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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14) ‘문래창작촌’, 공장 굴뚝과 문화예술의 건강한 공존

푸레택 2022. 1. 25. 11:46

공장 굴뚝과 문화예술의 건강한 공존 (daum.net)

 

공장 굴뚝과 문화예술의 건강한 공존

[서울신문]서울과 인천을 잇는 국도를 경인로라고 부른다. 부천 소사로 복숭아를 먹으러 간 기억이 있는 세대에게는 경인가도라는 이름이 더 익숙할지도 모르겠다. 이제 국토의 대동맥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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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14) ‘문래창작촌’, 공장 굴뚝과 문화예술의 건강한 공존 

문래동사거리 3층짜리 건물 옥상에서 내려다본 문래창작촌 풍경. 철공소 밀집 지대답게 우중충하지만 예술가들의 작업 흔적이 지붕 여기저기 숨어서 반짝인다.비가 오는 토요일 오후의 문래창작촌은 2차산업 철공소와 3차산업 카페촌이 건강하게 공존하는 삶의 현장이다.


[서울신문] 서울과 인천을 잇는 국도를 경인로라고 부른다. 부천 소사로 복숭아를 먹으러 간 기억이 있는 세대에게는 경인가도라는 이름이 더 익숙할지도 모르겠다. 이제 국토의 대동맥이라면 자연스럽게 경부고속도로가 떠오르지만 19세기 개항 이후 오랫동안 우리 산업의 대동맥은 경인로였다. 전국 곳곳에 대형 산업단지가 줄지어 들어선 오늘날에도 수도권 서남부지역 일대로 확대된 경인공업지대는 여전히 한국 최대의 산업단지라는 지위를 잃지 않고 있다. 경인로의 서울 쪽 시발점인 영등포 일대는 경인공업지대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경인선 철도는 경인로와 나란히 놓였다. 경부선 철도는 서울역을 출발해 경인선과 같은 선로를 타고 달리다가 영등포역을 지나 구로동에 이르면 남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그저 경인선과 경부선의 분기점 노릇만 하던 곳에 1974년 서울지하철 1호선이 완공되면서 구로역이 지어졌다.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20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14회 ‘문래창작촌’은 구로역 광장에서 출발해 영등포역이 바라보이는 문래동 창작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2차산업의 발상지인 경인공업지대가 3차산업 시대에 어떻게 적응해 가고 있는지 살펴보는 기회가 됐다. 산업단지가 클수록 노동자의 희생도 비례해 컸던 만큼 모순을 극복하려 했던 노력의 일단을 확인한 것도 소득이다.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구로역. 한국을 대표하는 산업단지의 중심 역이자 최초의 전철 환승역이다.


구로라는 땅 이름에선 ‘산업 발전의 메카’ 같은 긍정적 이미지보다는 ‘처절한 생존의 현장’처럼 다소 어두운 이미지가 감도는 것도 사실이다. 구로공단이 구로디지털단지와 가산디지털단지로, 구로공단역이 구로디지털단지역으로 이름을 바꾼 것도 상당 부분 이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구로역은 여전히 구로역이다. 역사는 환승역의 기능에 충실하다. 서울지하철 1호선은 개통 당시 청량리에서 인천과 수원과 오가는 두 갈래 노선이었다. 구로역은 우리나라 최초의 전철 환승역이라는 의미를 부여해도 좋을 것 같다.

그럼에도 지하철을 타고 구로역에 내리는 순간 이곳에서는 왠지 즐거운 만남보다는 슬픈 이별이 더 많았을 것 같은 느낌이 스쳐 지나갔다. 여전한 남아 있는 선입견 탓이었다. 하지만 3번 출구로 나서 환하고 깨끗한 광장에서 마주친 사람들의 표정에서는 당연한 이야기지만 처절함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한쪽에서는 아주머니 한 분이 텃밭에서 길렀음 직한 채소를 광주리에 조금씩 담아 팔고 있다. 고구마순이며 애호박이 구매욕을 자극하지만 참는다.

