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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서 칼럼] (2) ‘하숙생’의 가수 출신 정치인 1호, 최희준의 삶과 노래 (2022.03.09)

푸레택 2022. 3. 9. 09:46

뉴스메이커 (newsmaker.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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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서 칼럼] ‘하숙생’의 가수 출신 정치인 1호, 최희준의 삶과 노래[2] 1960년대 ‘드라마, 영화주제가 시대’를 질주하다 1960년대, 허스키보이스로 등장해 우리나라 가요계를 ‘미성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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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서 칼럼] ‘하숙생’의 가수 출신 정치인 1호, 최희준의 삶과 노래 [2]

1960년대 ‘드라마, 영화주제가 시대’를 질주하다

1960년대, 허스키보이스로 등장해 우리나라 가요계를 ‘미성의 시대’에서 ‘개성의 시대’로 전환시킨 주인공, 가수 최희준(1936.5.30~2018.8.24). 1961년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를 시작으로 ‘하숙생’, ‘맨발의 청춘’, ‘팔도강산’, ‘종점’, ‘진고개 신사’, ‘길 잃은 철새’, ‘뜨거운 침묵’, ‘광복 20년’... 등등 수많은 히트곡을 남긴 60년대 최고가수다.

'가수 출신 정치인 1호'라는 수식어를 달고 화려하게 여의도까지 진출했던 인물. 그러나 실제로는 매우 소박하고 또한 서민적인 캐릭터로 사랑받았다. 90년대에 국회의원으로 의정활동을 하는 동안 자신의 지역구가 둘이라고 늘 강조하기도 했는데, ‘하나는 자신의 지역구인 안양 동안갑구, 그리고 또 하나는 바로 가요계’라고 했을 정도로 가요계의 발전을 위해서도 헌신적이었다. 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장과 한국문예진흥원장도 역임했다. 당시 대중들에겐 다소 생소한 재즈의 스윙 리듬을 비롯한 다양한 장르의 노래들을 발표하며 끝없는 음악적 변신을 시도, 대중음악의 폭을 넓혔다. 거침없이 자유로운 리듬 사이를 드나들었던 가수 최희준의 삶과 노래, 그 두 번 째.

글ㅣ박성서(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해병대 연예대 시절, ‘마이카 족’ 대열에 합류하다

우리나라 대중음악 제2의 르네상스 시대를 앞당겼던 미8군쇼, 다양한 장르의 음악과 수많은 스타들을 배출한 미8군쇼 출신의 대표가수 중 한 명이 바로 60년대 최고의 스타, 최희준씨다. 작곡가 손석우 선생에게 픽업되어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 ‘그림자’, ‘내 사랑 쥬리안’을 잇달아 히트, 인기스타로 발돋움한 그는 1961년 9월, 속칭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해병대 연예대에 입대한다.


5.16 직후 ‘해병대 연예대 모집’ 광고가 신문에 실렸다. 주어진 위문공연을 마치면 개인적인 가수활동을 보장해준다는 조건이었다. 많은 지원자들이 몰렸다. ‘청포도 사랑’의 도미, 블루벨즈의 박일호, ‘마음의 자유천지’의 방태원(방운아), ‘만리포 사랑’의 박경원, ‘방앗간집 처녀’의 남백송, 코미디언 임희춘 등. 심사 끝에 해병대 121기로 입대한 이들은 진해에서 3개월의 훈련을 마친 뒤 곧바로 군 위문공연에 투입된다. 연예대 숙소는 서울 한남동. 공연에는 늘 군 의장대와 고적대가 함께 했기 때문에 트럭 세대로 움직여야 했다.

노래, 코미디, 합창 순으로 꾸며진 이 공연에는 당시 인기 여가수들도 함께 초청되었다. 박재란, 한명숙, 현미, 이춘희, 이금희 등 당대 스타들이 단골 출연자들로 공연장은 주로 해당 지역의 학교 운동장이나 강당 같은 곳이었다. 한 달에 두세 번 나가는 모병(募兵)선전과 위문공연을 제외하고 남는 시간에는 극장 공연을 다녔다. 군 입대를 계기로 미8군쇼 출연을 접은 상태였기 때문에 오히려 이전보다 가수 활동이 활발해졌다. 지방공연 일정도 많아져서 결국 44년형 지프를 구입했다. 드디어 '마이카 시대'를 연 첫 가수가 된 것이다.

