감염증에 매우 취약하다. 폐쇄된 공간에서 많은 사람이 함께 생활하는 군대도 마찬가지다. 즉, 함선과 군대는 전염병에 약하다. 그런데 잠수함은 항공모함보다 더 취약하다. 승무원에게 허용된 공간이 매우 좁고, 환기 수준도 항공모함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는 군사적 긴장이 있는 지역에 항공모함을 파견, 전투기와 헬기를 띄워 제해권(制海權)·제공권(制空權)을 행사하고 잠수함에서 미사일을 발사하는 전통적인 미국의 해외파병 체제를 당분간 사용할 수 없게 됐음을 의미한다. ‘감염자가 생겨 어느 함선이 언제 사용 불능이 될지 모른다’는 조건 아래에서 작전 행동을 입안, 실시하기는 어렵다. 미국 국방부 관리들은 지금쯤 골머리를 앓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당분간 미국은 지금까지 베트남과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등에서 해왔던 것과 같은 ‘재래식 무기에 의한 군사행동’을 억제할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게 맞으면 결과적으로 ‘(겉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되기에, 나의 예측을 사후 검증할 수 없다.

좁은 곳에 사람을 밀어 넣거나 모두 똑같은 행동을 하는 게 어렵다고 한다면, 자동적으로 도시생활 자체는 불가능한 것이 되고 만다. 도시에서의 삶이란 생활의 리듬이 일치하고, 비슷한 행동방식의 사람들이 잔뜩 밀집해 사는 것이기에 혹시 전염병을 확산시키고 싶다면 도시생활만큼 좋은 것도 없다. 이제 여기서, 개인 차원에서 ‘전염병을 예방하는 삶의 방식’이 어떤 것인지 논리적으로 정해진다. 그것은 서로 생활의 리듬을 달리하고, 가능한 한 비슷한 행동을 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사는 것이다.

1665년 런던을 덮친 흑사병으로 46만 명의 런던 시민 중 7만5000여 명이 죽었지만, 대니엘 디포(1660∼1731)의 ‘페스트, 1665년 런던을 휩쓸다(A Journal of The Plague Year)’를 읽어보면, 살아남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없는 곳’에서 ‘다른 사람이 하지 않는 일’을 하며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 부자들은 유행 초기에 교외로 도망쳤다. 식량을 대량으로 사 모아 수개월간 집 안에 틀어박혀 지낸 사람도 있었다. 도망칠 곳도, 사재기할 돈도 없는 이들은 시내에서 계속 일하며 하루하루 먹을거리를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 사람들이 대부분 흑사병에 걸려 죽어 나갔다.

일본에선 젊은 세대의 지방 이주·이산(離散)이 진행되고 있다. 이 트렌드는 팬데믹 이전부터 있었지만 코로나 이후에 더욱 가속화된다. 농어촌에 살면서 불특정 다수와 접촉할 기회가 별로 없는 생활을 한다면, 다시 말해 만원 전철을 타고 출퇴근하고, 좁은 사무실에서 복작거리며 일하거나, 라이브클럽에서 소란을 피우지 않으면, 감염 위험은 거의 제로로 줄어든다. 늘 하던 대로 일하고 그것만으로 생명과 건강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은 스트레스가 없는 생활방식이다. 물론 팬데믹 때문에 사회적으로 경제활동이 축소되고 유통이 막히면 지방에서의 삶도 차질을 빚을 것이다. 폐업이나 도산하는 사업체도 나올 것이다. 그러나 농어촌은 기본적으로 식량을 생산하는 곳이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먹는 것에는 어려움이 없다’.

게다가 아무리 사회활동이 줄어들어도 사회적 인프라의 관리운영, 의료, 교육, 그리고 종교생활 없이 인간은 살아갈 수 없다. 이 중 어느 영역이든, 어디에 있든간에 어느 정도 전문적인 기술과 지식을 갖춘 사람이면 그것을 생업으로 삼아 살아남을 수 있다. 인간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 절대 없어선 안 될 일들 가운데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무엇인지, 이번 기회에 꼭 생각해보길 바란다. ‘그 직무를 맡을 사람이 없으면, 세상이 잘 돌아가지 않는 일’ 이외에는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말한, 이른바 ‘쓸데없는 직업(Bullshit jobs)’이다. 아마 이번 코로나 사태가 당신이 하는 일이 쓸데없는 직업인지 아닌지를 알려줬을 것이다.

코로나로 인해 도시생활의 취약성이 드러나고 많은 사람이 다른 형태의 삶에 대해 검토하기 시작했다는 점은 적어도 긍정적이다. 그것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나는 실은 무엇을 하고 싶었던가’ ‘내가 필요한 곳은 어디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라도 (비록 그것이 팬데믹이라고 해도), 자신을 향한 근원적인 질문은 좋은 것이다. 이 물음에 서둘러 답할 필요는 없다. 그렇게 당황하지 않아도 된다.

‘천직’ 혹은 ‘소명’을 영어로는 ‘calling’이나 ‘vocation’이라고 한다. 모두 ‘부르다’라는 동사의 파생어다. 우리 대부분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스스로 선택한 경우가 별로 없다. 얼김에 누군가가 ‘불러서’ 그 일을 하게 됐고, 정신을 차려 보니 ‘천직’이 돼 있는 것이다. 그것은 종종 ‘자신이 그런 일을 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다.

시작은 대체로 같다. 우연히 만난 사람으로부터 “부탁해요. 이걸 해주세요(부탁할 사람이 당신밖에 없거든요)”라고 들었다. 상대방이 어떤 근거로 나를 선택했고, 내가 어쩌다 그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는지, 그것은 모른다. 하지만 이런 경우 외부평가가 자기평가보다 객관성이 높다고 느끼기에 이를 따르게 된다. 많은 사람이 지금까지 그렇게 천직을 만나왔다.

