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4) / 떨어진 런닝구의 아름다움 - 배한권의 '엄마의 런닝구' - 뉴스페이퍼 (news-paper.co.kr)
[이승하 시인의 ‘내 영혼을 움직인 시’] (14) 떨어진 런닝구의 아름다움 - 배한권의 '엄마의 런닝구'
엄마의 런닝구 / 배한권(경북 경산군 부림초등학교 6학년)
작은누나가 엄마 보고
엄마 런닝구 다 떨어졌다,
한 개 사라 한다
엄마는 옷 입으마 안 보인다고
떨어진 걸 그대로 입는다
런닝구 구멍이 콩만 하게
뚫어져 있는 줄 알았는데
대지비만 하게 뚫어져 있다
아버지는 그걸 보고
런닝구를 쭉쭉 쨌다
엄마는
와 이카노.
너무 째마 걸레도 못 한다 한다
엄마는 새걸로 갈아입고
째진 런닝구를 보시더니
두 번 더 입을 수 있을 낀데 한다
― 『국어시간에 시 읽기 1』(나라말, 2000)
<해설>
‘전국국어교사모임’에서 2000년에 책을 한 권 냈다. 『국어시간에 시 읽기 1』이란 책이다. 그때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배군은 이제 막 서른 살이 되었을 텐데 어디서 잘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엄마가 입고 있는 다 떨어진 러닝이 내 코끝을 찡하게 한다. 이런 ‘궁상맞은 엄마’들이 우리나라를 지킨 게 아닐까. 자신의 의복이나 몸은 살피지 않고 자식 걱정, 집안 걱정만 하다가 돌아가신 우리들의 할머니와 어머니, 고모와 이모, 누나와 누이들. 남자들은 ‘빨갱이’가 되어 지리산에서 죽기도 했고 베트남전쟁에서 죽기도 했다. 집안에 남정네가 있어도 술추렴에 노름판에 시앗 보기에…. 허구한 날 주먹질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동시에서는 아버지의 태도가 재미있다. 아내의 궁상맞은 행동이 몹시 창피했던 것인데, 아무 말 없이 러닝셔츠를 찢어발기고 있으니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의 성격이 잘 드러나 있다.
투박하기 짝이 없는 경상도 사투리가 이 동시를 살리는 데 한몫하고 있다. 꾸밈없이 쓴 아이의 동시가 시의 참맛을 전해준다. 내 할머니가 바로 이런 ‘런닝구’를 입고 계셨다. 남편을 40대에 여의고 여섯 남매를 홀로 키웠다.
<이승하 시인 약력>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소설 당선.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시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감시와 처벌의 나날』, 『아픔이 너를 꽃피웠다』, 『나무 앞에서의 기도』, 『생애를 낭송하다』 등과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을 펴냄. 산문집 『시가 있는 편지』, 『한밤에 쓴 위문편지』,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최초의 신부 김대건』 등을, 문학평론집 『세속과 초월 사이에서』, 『한국문학의 역사의식』, 『욕망의 이데아』, 『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 등을 펴냄. 시창작론 『시, 어떻게 쓸 것인가』도 있음. 지훈상, 시와시학상, 가톨릭문학상, 편운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출처 : 뉴스페이퍼 2019.04.28
/ 2022.03.21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