음악은 '두고두고 배워가는 것'이라는 손석우 선생의 충고 역시 그를 게을러 지지 않게 항상 일깨워주었다. 무엇보다 군 복무는 그의 가수생활을 더욱 단련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위키리, 박형준, 유주용과 ‘따로 또 같이’ 그룹, 포클로버스 결성

1964년 2월 제대 이후 그의 활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동시에 그는 ‘진고개 신사’, ‘맨발의 청춘’, ‘월급봉투’ 등을 잇달아 발표한다. 이를 전후해 그는 뜻이 맞는 동료가수들과 동아리 그룹을 결성하기도 했다. 바로 ‘포클로버스’다. 행운의 네잎크로버에서 착안한 그룹명으로 멤버는 최희준씨를 비롯해 위키리, 박형준, 유주용씨, 네 명으로 결성된 프로젝트 그룹이었다. 이를테면 각자 솔로로 활동하면서 상황에 따라 팀을 이뤄 무대에 서는, 이른바 ‘따로 또 같이’ 그룹이었다.


이들은 1963년 5월 18일, ‘왈츠의 여왕’이라 불리는 미국 가수 패티페이지의 내한공연 당시 함께 무대에 서며 포클로버스 결성을 공식 선언했다. ‘포클로버스’ 멤버의 공통점은 당시 드물었던 학사가수 출신이자 미8군 출신가수라는 점. 미8군쇼에서 이들은 각각 ‘한국의 냇킹 콜(최희준, 서울대 법대)’. 위키리(서라벌 예대)는 ‘한국의 바비 달린’, 유주용(서울대 문리대)은 ‘한국의 프랭크 시나트라’, 박형준(외국어대)은 ‘한국의 페리코모’라 불렸다. 이들 포클로버스는 이후 두 장의 음반을 발표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10대가수가요제, 방송가요대상을 휩쓸다

아마도 연세가 지긋한 분들이라면 60~70년대, 방송사마다 개최하던 10대가수가요제에 대한 추억이 많을 듯하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가요계 최대 행사이자 축제로 국민들의 눈과 귀가 온통 시상식에 쏠렸다. 올해는 어떤 노래가 가장 인기 있었고 또 어떤 가수가 10대가수상을 받나, 지켜보는 재미도 컸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작된 방송가요상은 TBC 동양방송이 주최한 ‘방송가요대상’이다. 1965년 제1회 대회가 개최되었고 그 이듬해인 66년부터 MBC 10대가수가요제가 시작되었다.


TBC 방송가요대상은 대중가요를 각 부문 별로 시상했다. 최고 인기가수와 신인가수. 작사, 작곡, 편곡, 그리고  주제가와 악단 부문, 특별상 등으로 나눠 시상했는데 첫 해 ‘방송가요대상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최고 인기가수 부문 수상자가 바로 최희준씨였다. (참고로 작사 부문은 ‘사랑해 봤으면’의 하중희, 작곡 부문은 ‘내일 또 만납시다’의 박춘석, 그리고 신인가수 부문은 조애희, 주제가 부문은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그리고 특별상은 작곡가 손석우, 악단 부문은 김광수 악단이 각각 수상했다.)

이 TBC 방송가요대상은 이듬해인 1966년(제2회) 부터는 남녀 최고가수 한 명 씩을 뽑았는데 2회 남녀 최고가수상은 최희준, 최양숙씨가, 그리고 3회 때는 최희준과 김상희씨가 각각 수상했다. 최희준씨가 3년 연속 남자 최고가수상을 수상한 것이다. (참고로 이 방송가요대상의 3회 신인상은 차중락, 이어 4회(1968년) 남녀 최고가수상은 배호, 이미자 그리고 신인상은 정훈희가 수상했다. 69년도에는 남녀가수상을 남진과 이미자, 이어 70년에는 최희준, 이미자, 71년에는 남진, 김상희, 72년에는 나훈아, 하춘화, 73년에는 남진, 하춘화, 74년에는 김세환, 하춘화, 그리고 75년에는 김세환, 이수미 등등이 차례로 수상했다.)

