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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서 평론] ‘나 하나의 사랑’의 가수 송민도의 삶과 노래 (2022.03.12)

푸레택 2022. 3. 12. 15:06

뉴스메이커 (newsmaker.or.kr)

 

뉴스메이커

[박성서 평론] ‘나 하나의 사랑’의 가수 송민도의 삶과 노래 허스키한 알토의 매력적인 저음으로 등장, 우리나라‘미성의 시대’를 ‘개성의 시대’로 바꾸다 우리나라 드라마주제가 1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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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서 평론] ‘나 하나의 사랑’의 가수 송민도의 삶과 노래

허스키한 알토의 매력적인 저음으로 등장, 우리나라‘미성의 시대’를 ‘개성의 시대’로 바꾸다

우리나라 드라마주제가 1호인 ‘청실홍실’을 비롯해 ‘고향초’ ‘나 하나의 사랑’ ‘카츄샤의 노래’ ‘행복의 일요일’ 같은 히트곡과 더불어 우리 가요의 수준을 한 단계 올려놓았다고 평가 받는 송민도 여사는 어느덧 94세. 1971년에 도미, 현재 미국 LA의 오렌지카운티에서 생활하고 계시다. 트롬본 연주인으로 KBS 경음악단장을 역임했던 작곡가 송민영씨가 그의 남동생, 그리고 장남 서동헌씨는 70년대 활동하던 그룹 드래곤스(Dragons)의 멤버로 키보드를 담당했다. 이른바 음악가족이다.
 
필자가 송민도 여사를 만난 것은 15년 전인 지난 2006년, KBS ‘가요무대 1천회 기념 특집’ 무대에 초청받아 잠시 내한했을 때다. 도미한지 11년 만의 귀국이었다.
체류 기간 내내 동행했는데 특히 옛 스승이었던 ‘청실홍실’ ‘나 하나의 사랑’의 작곡가 손석우, 그의 대표곡인 ‘목숨을 걸어놓고’ ‘행복의 일요일’의 작사가 고(故) 반야월, 가수 금사향 선생을 비롯해 당시 가요작가협회 김병환 이사장과 함께 만나는 자리를 주선했다. 당시 88세의 손석우 선생과  91세의 반야월 선생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건강하시다는 것에 감동했다며 감격스런 심정을 토로하던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때마침 나는 그 무렵 서울신문에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을 연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상황을 기사로 전할 수 있었다. 당시 칼럼과 함께 다시 재조명해보는 송민도의 삶과 노래.

글 l 박성서 (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이 노래 첫 소절의 ‘나 혼자만이...’는 당시 인기작가 박계주에 의해 소설화되고 이어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우리나라에서 히트가요가 영화화된 최초의 노래인 셈이다.


‘나 하나의 사랑’의 작곡가 손석우, 그리고 송민도...


가수 송민도 여사에 관한 근황을 전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얼마 전 작곡가 손석우 선생을 만나면서다. 근 1년 만에 찾아뵙는 손석우 선생 부부는 평소 걱정과 달리 매우 건강하셨다. 내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97세 되신 분과 이야기 나눠 본 것은 처음 경험해 본 일인 만큼 현재 생존해 계신 우리나라 가요계 최고 어르신이다. 또한 여전히 현역이시다. 얼마 전 새로 만든 악보 한 장을 보여주시는데 제목은 ‘정남진 내 고향’, 노랫말에 고향 장흥의 사계를 담았다.

불과 몇 해 전까지 메일을 주고받으시던 멋쟁이, 하지만 이제 인터넷은 하지 않으신단다. 대신 평소 운동을 겸한 산책 코스인 노블카운티 타운을 한 바퀴 돌며 곳곳을 안내해주시는데 그야말로 없는 게 없다. 은행, 병원, 국제회의장, 세미나실, 헬스센터... 이곳에 거주하는 주민은 1천명인데 상주하는 직원은 6백 명 정도란다. 도서관도 있었는데 주말이라 직원 한명만 출근, 그나마 점심식사 시간인 탓에 문이 닫혀져 있었다.

도서관에는 선생님 저서의 책도 두 권 비치되어 있는데 얼마 전부터 그중 한권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누가 쌔벼간 것 같다^^’는 게 선생님께서 직접 하신 표현. 평소 건강에 대한 우려를 말끔히 씻어준 두 시간 동안의 동행이었다. 세 살 아래인 사모님도 건강하시다.

