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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이향우의 궁궐 가는 길 (5) 왕이 직접 농사짓던 논과 뽕밭, 창경궁 어디쯤일까

푸레택 2022. 1. 26. 13:41

왕이 직접 농사짓던 논과 뽕밭, 창경궁 어디쯤일까 (daum.net)

 

왕이 직접 농사짓던 논과 뽕밭, 창경궁 어디쯤일까

━[더,오래] 이향우의 궁궐 가는 길(5) 창경궁의 정문 홍화문을 들어서면 바로 정면에 옥천교(보물 제386호)가 보인다. 홍화문과 명정문 사이에 위치한 옥천교는 1484년 성종 대에 창경궁이 지어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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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이향우의 궁궐 가는 길(5)

창경궁의 정문 홍화문을 들어서면 바로 정면에 옥천교(보물 제386호)가 보인다. 홍화문과 명정문 사이에 위치한 옥천교는 1484년 성종 대에 창경궁이 지어질 당시 세운 금천교다. 그리고 옥천교 아래 흐르는 물길은 지금까지 500여년을 살아 흐르는 창경궁의 명당수다. 창덕궁 후원 주위의 지하수가 춘당지 동쪽의 계류를 지나 명정문 앞 금천이 되고 계속 남쪽으로 흘러 청계천으로 합류하는 물길이다.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弘化門) 앞을 흐르는 금천(禁川)인 옥류천을 가로 질러 놓여 있는 다리 옥천교. 산천의 정기를 옮겨다 주는 명당수가 흐르는 곳이라고 한다. [사진 문화재청]

 

옥천교에도 여전히 나티가 험상궂은 표정으로 물길을 응시하고 있는데, 대체로 돌다리 규모도 그렇고 별다른 꾸밈이 없이 소박하다. 한껏 공을 들인 것 같아 아무래도 이곳 옥천교에는 뭔가 다른 특별한 게 있는 듯하다. 옥천교의 이름 그대로 시처럼 아름다운 개울 풍경은 모든 궁궐의 명당수 중 가장 아름다워 창경궁의 백미라고도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경복궁의 영제교나 창덕궁의 금천교는 개울 물길이 끊어진 지 오래돼 그 자연스러운 흐름을 잃었다. 그러나 옥천교의 물길은 이 다리가 세워진 이래 500년 넘도록 아직도 맑은 냇물의 속살거리는 노랫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옥천교 개울 양쪽 화단의 매화와 살구나무는 봄마다 눈부신 풍경을 그려내고 한여름 장마철이면 많은 비에 불어난 물길은 가슴을 울릴 만큼 시원하다. 그래서 홍화문에서 옥천교를 거쳐 명정문에 이르는 길은 이렇게 살아 숨 쉬는 물길로 인해 조선 궁궐 중 가장 아름다운 동선을 자랑한다. 옥천교 물길이 아름다운 또 다른 이유는 임금께서 백성의 노고를 헤아릴 줄 알았던 애민 사상이 이 물길을 따라 흘러들어 명당수를 이루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동궐도(국보 제249호)의 창덕궁과 창경궁. [사진 문화재청]

 

열한 배미의 논, 친경으로 백성의 노고를 헤아리다

옥천교의 물길을 북쪽으로 거슬러 따라가다 보면 드디어 시원하게 트인 큰 연못이 눈앞에 펼쳐진다. 연못이 워낙 커 한눈에 전경이 다 들어오지는 않는데 동궐도(東闕圖)에 보이는 원래의 춘당지는 지금처럼 크지 않은 연못이었다. 동궐도에는 춘당지에서 흘러나오는 개울 양옆으로 나란히 열한 배미의 논자리가 그려져 있다.


창덕궁과 창경궁 후원에는 내농포(內農圃)에서 관리하는 논과 뽕밭이 있었는데, 왕이 친히 농사짓던 권농장(勸農場)이 바로 춘당지 옆의 개울을 끼고 나란히 자리한 열한 배미의 논이다. 궁궐 안에 논을 만들어 임금이 직접 농사지어보면서 백성들이 농사짓는 수고를 알고 계절을 살피려 했다. 창경궁 춘당지 옆 권농장의 경관은 봄에 논 갈고 여름에 논을 매고 가을에 추수하고 겨울에 한적한 고독을 느끼게 하는 자연의 순환을 그대로 보여주는 왕의 친경 터였다.

또 동궐도에는 내농포 남쪽으로 물길 위에 걸쳐 지은 관풍각(觀豐閣)이 보인다. 정자 밑으로 개울이 흐르고 그 이름을 풍년을 기원하는 ‘관풍’이라 했다. 『궁궐지』는 “관풍각은 인조 25년(1647) 지었는데 금원의 여러 곳의 물이 모여 마루 밑으로 흘렀다. 북쪽에는 논이 있고 앞에는 연지가 있다”고 쓰고 있다. 정자에 오르면 관풍각 마루 밑으로 흐르는 맑은 물이 마음을 시원하게 하고 그 물은 옥천으로 이어졌다.