명실 공히 최희준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최희준씨는 제대하자마자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며 발표하는 곡마다 히트 행진을 계속했다. ‘진고개 신사’, ‘맨발의 청춘’, ‘잃어버린 태양’, ‘월급봉투’, ‘뜨거운 침묵’, ‘하숙생’, ‘종점’, ‘엄처시하’, ‘가슴을 펴라’, ‘길 잃은 철새’, ‘팔도강산’, ‘광복 20년’ 등등... 공교롭게도 이 노래들은 모두 드라마와 영화주제가들이었다.

최희준과 60년대 드라마, 영화주제가 전성시대

최희준씨의 전성기였던 1960년대는 또한 드라마주제가와 영화주제가의 전성시대이기도 했다. 문화방송(MBC, 1961년), 동아방송(DBS, 1963년), 동양방송(TBC, 1964년) 등 라디오방송국이 잇달아 개국하고 또한 본격적인 TV시대가 개막되면서 이전까지 서민들의 오락물이었던 악극단 쇼가 점점 퇴조하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안방극장 시대’의 개막과 맞물려 대중가요 판도가 점차 달라지고 있었다.


국민들의 눈과 귀를 온통 사로잡은 드라마, 영화주제가들. 먼저 최희준씨가 발표한 드라마 주제가를 살펴보자면, 1964년 ‘진고개 신사(MBC)’를 시작으로 ‘사랑이 가기 전에(MBC, 1964년)’, ‘그 여자를 지켜라(DBS, 1965년)’, ‘가슴에 불을 켜라(KBS, 1965년)’, ‘수탉 같은 사나이(부산MBC, 1965년)’,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DBS, 1965년)’, ‘뜨거운 침묵(KBS, 1965년)’, ‘월급봉투(MBC, 1965년)’, ‘가슴을 펴라(라디오서울, 1965년)’, ‘하숙생(KBS, 1966년)’, ‘엄처시하(MBC, 1966년)’, ‘길 잃은 철새(JBS ‘특호실 여자 손님’의 주제가, 1966년)’, ‘스타베리 김(KBS, 1967년)’, ‘샐러리맨 출세작전(MBC, 1967년)’, ‘앞을 보고 살아가자(KBS, 1967년)’, ‘기정수의 노래(DBS, 1967년)’, ‘광복 20년(TBC, 1967년)’, ‘8240켈로(KBS, 1968년)’, ‘돌무지(KBS, 1968년)’, ‘감고당 마마(MBC, 1968년)’, ‘임자 있었네(KBS, 1969년)’ 등이다. 당시 인기 드라마는 곧바로 영화화되었다. 이를테면 원소스 멀티유즈(One Source Multi Use) 전략인 셈이다.

영화주제가 취입 또한 활발했다. 1964년 ‘맨발의 청춘(김기덕 감독)’을 비롯해 ‘잃어버린 태양(고영남 감독, 1964년)’, ‘여장부(조긍하 감독, 1964년)’, ‘내 마음은 호수(박성복 감독, 1964년)’, ‘당신만을 위하여(강범구 감독, 1964년)’의 주제가인 ‘아내여 증언하라’, ‘위를 보고 걷자(김기덕 감독, 1965년)’, ‘불량소녀 장미(김기덕 감독, 1965년)’, ‘광야의 호랑이(김묵 감독, 1965년)’, ‘금지된 입술(강태웅 감독, 1965년)’, ‘검은 그림자(편거영 감독, 1965년)’, ‘흑룡강(이만희 감독, 1965년)’, ‘무정의 40계단(전진우 감독, 1965년)’, ‘죽은 자와 산 자(이강천 감독, 1966년)’, ‘종점(김기덕 감독, 1966년)’, ‘상처뿐인 청춘(이명훈 감독,1966년)’, ‘무기와 육체(황학봉 감독, 1966년)’, ‘5인의 건달(이성구 감독, 1966년)’, ‘흑발의 청춘(김기독 감독, 1966년)’, ‘팔도강산(배석인 감독, 1967년)’, ‘폭풍의 사나이(박종호 감독, 1968년)’ 등등...