1년 여 못 뵌 그 사이에 ‘손석우 노래비’가 고향인 장흥에 세워졌다. 그에게 '한류 1호 작곡가'라는 수식어를 안겨준 '노오란 셔쓰의 사나이(노래 한명숙)’의 노랫말과 함께 장흥읍 억불산 우드랜드 입구에 지난 2015년 8월에 세워진 것. 이보다 먼저 또 하나의 노래비가 ‘나 하나의 사랑’의 노랫말과 함께 지난 2014년 10월, 남이섬 노래박물관 앞에 건립되었다. 필자가 구성과 진행을 맡았던 ‘손석우 특별전’을 기념해서다. 이 노래 ‘나 하나의 사랑’을 부른 주인공이 바로 가수 송민도씨다.

나 하나의 사랑


나 혼자만이 그대를 알고 싶소
나 혼자만이 그대를 갖고 싶소
나 혼자만이 그대를 사랑하여
영원히 영원히
행복하게 살고 싶소

나 혼자만을 그대여  
생각해 주
나 혼자만을 그대여 껴안아 주
나 혼자만을 그대는 믿어 주고
영원히 영원히
변함없이 사랑해 주

- 손석우 작사 작곡, 송민도 노래.

50, 60년대 당시 결혼축가로 많은 사랑받았던 이 왈츠풍의 아름다운 노래는 노랫말과 멜로디가 따로 있어야 한다는 공식을 깬 최초의 노래이자 작사, 작곡의 1인 시대의 장을 연 이 노래다. 또한 이전까지 주류를 이룬 ‘요나누끼(よなぬき)음계’에서 탈피, ‘파’음과  ‘시’음을 사용한 정통 장조를 시도한 노래이기도 하다.
자연스레 화제는 가수 송민도씨의 이야기로 이어졌다. 마침 얼마 전 미국의 지인에게 전해들은 건강히 잘 계시다는 근황을 전했다.

송민도 여사는 이 노래 ‘나 하나의 사랑’을 비롯해 우리나라 드라마주제가 1호인 ‘청실홍실’을 부른 주인공이다. 당시 KBS 전속가수로 활동하고 있었고 손석우 선생 역시 KBS에서 가요방송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는 가수 송민도씨에게 특별히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1950년대 중반, 오아시스레코드와 손잡고 음반을 내기 시작할 무렵 송민도씨를 레코드사에 전속을 건의, 계약금을 준비했지만 이미 타 레코드사와 계약을 한 뒤라 무산됐다며 지금도 아쉬워했다.

송민도 여사를 필자가 만나 인터뷰한 것은 11년 전인 지난 2006년이다. 당시 가요무대 1000회 특집무대에 서기 위해 내한했을 때로 특히 KBS 측에서 이 무대에 세우기 위해 공을 들였다. 때마침 나는 서울신문에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이라는 칼럼을 연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이야기를 기사로 쓸 있었다. 그 칼럼을 소개한다.

송민도, 국내 최초 ‘허스키 보이스 시대’ 열다


‘우리나라 드라마주제가 1호’인 ‘청실홍실’을 비롯해 ‘고향초’ ‘나 하나의 사랑’ ‘카츄샤의 노래’ 같은 히트곡들로 지금까지도 여전히 사랑받고 있는 가수 송민도씨. 당시 ‘꾀꼬리 같은 미성’의 가수들이 각광받던 시대에 우리나라 최초로 허스키 보이스를 구사하며 등장, 애상이 깃든 부드러운 저음과 특유의 지적인 분위기로 특히 인텔리 층에서 높은 인기를 구가했다.

우리 가요의 수준을 한 단계 올려놓았다고 평가 받는 송민도 여사, 현재 미국 LA의 오렌지카운티에서 생활하고 있는 그녀가 내한했다. ‘가요무대 1천회 축하공연’ 무대에 서기 위해 KBS 측의 초청으로 10여년 만에 고국 땅을 밟은 것. 몇 년 전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인해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였다. 송민도 여사가 미국으로 건너가 생활한 것은 71년부터. 벌써 35년째의 미국생활이지만 아직도 전화를 받을 때면 항상 ‘여보세요’하고 먼저 한국말로 전화를 받는다.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난 송민도씨는 감리교 목사인 부친을 따라 2~3년에 한 번씩 이사를 다녀야했다. 평안남도의 삼화보통학교를 나온 뒤 서울 이화고녀을 졸업했다. 그의 어머니 역시 이화학당 출신으로 어머니는 김활란 여사와 동창이고 송민도씨는 이휘호 여사와 동기동창이다. 학업을 마친 후 만주 용정에서 유치원 보모 생활을 잠시 한 뒤 결혼과 함께 연길로 거처를 옮긴 송민도 여사는 8.15 광복을 맞아 다시 가족과 함께 서울로 돌아온다.