코로나 때문에 살기 어려워진 도시를 떠나, 지방으로 이주하려는 사람들을 향해 “도대체 너는, 낯선 땅에 가서 무엇을 할 생각이냐? 제대로 된 계획은 있느냐? 어떻게 생계를 유지할 생각이냐?”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는 사람도 많이 있겠지만, 거기에 대해서는 솔직히 “모른다”고 대답해 두자. 왜 그런지 모르지만 시골에서 살고 싶어졌다. 그곳에서 내가 무엇을 하게 될지 그건 아직 모른다. 그러니 일단 당분간은 ‘소명’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지내려 한다고 솔직하게 대답하면 될 것 같다. 왜냐하면 ‘소명이 오는 것을 기다리는 것’만큼 인간적인 시간을 보내는 방법도 없기 때문이다.

소명이라고 해도, 성경에 나오는 것처럼 천둥 번개가 친다거나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는 그런 극적인 장면 속에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대개 ‘좀 도와주지 않겠니?’ 같은 가벼운 의뢰 형태로 도래한다. 내가 알기로는 천직을 순조롭게 만난 사람의 90%는 이런 식이다.

‘나는 정말 무엇을 하고 싶었던가’라고 자문하면서 ‘소명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나라 안에 수만 명, 수십만 명씩 있다면 세상은 아주 온화하고 기분 좋은 곳이 되지 않을까. 코로나는 수많은 사람의 목숨과 건강을 앗아가고 있으며, 또 경제적 곤궁으로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다. 하지만 이를 기회로 각국의 군사행동이 억제되고, 환경파괴가 멈추고 글로벌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성이 시작되고, 자신의 삶에 대해 근원적인 물음을 던지며 ‘소명’의 목소리를 찾아 귀 기울이는 사람들이 나온다면, 이 역병에서도 조금은 ‘이로운 것’을 끌어낼 수 있었다고 이야기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우치다 다쓰루 고베여대명예교수, 번역·정리=박동미 기자

우치다 다쓰루 (內田樹) : 현대 일본의 대표 사상가. 고베여대 명예교수. 전문 분야인 프랑스현대사상뿐만 아니라 문학, 철학, 정치를 넘나드는 해박한 지식과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50여 권의 저서를 냈다. 대표작은 ‘망설이는 윤리학’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 ‘일본변경론’ 등이 있다.

[문화일보·도서관 길위의 인문학 공동기획]

영화 ‘탈출’ 책 ‘불시트 잡스’ 등 팬데믹 시대, 성찰·사유를 위한 ‘액션 플랜’

팬데믹 시대, 우치다 다쓰루 교수는 ‘내가 진정 원하는 건 무엇인가’ 라는 질문 앞에 서는 것이, 새로운 일상을 만드는 첫걸음이라고 했다. 그 성찰과 사유의 시작을 위한 ‘액션 플랜’으로 영화와 책을 추천한다.

▶ 영화 ‘탈출’(The Escape)= 2017년 폴 프랭클린 감독이 만든 16분짜리 영화. 1958년 로버트 셰클리의 공상과학 단편 ‘세상을 파는 가게’가 원작이다. 주인공 남성이 전 재산을 내면 원하는 인생을 ‘잠시’ 맛보게 해준다는 가게를 알게 된 후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우리가 모든 걸 바쳐서라도 ‘사고 싶은’ 세상은 어떤 풍경일까. 반전의 묘미가 있는 영화는 짧고, 강렬하고, 여운이 길다. 책 ‘펜데믹 패닉’(북하우스)에서 슬라보예 지젝은 “팬데믹이 남긴 폐허 위에 우리가 어떤 세상을 세워야 할지 궁리하기 시작해 보시라”고 권한 영화다. 동영상 공유 사이트에서 볼 수 있으며, 소설은 SF 단편선 ‘최후의 날 그후’(에코의서재)에 실려있다.

▶ ‘Bullshit Jobs’(불시트 잡스·쓸데없는 직업)= 지난 9월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세계적인 인류학자 그레이버가 2018년 발표한 책. 우치다 교수는 그레이버의 말을 인용해, ‘코로나’로 인해, 그간 우리가 영위해 온 일들의 ‘쓸모’가 판명되는 중이라고 했다. ‘헛된 일’이 아니라 일의 진정성을 찾는 이들을 위한 지침서. 정식 한국어판은 없으나 폴 크루그먼 등 8인의 석학이 미래를 논한 ‘거대한 분기점’(한즈미디어)에 그 내용이 일부 담겨 있다.

▶ ‘A Journal of The Plague Year’=‘로빈슨 크루소’의 작가 다니엘 디포(1660~1731)가 페스트가 런던을 휩쓸 당시를 연대기적으로 정리한 논문. ‘페스트, 1665년 런던을 휩쓸다’(부글)라는 제목으로 국내서도 출간됐다. 코로나 사태와 함께 최근 다시 소환된 고전.

▶ ‘전염의 시대를 생각한다’=파올로 조르다노가 코로나 초기,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이탈리아 상황을 쓴 책. 책 발간 반년이 지났으나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각자가 알아서, 그리고 함께 성찰해야 한다”고 강조한 그의 말은 더욱 명징해졌다. 미래는 알 수 없지만, 그의 말대로 이건 분명하다. “생각하는 용기를 내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박동미 기자ㅣ문화일보 2020.10.12

/ 2022.03.23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