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 한겨레] 천도교는 왜 독립운동 앞장섰나 (daum.net)
[1919 한겨레] 천도교는 왜 독립운동 앞장섰나
동학정신 이어받은 민족 종교
모진 탄압과 핍박에 저항
총독부, 포교허가제 빌미
정치세력 간주 잦은 차별
중앙대교당 성금 동결하고
교주 손병희 모략도 일삼아
<편집자주>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입니다. 역사적인 해를 맞아 <한겨레>는 독자 여러분을 100년 전인 기미년(1919)의 오늘로 초대하려 합니다. 살아숨쉬는 독립운동가, 우리를 닮은 장삼이사들을 함께 만나고 오늘의 역사를 닮은 어제의 역사를 함께 써나가려 합니다. <한겨레>와 함께 기미년 1919년으로 시간여행을 떠날 준비, 되셨습니까?
[1919년 1월30일 경성/오승훈 기자]
광무황제(고종) 서거를 계기로 촉발된 독립운동 모의에 천도교가 앞장선 배경에는 강점 이후 지속된 천도교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모진 탄압도 한 원인이다. 총독부는 성전 건축을 위한 예금을 동결하거나 포교 활동을 억압하기 일쑤였고 3대 교주인 손병희(58)씨를 협박·회유하거나 음해성 소문을 퍼뜨리는 등 비열한 짓도 서슴지 않았다.
천도교는 조선 말기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을 1905년 12월 개칭한 민족 고유의 종교로 갑오년(1894) 동학난 이후 줄곧 탄압을 받아왔다. 특히 자국의 국가신도(國家神道)만을 장려하고 기존의 천도교·기독교·불교·유교 등은 포교허가제를 도입하여 통제·탄압하였던 총독부는, 천도교를 단순한 종교세력이 아닌 정치세력으로 봐 경무국 관할에 둘 정도였다. 경술년(1910) 9월, 천도교회월보사 이교홍 주간 등 간부 4명이 한일병합에 반대하는 편지를 각국 영사에게 보내고 도움을 요청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일제 당국은 이를 빌미로 교단 간부들을 체포·구금하였다. 이즈음 설치된 총독부는 교단의 조직과 운영, 재정 상태, 교인의 동태, 간부의 신상 등에 대해 조사를 벌이고 앞으로 천도교인은 일체의 정치적 불온 행동과 의사를 삼갈 것이라는 서약을 받은 뒤에야 교단 간부들을 석방하였다.
이듬해인 신해년(1911) 데라우치 총독은 직접 손병희를 불러 협박과 회유를 하기도 하였는데 그 탄압의 양상이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천도교가 종교단체라는 것을 부인하면서 날마다 경찰을 파견하여 중앙총부와 각지의 교구를 감시하며, 달마다 재무·회계의 장부를 보고하게 하여 흠을 억지로 찾아내어 다수 징벌을 행한다. 교회의 주요한 인물은 날마다 경찰의 정찰과 속박을 받는다. 지방교도의 예사로운 출입도 구금당하여 곧 노예나 가축 따위의 대우를 받는다. 교인이 비교인과 소송하는 일이 있으면 사리의 옳고 그름을 불문하고 반드시 교인을 패소시켰다.”
무오년(1918) 4월, 천도교 부구총회(部區總會)에서 중앙대교당을 짓기로 결의하고 교인 1호당 10원 이상씩 성금을 내도록 하였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기부행위금지법 위반이라는 명목으로 천도교가 모금한 금액을 전액 동결시킨 일도 있었다. 이때 모인 성금의 일부가 이번 모의 과정에 쓰이고 있다고 한다.
총독부는 손병희 교주 개인에 대한 모략을 통해 교세의 확장을 저지하는 책동도 벌였다. 손병희가 교도의 성금으로 사치를 일삼고 진남포 출신의 기생을 2000원에 빼내 와 첩으로 삼았다고 하며 ‘성미(誠米, 신도들이 하나님의 은총에 보답하기 위해 모으는 쌀)가 첩으로 변했다’고 조롱하는 흑색선전을 일삼았다.
하지만 손병희의 올곧은 됨됨이는 일제도 인정한 바 있다. 일본 망명 시절인 갑진년(1904) 9월7일에 하야시 곤스케 재한 특명전권공사가 고무라 주타로 외무대신에게 보낸 사찰보고서를 보면 “이상헌(손병희의 가명)은 매우 부자인데 유익한 사업에 투자하는 것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정작 자신의 생활은 소박하며 성품도 단정하고 힘써 독서를 한다”고 기록돼 있다.
△ 참고문헌
김정인, ‘1910~25년간 천도교 세력의 동향과 민족운동’(한국사론·1994)
김승태, ‘무단통치기 조선총독부의 종교정책과 한국 종교계의 동향’(한국기독교와 역사·2017)
김주용, ‘3·1운동과 천도교계의 민족대표’(역사와 교육·2016)
윤소영, ‘3·1운동기 일본 신문의 손병희와 천도교 기술’(한국독립운동사연구·2017)
한겨레 2019.01.30 / 2022.03.01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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