이때까지만 해도 한 아기의 엄마이자 독실한 크리스찬으로 살아가는 평범한 주부였던 그가 서울 온지 2년만인 47년, 가요계의 흐름을 바꾸어놓는 대형가수로서 첫 발을 내딛는다. 이때가 그녀의 나이 스물넷. 당시에는 가수 데뷔가 거의 불가능해보였던 이 ‘애 딸린 주부’가 당시 중앙방송국(현 KBS) 전속가수 모집에 응시한 것. 남편이 먼저 제안해 용기를 냈다. 
 
“당시 선발시험에서 첫 테스트는 ‘자신이 가장 자신 있게 부를 수 있는 노래’를 먼저 부르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현제명 작곡의 ‘니나’를 불렀는데 심사위원들이 계속해서 가요를 한 곡 더 부르라고 요청하는데 그때까지 가사를 끝까지 아는 노래가 하나도 없었어요. 그래서 고민 끝에 앞사람들이 부르던 당시 유행가, 장세정의 ‘역마차는 달린다’를 불렀는데 결국 가사를 몰라 중간에서 중단되었지요. 더구나 이 선발대회 실황이 라디오 전파에 실려 그대로 생중계 되고 있었기 때문에 얼마나 당황했었는지...” 송민도 여사는 당시 상황을 비교적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방송국 전속가수 1기생’으로 발탁된다. 이 때 방송국 전속가수 동료로는 이예성, 원방현, 김백희, 옥두옥씨 그리고 1차에 함께 응시했다가 2차로 전속가수에 합류한 고대원, 금사향씨 등이다. 입사 후 3개월간의 교육과정을 거쳐 송민도씨는 그의 데뷔곡이자 대표곡인 ‘고향초’를 첫 취입한다. 그러나 이 때 음반에는 본인도 모른 채 이름이 ‘송민숙’으로 표기된다. 음반사 측에서 '송민도'라는 이름이 ‘남자 이름 같다’며 일방적으로 바꾼 것. 본명 송민도라는 이름은 ‘하늘 민(旻), 길 도(道)’ 자, 즉 ’하늘가는 길’이라는 뜻으로 목사였던 부친이 직접 지어준 이름이다.

정작 본인은 이 노래 ‘고향초’가 어느 정도 히트되었는지 당시엔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3년 뒤 6.25 한국전쟁이 발발해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하던 중 남녀노소, 모두 이 노래를 즐겨 부르는 걸 보고 한편 눈물겨웠다고 회고한다.

고향초

남쪽나라 바다멀리 물새가 날으면
뒷동산에 동백꽃도 곱게 피는데
뽕을 따던 아가씨들 서울로 가고
정든 사람 정든 고향 잊었단 말인가.

찔레꽃이 한잎 두잎 물위에 내리면
내 고향에 봄은 가고 서리도 찬데
이 바닥에 정든 사람 어디로 갔나
전해오던 흙냄새를 잊었단 말인가.

-김다인 작사, 박시춘 작곡, 송민도 노래

‘김다인 작사, 박시춘 작곡, 송민숙(송민도) 노래’로 표기되어 처음 발표된 노래 ‘고향초’는 작사자 김다인(茶人)이 ‘다인(多人)’일 수도 있다는 논란도 한때 제기되었지만 현재 작사자는 조명암 선생으로 밝혀졌다. 현재 ‘조영출(조명암) 시와 노래비’의 뒷면에 약력과 함께 1절 가사가 새져져 있다. 이 비는 2000년 1월 1일, 강원도 고성 금강산 건봉사 경내에 건립되었다. 앞면은 시 ‘칡넝쿨’이 새겨져 있다.

우리나라 드라마 주제가 제1호인 ‘청실홍실’의 주인공이 되다

이 무렵인 6.25 한국전쟁 당시 부산 피난생활 중 만난 당시 작곡가 손석우씨로 부터 페티 페이지의 ‘I Went to Your Wedding’을 번안한 ‘눈물의 왈츠'를 받아 취입하기도 했다.
 
9.28 서울 수복 이후 그녀도 북진하는 국군을 따라 정훈공작대에 소속되어 ‘군번 없는 용사’로 참전, 목숨을 건 위문공연활동을 펼친 뒤 전쟁 후에서야 본격적으로 가수활동을 펼친다. 그리고 전쟁의 상흔이 점차 아물어가던 1956년, 드라마 주제가 제1호인 ‘청실홍실’을 취입한다. 