광장 앞 경인로 건너편에는 우리 목적지의 하나인 구로기계공구상가단지가 사거리 좌우로 나뉘어 펼쳐져 있다. 건널목에서 녹색 신호등이 켜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줄지은 초대형 곡물저장고에 CJ제일제당의 로고가 보인다. 이전에는 1960년대 건빵 한 품목으로 당시 7대 기업에 오른 동립산업의 밀가루 공장 라인이었다고 한다. 이 공장 터는 조만간 복합 문화 공간으로 개발될 예정이다. 그 길 건너에는 하동환자동차 공장이 있었다. 1954년 창업한 버스 제조 회사로 1966년 베트남과 보르네오에 버스를 수출한 기록을 남겼다. V자 날개 모양 가운데 H자가 새겨진 로고를 달았던 하동환 버스가 기억났다.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구로기계공구상가. 5만여종의 산업용품을 취급하는 국내 최대 산업용품 유통 상가다.


구로기계공구단지는 일대 산업단지의 지원 공단 역할을 톡톡히 하는 듯했다. 1981년 세워진 국내 최초의 산업용품 유통단지로 5만종 남짓한 기계 관련 부품과 공구가 품목별로 블록을 달리해 배치돼 있다. 4개 블록 24동 건물에 모두 1920개 업체가 들어 있는데, 기계·전기·광산·목공·화공·용접에 소방까지 산업 관련 기자재라면 없는 것이 없다고 큰소리친다. 궂은 날씨에도 건물과 건물 사이 좁은 골목을 오가는 화물차며 오토바이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불황을 말하는 사람이 많지만 상가 입주율은 여전히 100%를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기계공구단지를 나서 동쪽 신도림역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넓게 뚫린 경인로 양쪽으로 플라타너스가 우람하다. 과거 경인로는 왕복 2차로의 길 양쪽으로 일제강점기에 심은 플라타너스가 인상적인 곳이었다. 이제 노거수로 자라난 플라타너스는 당시의 흔적이다. 신도림역에 접근해 가면서 오른쪽에 2011년 세워진 디큐브시티가 보인다. 호텔과 백화점, 뮤지컬 공연장, 영화관, 대형서점, 식당가, 일반 주거시설이 밀집한 복합 공간이다. 40~50층의 고층건물이 밀집해 들어선 이곳은 대성연탄 공장 터다. CJ제일제당의 밀가루 공장 터도 아마 이런 방식으로 탈바꿈하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연탄 공장이 뮤지컬 전용 공연장으로 탈바꿈한 것을 극적 변신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우리 삶의 양상 역시 이렇듯 극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디큐브시티를 지나며 돌아보게 된다. 밀가루 공장은 또 어떤 모습으로 우리 곁에 찾아올지 기대하게도 된다. 35만㎡에 이른다는 디큐브시티 곁에는 대성그룹 계열사 간판을 달고 있는 주유소도 보인다. ‘연탄 공장이 엄청나게 넓었던 모양이군’ 하고 혼잣말을 했다.

투어단 일행이 걷고 있는 왼쪽, 곧 디큐브시티 건너의 대우푸르지오 오피스텔은 한국타이어 공장이 있던 자리다. 주변 조흥화학과 삼영화학 터에는 동아아파트·종근당·동일제강이, 기아특수강 자리에는 대림아파트·롯데아파트·태영아파트가 각각 자리잡았다. 구로구 최대 공장 밀집 지대가 이제는 구로구 최고 주거단지가 됐다. 주민들의 자부심이 높다고 한다.

도림천을 건너 도림교 사거리에서 경인로를 건넌다. 신도림역이 있는 도림천 서쪽이 대형 공장지대였다면 도림천 동쪽 블록에는 지금도 작은 철공소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경인로 남쪽 골목으로 들어섰다. 층고가 높은 작업장 2층에 반원형 혹은 박공 모양의 삼각형 다락이 딸린 건물이 줄지어 있는 전형적인 ‘영등포식 공장지대’가 시작된다.