최희준의 주제가 전성시대의 시작을 알린 첫 노래는 ‘진고개 신사’였다. 이후 전개될 드라마와 영화 주제가의 전성시대를 예고한 신호탄이었다.

시각장애인의 사랑을 그린 드라마, ‘진고개 신사’

미련 없이 내뿜는 담배연기 속에/ 아련히 떠오르는 그 여인의 얼굴을/ 별마다 새겨보는 별마다 새겨보는/ 아-- 진고개 신사.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올리며/ 언젠가 들려주던 그 여인의 노래를/ 소리 없이 불러보는 소리 없이 불러보는/ 아-- 진고개 신사. - ‘진고개 신사(심영식 작사, 김호길 작곡, 최희준 노래)’

1964년에 발표된 ‘진고개 신사(심영식 작사, 김호길 작곡)’는 시각장애인의 사랑을 그린 MBC 라디오 드라마 주제가다. 어릴 적 실명했다가 20여년 뒤에 개안수술을 받은 주인공이 엮는 멜로드라마로, 그러나 현실에 환멸을 느끼고 다시 시각장애인으로 돌아간다는 비극적 메시지를 담았다. 그해 이강원 감독에 의해 영화로도 제작, 김진규, 엄앵란을 주연을 맡았다. 진고개는 서울 충무로2가에 있는 고개 이름.


60년대 뒷골목 청춘들의 사랑과 고뇌, 영화 ‘맨발의 청춘’

눈물도 한숨도 나 혼자 씹어 삼키며/ 밤거리의 뒷골목을 누비고 다녀도/ 사랑만은 단 하나에 목숨을 걸었다/ 거리의 자식이라 욕하지 말라/ 그대를 태양처럼 우러러 보는/ 사나이 이 가슴을 알아줄 날 있으리라. 외롭고 슬프면 하늘만 바라보면서/ 맨발로 걸어왔네 사나이 험한 길/ 상처뿐인 이 가슴을 나 홀로 달랬네/ 내버린 자식이라 비웃지 마라/ 내 생전 처음으로 바친 순정은/ 머나먼 천국에서 그대 옆에 피어나리. - ‘맨발의 청춘(유호 작사, 이봉조 작곡, 최희준 노래)’


우리나라 60년대의 대표적인 청춘영화 ‘맨발의 청춘(김기덕 감독, 1964년)은, 신분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연인의 비극적 로맨스를 그렸다. 사랑을 지키기 위해 결국 동반자살로 삶을 마감하는 비극적 결말로 엔딩 신에서 트위스트 김이 신성일의 주검을 끌고 가는 장면이 압권이다. 이후 ’맨발의 청춘‘은 60년대 뒷골목 청춘들의 대명사 격으로 회자되며 ‘60년대는 맨발의 청춘 시대, 70년대는 바보들의 행진 시대’라는 말도 나왔다. 신성일, 엄앵란이 타이틀 롤을 맡았고 최희준은 이 노래를 통해 처음으로 ‘내지르는 창법(샤우팅)’을 구사했다. 특히 멋진 재즈 리듬의 주제가로 인해 더욱 오래도록 기억되는 영화다.

60년대 생활상을 담은 서민 드라마, ‘월급봉투’

신봉승 극본의 드라마 ‘월급봉투’는 1960년대 서민들의 희노애락이 절절히 배어있는 월급봉투를 소재로 한 코믹 홈드라마다. 같은 학교에 근무하는 부자(父子)간의 월급봉투를 둘러싼 에피소드를 그렸다. 주제가를 부른 최희준 자신도 매우 아끼는 노래로 자신의 40주년 기념콘서트장에서 60년대 월급봉투를 가지고 오면 무료입장시키는 이벤트를 할 정도로 그가 애착을 갖는 곡이기도 하다. 그러나 당시 이 노래는 가요 심의에 걸려 금지되기도 했다. '남한은 이 노래가사처럼 못 산다'며 북한에 의해 역이용 당할 소지가 있기 때문이라는 게 당시 방송윤리위원회의 금지 사유. 노래가 나온 지 1년만의 일이다.