청실홍실

청실홍실 엮어서 정성을 들여
청실홍실 엮어서 무늬도 곱게
티 없는 마음속에 나만이 아는
음---- 음---- 수를 놓았소.

인생살이 끝없는 나그네 길에
인생살이 끝없는 회오리바람
불어도 순정만은 목숨을 바쳐
음---- 음---- 간직했다오.

청실홍실 수놓고 샛별 우러러
청실홍실 수놓고 두 손을 모아
다시는 울지 말자 굳세게 살자
음---- 음---- 맹세 한다오.

- 조남사 작사, 손석우 작곡, 안다성 송민도 노래

1956년, 작곡가 손석우 선생은 방송국으로부터 국내 최초로 ‘청실홍실’ 드라마 주제가 작곡을 제의받았다. KBS ‘노래수첩’ 등 가요방송의 지휘를 맡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러나 막상 곡을 쓰려니 가사가 다소 짧은 듯했다. 해서 임의로 첫 구절을 반복하고 원고에 없는 허밍을 4소절 써놓고 32소절로 다듬어 안다성씨와 송민도씨가 녹음하고 있는데 현장에 와 있던 작가 조남사 선생이 듣고 있다가 그 자리에서 반복한 곳을 다르게 고쳐 써주었다. 결국 이 노래가 우리나라 드라마주제가 제1호로 자리매김 되면서 이후 드라마에는 반드시 주제가가 있어야 한다는 공식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음반은 오아시스레코드사를 통해 현인, 백일희의 목소리로 발매되었다. 송민도씨가 타 음반사에 전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듯 허스키한 알토의 저음으로 등장한 송민도씨는 우리나라 드라마 주제가 1호인 ‘청실홍실’에 이어 ‘나 하나의 사랑’을 발표한다. 이 노래 첫 소절의 ‘나 혼자만이...’는 당시 인기소설가 박계주씨에 의해 소설화되고 이어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우리나라에서 히트가요가 영화화된 최초의 노래인 셈이다.

‘송민도’라는 이름이 남자 이름 같다는 이유로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음반에 ‘송민숙’이라 표기되기도 했던 그는 주위의 권유로 한 때 ‘백진주’라는 지극히 여성적인 예명으로 잠시 활동, ‘아네모네 탄식(이재호 작곡)’ 등을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송민도’라는 이름으로 돌아온 그는 60년대 개성시대를 주도하며 ‘목숨을 걸어놓고’ ‘여옥의 노래’ ‘서울의 지붕 밑’ ‘하늘의 황금마차’ ‘청춘목장’ ‘행복의 일요일’ 등 명곡들을 잇달아 발표한다. 그중 지금까지 사랑받고 있는 ‘카츄샤의 노래’는 1960년에 제작된 영화 ‘카츄샤(’Katchusa)의 주제가다. 유두연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최무룡, 김지미, 김동원, 황정순 등이 열연했다.


카츄샤의 노래

마음대로 사랑하고 마음대로 떠나가신
첫사랑 도련님과 정든 밤을 못 잊어
얼어붙은 마음속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오실 날을 기다리는 가엾어라 카츄샤
찬바람은 내 가슴에 흰 눈은 쌓이는데
이별의 슬픔안고 카츄샤는 흘러간다.

진정으로 사랑하고 진정으로 보내드린
첫사랑 맺은 열매 웃기 전에 떠났네
내가 지은 죄이기에 끌려가고 끌려가도
죽기 전에 다시 한 번 보고파라 카츄샤
찬바람은 내 가슴에 흰 눈은 쌓이는데
이별의 슬픔안고 카츄샤는 흘러간다.

- 유호 작사, 이인권 작곡, 송민도 노래

‘백만불쇼단’을 결성, 쇼단을 이끌다

아울러 63년, ‘백만불쇼단’을 직접 결성해 단장을 맡으며 쇼단을 이끌었다. 가수 남일해, 고대원씨를 비롯해 무용단, 밴드 등을 합쳐 모두 25명 정도로 구성된 ‘백만불쇼단’은 가는 곳마다 인기가 높았지만 당시 여건에서는 늘 적자로 운영되어 고되고 힘들었다.