외지에서 찾아오는 손님을 위한 카페는 보이지 않는다. 일대 철공소 종사자가 끼니를 해결하는 식당과 주점은 몇 개 보인다. ‘엄마밥상 호프’가 눈길을 끈다. 옆에서 걷던 일행에게 “된장찌개가 끓는 백반이 떠오르는 엄마밥상과 치맥이 생각나는 호프는 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네” 하고 말을 건네니 “점심에는 백반을 하고 저녁에는 치맥을 파나 보지, 뭐”라는 답이 돌아온다. 그런지 아닌지 확인해 보지는 못했다. 그럴수록 세련미와는 거리가 있는 이 동네의 레트로 감성이 조금은 매력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림동성당은 명동 종현성당과 중림동 약현성당, 혜화동 백동성당에 이어 국내에서 네 번째로 오래된 성당이다. 가톨릭노동운동이 태동한 곳이기도 하다.


문래동사거리에서 도림동성당에 가려면 도림고가차도로 경부선과 경인선 철길을 건너야 한다. 1921년 영등포공소로 출발한 도림동성당은 명동 종현성당과 중림동 약현성당, 혜화동 백동본당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긴 역사를 갖고 있다고 한다.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잡은 지금의 건물은 1963년 지어진 것이라고 하는데, 아파트 단지가 둘러싸기 전에는 멀리서도 바라보였을 것 같다. 도림동성당의 역사는 우리나라의 가톨릭노동청년회가 1960년 이 성당을 중심으로 창설됐다고 적고 있다. 공장지대에 자리잡은 성당에서 가톨릭노동운동이 태동한 것은 자연스럽다. 가톨릭노동청년회는 이후 우리 노동운동사에 적지 않은 족적을 남겼다. 하지만 이제는 그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다. 대신 회랑이 아름다운 이 성당은 최근 혼배성사의 명소로 떠올랐다고 한다. 비가 뿌리는 이날도 결혼식 준비가 한창이었다.

도림고가차도를 다시 건너 문래동으로 간다. 문래동사거리에서는 우성특수강 건물과 연결된 이웃 우진스텐 건물 옥상에 올라가 볼 일이다. 높지 않은 3층짜리 건물이지만 문래창작촌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철공소 밀집 지역답게 검붉은 색깔이 주조를 이루는 지붕 사이사이에 창작촌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예술가들의 작업이 가까이, 또 멀리 보인다. 철공소와 예술가가 공존하는 문래창작촌은 2003년부터 자연 발생적으로 형성됐다고 한다. 초창기에는 철공소 색채와 예술가들의 원색 작업이 강렬한 콘트라스트를 이루면서 특유의 매력을 뽐냈다지만, 세월이 흐름에 따라 원색이 바래면서 또 다른 조화를 이뤄 내고 있다.

문래창작촌은 벌써 문래카페촌이 됐다. 창작촌이 이름을 알리기 날리기 시작하자 홍대 앞과 대학로 등 서울 중심부에서 이른바 젠트리피케이션으로 밀려난 카페와 음식점들이 아파트형 공장으로 이전한 철공소의 빈자리에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명성이 높아지는 만큼 임대료도 오르면서 이제는 또 다른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자연스럽게 개성 있는 카페와 음식점 거리는 이웃 블록으로 확장되고 있다. 규모는 다르지만 홍대 앞 문화가 망원시장으로 연남동으로 넓어진 현상과 닮은꼴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비가 오는 가운데 진행된 문래창작촌 투어를 마친 참가자들이 망치 상징 조형물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이번 투어에서는 문래창작촌의 명성을 다시 한번 실감했지만, 경인공업지대의 시발점으로 문래동 철공소 동네의 성가도 변치 않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문래창작촌의 의미를 퇴락해 가는 공장지대를 예술과 문화가 대체하는 것으로 규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문래동 철공소들은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고 우리 산업에서 굳건하게 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문래동 현상’은 이질적으로 보일 뿐 대표적인 2차산업과 대표적인 3차산업의 건강한 공존으로 해석하고 싶다. 2차산업의 중심이었던 구로공단은 3차산업을 추구하는 가산디지털단지로 발 빠르게 성격을 바꿨지만, ‘문래동의 공존’은 훨씬 더 오래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 서동철 문화재위원회 위원
사진 김학영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연구위원
출처 서울신문 2020.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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