가불하는 재미로 출근하다가/ 월급날은 남몰래 한숨을 쉰다/ 이것저것 제하면 남는 건 남는 건 빈 봉투/ 한숨으로 봉투 속을 채워나 보세. 외상술을 마시면서 큰소리치고/ 월급날은 혼자서 가슴을 친다./ 요리조리 빼앗기면 남는 건 남는 건 빈 봉투/ 어떡하면 집사람을 위로해 줄까. - ‘월급봉투(신봉승 작사, 김호길 작곡, 최희준 노래)’

1964년 김수용감독에 의해 영화로도 제작되어 제2회 청룡영화상에서 특별상(주연)을 수상했다. 신영균, 김승호, 황정순, 방수일, 주증녀 등이 출연했다.

사형수의 이야기를 그린 KBS 드라마,‘뜨거운 침묵’

1965년 방송된 KBS 라디오 드라마 ‘뜨거운 침묵’은 신분이 다른 여인을 사랑한 어느 사형수의 사랑 이야기를 그렸다. 주제가 또한 크게 히트했다. 당시 최희준씨 회고담의 한 부분, “'뜨거운 침묵'은 이후에 나온 '하숙생'과 같은 비긴(beguine) 템포로, 가슴을 찡하게 울리는 전주가 일품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이처럼 다양한 노래가 나오다 보니, 어느 것 하나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극장 공연에서 같은 키의 노래, 즉 '뜨거운 침묵'과 '빛과 그림자'를 붙여서 노래하는 등 최대한으로 상승효과를 내려고 노력했다.” 이 노래는 지난 1999년 소리꾼 장사익씨가 이정식의 색소폰 반주에 맞춰 리메이크, 다시금 사랑받았다.

모래알같이 많은 사람들/ 하필이면 왜 당신이었나/ 싫어서도 아니고 미워서도 아니다/ 너무나 너무나 벅찬 당신이기에/ 말없이 돌아서 조용히 가련다. 별같이 많은 사람들/ 하필이면 왜 당신이었나/ 잘생겨서 아니고 잘나서가 아니다/ 하도나 하도나 높이 뜬 당신이기에/ 고개 숙여 걸으며 두 눈을 감는다. - ‘뜨거운 침묵(심영식 작사, 이봉조 작곡, 최희준 노래)’

젊은이들의 꿈과 야망을 그린 ‘가슴을 펴라’

세상이 무정타고 탓하지 말라/ 내일은 어차피 우리들의 것/ 포켓트에 고린 동전 한 푼 없어도/ 가슴을 펴고 가자 가슴을 펴고/ 대학가의 건달들 슬프지 않다. 거룩한 조상들의 덕분이련가/ 동서도 남북도 가릴 길 없네/ 의지할 건 우리들의 꿈 뿐이로다/ 어깨를 펴고 가자 어깨를 펴고/ 대학가의 건달들 외롭지 않다. - ‘가슴을 펴라(한운사 작사, 황문평 작곡, 최희준 노래)’


1964년에 개국한 민간상업방송 'RSB 라디오서울'이 'JBS’로 이름이 바뀔 무렵 방송된 라디오 드라마로 원 제목은 ‘대학가의 건달들’. 하지만 시국이 어수선해 제목을 ‘가슴을 펴라’로 바꾸었다. 1966년 전응주 감독에 의해 영화화된 이 ‘가슴을 펴라’에서는 신성일, 김운하, 임하가 주연을 맡았다. 패기 넘치는 젊은이들의 굳건한 의지와 꿈을 그린 드라마. 최희준은 이러한 주제가들의 히트와 더불어 거침없이 정상을 질주한다. 계속해서 그는 자신의 이름 옆에 늘 따라다니는 기념비적인 노래, ‘하숙생’을 발표하며 마침내 60년대 최고 가수로 우뚝 선다. (계속)

글=박성서 음악평론가ㅣ뉴스메이커 2020.07.06

/ 20220.03.09 옮겨 적음

https://youtu.be/rIszEV_v8zg

https://youtu.be/JBKIyqdH2J4

https://youtu.be/M9RTES1rZ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