“방송활동과 더불어 계속되는 지방공연으로 매우 바쁜 나날을 보냈기 때문에 아이들을 대부분 일하는 아주머니에게 맡겨 키우다시피 했어요. 그래서 아이들이 아주머니에게 엄마라 부르고 내겐 심지어 아빠라 부를 정도였다.”고 당시를 회고한다. 현재 미국에서 함께 거주하고 있는 장남 서동헌씨는 “그래도 항상 목도리와 털모자만큼은 직접 뜨개질해서 만들어 주셨다.”고 강조한다.

결국 창립 5년만인 68년, 송민도씨는 자신의 분신처럼 여기던 이 백만불쇼단을 접는다. 아들 서동헌씨 때문이었다. 당시 서동헌씨는 해병대에 입대해 월남 청룡부대로 파병되었는데 어느 날 부대가 베트콩의 습격을 받았다는 소식이 국내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다. 연일 방송과 신문에서는 대서특필했지만 두 달이 지나도록 그 후 소식을 몰라 애태우던 송민도씨는 직접 아들을 찾아 월남으로 떠난다.
 
다행히도 아들은 무사했으나 임시여권으로 월남에 갔기 때문에 ‘오버스테이’, 즉 기한을 넘겨 불법체류까지 하게 된다. 곧 국방부가 나서서 해결해주었지만 전쟁터에 아들을 두고 올 수 없어 아예 사이공에 남는다. 송민도씨는 한국식당을 차려 3년 반 동안 사이공에서 체류한 뒤 곧바로 미국으로 거처를 옮겼고 서동헌씨는 귀국한 이후 월남 청룡부대 출신들로 결성한 6인조 그룹사운드 ‘드래곤스’에서 키보드를 담당했다. 당시 미국에 있던 송민도씨는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회고한다.

“95년, 귀국해 아들과 함께 ‘빅쇼’에 출연했는데 그때서야 그룹사운드 활동을 했었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물론 음악 활동을 하겠다고 먼저 상의해왔더라면 무조건 말렸을 것”이라고 웃으며 회고한다. 트롬본 연주인으로 KBS 경음악단장을 역임했던 작곡가 송민영씨가 바로 그의 남동생이다. 이들 남매는 함께 듀엣으로 노래를 발표하기도 했던 음악가족. 송민영씨는 안타깝게도 지난 2002년 미국에서 타계했다.

‘박수소리로 인해 그 큰 무대에서 견뎠지요’

현재 캘리포니아 오렌지카운티에서 생활하고 있는 송민도씨는 몇 년 전 운전 중 팔이 부러지는 대형사고를 당했다. 그 후 2년 뒤 또다시 넘어져 척추를 크게 다쳐 제대로 거동할 수 없는 상태. 때문에 그 무렵 계획되어 있던 고국 방문을 지금까지 미룰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번 KBS ‘가요무대’의 초청은 그 스스로도 마지막 귀국일 것이라 여기며 무리한 일정을 강행했다. 유독 ‘자존심 강하고 고집 센’ 그는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무대에 나서면서도 아무런 내색도 내비추지 않았다. 더구나 국내에 체류하는 동안 잠을 도통 못 이뤘다고 했다. 피로가 겹치기도 했겠지만 오랜 팬을 만난다는 설렘도 한편 작용했으리라.

"무대에 서니 심장이 멎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박수소리 때문에 그 큰 무대에서 견뎠지요."

고향초, 카츄샤의 노래, 나의 탱고, 나 하나의 사랑... 송민도씨가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부르는 이 노래들을 따라 여기저기서 눈물을 훔치는 방청객들이 적지 않았다. 무대는 매우 감동적이었다. 모든 예술의 감동, 그 최고치는 역시 ‘눈물’이다. 그렇듯 가수 송민도씨는 많은 이들의 아픔을 여전히 이름다운 노래로 어루만져 주고 있었다.

당시 귀국 소식을 겸해 전한 칼럼을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송민도씨는 현재 94세다. 선생을 모시고 있는 장남 서동헌씨는 “어머니는 보통 6시에 기상하셔서 성경책을 보시고 아침식사 후에는 아파트 복도걷기, TV보기 등 건강히 지내신다.”며 최근 사진과 함께 근황을 전해왔다. “이제 나를 기억하는 팬들이 얼마나 계실까요? 혹시 기억해 주신다면 감사할 뿐입니다.” 라는 송민도 여사의 메시지와 함께. 우리나라 가요계 남녀 최고원로이신 손석우, 송민도 선생이 각각 건강하시다는 소식에 갑자기 든든해지는 2017년이다.


글=박성서 음악평론가ㅣ뉴스메이커 2017.03.06

/ 2022.03.12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