영조 22년(1746) 봄. 왕은 후원에 벼를 심는 날 열 한 살의 사도세자와 함께 관풍각에 나아가 세자에게 농사의 어려움을 알게 했다. 이날 영조가 직접 소시를 지어 세자와 여러 신하에게 보이니, 그들도 시를 지어 올렸다. 왕이 세자의 시를 보고 웃으면서 말하기를 “한편으로는 가뭄을 걱정해 비가 내리기를 바라는 뜻이 있고, 한편으로는 나에게 덕을 닦도록 면려하는 뜻이 있다. 내가 나이 50이 넘어 어린 아들에게 더 면려하라는 말을 듣게 되니 부끄럽기도 하고 또한 가상하기도 하다”며 기뻐했다.

그날 왕은 농사를 권면하는 칙교를 내렸다. 그리고 훗날 정조는 열여섯 살 세손시절 후원의 열 가지 아름다운 풍경을 노래한 상림십경(上林十景) 중 제1경으로 ‘관풍춘경(觀豐春耕)’을 읊었다.

관풍춘경
유구는 날개 퍼덕이고 반구는 울어 대니 / 乳鳩拂翅斑鳩鳴
물 가득한 공전에 비로소 경작을 매기누나 / 水滿公田始課耕
본래부터 제왕들이 농사를 부지런히 힘써 / 自是帝王勤稼穡
보기당 아래서 가을 풍년을 고하였었네 / 寶歧堂下告秋成 //乳鳩:어린 비둘기/ 鳩鳴:산비둘기

 

버드나무와 소나무 등 전통 수목을 심어 춘당지 일대는 창경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원유가 됐다. [중앙포토]

 

조선의 왕은 매년 경칩 뒤의 해일(亥日)에 선농단에 나가 신농씨와 후직씨에게 친히 제사를 지내고 손수 쟁기로 논을 갈았다. 왕이 직접 하늘에 제사를 지내 백성의 걱정을 덜어주고 풍년을 기원하는 제주의 역할을 하고 친경을 했던 것이다. 이는 신라시대부터 농업에 근본을 둔 우리 민족의 유구한 전통이었다. 친경례는 임금이 농민들에게 위로주를 돌리며 잔치를 베푸는 것으로 끝이 났다.

태종 때 시작한 친경의식은 1909년 4월5일 순종황제가 제기동 선농단에서 행한 친경례를 마지막으로 폐지되었다. 현재의 춘당지는 논을 없애고 1907년부터 파기 시작해 1909년에 완공된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의 국왕이 친경하던 내농포(內農圃)의 원형을 훼손하고 논자리를 북쪽의 연못과 합쳐서 큰 못으로 만들고 사쿠라 흐드러지는 눈부신 절경 속에서 놀잇배를 띄워 놀았다.


1909년 춘당지를 확장하면서 왕의 내농포가 사라졌고, 해방 후에도 온갖 놀이 시설이 들어섰던 춘당지 주변은 1980년대 정비를 마치고 창경궁의 후원으로 우리에게 돌아왔다. 주변에는 버드나무와 소나무 등 전통 수목을 심어 춘당지 일대는 창경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원유가 됐다. 그럼에도 원래 춘당지 아래쪽에 있던 내농포를 되살려 궁궐에서 친경을 하던 제왕의 어진 마음을 오늘에 재현하지 못한 것은 아쉽다.

현재 창덕궁 후원 옥류천 계곡의 청의정 앞 작은 논에서 매년 문화재청과 창덕궁관리소 주관으로 왕의 친경하던 모습을 시민들과 함께 약식으로 재현하고는 있지만, 청의정 앞은 원래 논자리가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점은 그 자리가 이제는 수목이 우거질 대로 우거져서 농사를 짓기에는 너무도 옹색한 상황이 됐다는 사실이다.

이런 옥류천의 좁고 깊은 계곡에 비하면 춘당지 부근은 평평하게 확 트여 논농사를 짓기에 좋은 지형을 아직 유지하고 있는 곳이다. 경복궁의 후원에 딸린 내농포가 현재의 청와대 경내로 포함돼 흔적조차 없어졌고 창경궁의 논배미도 춘당지의 확장으로 사라지고 말았으니, 조선시대 궁궐에서 왕이 백성을 생각하는 어진 마음으로 친경을 펼쳤던 권농장을 되살리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자못 클 수밖에 없다.

앞으로 문화재청의 복원계획에 의하면 언젠가는 춘당지 부근이 새로이 조성되면 왕이 친경하던 내농포도 복원될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하는 사람이 늘 잊지 말아야 할 백성을 향한 애민사상이 500년을 살아 흐르는 옥천교 물길에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명당수를 바라본다.

글=이향우 조각가 /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