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한의 '의기' 신영복의 '울림'.. 오류동선 타고 흐른다 (daum.net)
[2020 서울미래유산 그랜드투어] (13) ‘항동 철길’, 유일한의 '의기' 신영복의 '울림'.. 오류동선 타고 흐른다
[서울신문] 지구본을 놓고 돌려 보면 이 세상에 안 가 본 나라가 정말 많다. 사실 대한민국이라고 다르지 않아서 가 보지 않은 곳이 수두룩하다. 그렇다면 서울은 어떨까? 이상하게도 활동 반경은 늘 비슷한 곳, 익숙한 곳을 맴돈다. 그러다 보니 서울에서 긴 세월을 살아도 한 번도 안 가 본 곳이 많다.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20 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는 참 고맙게도 서울의 구석구석까지 우리를 이끌어 준다. 긴 장마가 끝나고 푹푹 찌는 무더위가 한창이던 지난 22일 진행된 ‘제13회 항동철길’ 편은 서울의 서쪽 끝에 위치해 자주 다니기 쉽지 않은 구로구 항동과 오류동 일대의 숨은 이야기와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는 즐거움을 안겨 줬다. 답사 지역의 서울미래유산은 항동철길이 유일하지만 주변 곳곳에 의미 있는 볼거리가 가득하다. 경기 부천시와의 경계에 있는 오류동과 온수동 인근 마을 답사는 온수역(지하철 1호선)에서 출발했다. 온수(溫水)동이란 지명은 예전에 더운물이 나와서 얻은 것이고, 오류(梧柳)동은 오동나무와 버드나무가 많아서 유래했다. 더운물은 온천이니 병 치료에 좋고, 오동나무는 가구를 만드는 데 유용한 나무다. 버드나무는 해열·진통제 성분을 지녀 약용으로 오래전부터 사용됐다. ‘버들 류’(柳)자가 들어간 유한양행을 설립한 유일한(1895~1971) 박사가 세운 유한공업고 교정에 있는 그의 묘소가 이날 답사의 첫 행선지다. 견고하게 우뚝 서 있는 교사 건물을 뒤로하고 교정 중앙에 잘 다듬어진 묘역이 있다.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항동철길은 1959년에 준공된 총연장 4.5㎞의 산업철도다. 우리가 흔히 오류동선이라고 부르는 이 철길은 국내 최초 비료회사인 경기화학의 원료와 생산물을 운송했지만 지금은 운행을 잠정 중단한 상태다. 2015년 항동철길 아트 프로젝트가 진행되면서 만든 간이역사와 간판이 앙증스럽다.
‘참된 인간, 기술연마, 사회봉사’를 교훈으로 삼은 유한공고 교정 선생의 동상 앞에는 그의 어록 중 이런 글이 쓰여 있다. ‘눈으로 남을 볼 줄 아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다. 그러나 귀로는 남의 이야기를 들을 줄 알고 머리로는 남의 행복에 대해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더욱 훌륭한 사람이다.’ 민족의 행복을 늘 염두에 뒀던 선생은 1895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의 본명은 유일형이었다. 9살 때인 1904년 2월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유학을 떠나 1916년 미시간주립대학 상과에 입학했다. 아르바이트로 무역업을 하던 중 3·1운동 소식을 접했다. 미국 동부 필라델피아 리틀극장에서 4월 14일부터 사흘간 열린 한인자유대회에 대학 4학년이던 선생은 대의원 자격으로 서재필, 이승만, 조병옥, 임병직 등과 참가해 실무적인 일을 맡았다. 1926년 귀국해 유한양행을 설립했다. 민족의 실력 양성과 경제적 자립을 염두에 두고 미국에 유학을 보낸 부친의 뜻을 실천하기 위한 것이었고 선생이 품고 있던 민족적 대업을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유한양행은 의약품을 생산하는 동시에 위생용품, 농기구, 염료 등을 수입해 민중의 건강과 생활 향상에 주력하고 우리나라 특산품인 화문석, 도자기, 죽제품 등을 미국에 수출해 민족자본 형성의 기초를 닦았다.
유한공업고 교정 안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 박사의 동상.
그러나 1930년대 들어 일제의 만주 침략과 중일전쟁 도발 등으로 국내외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면서 선생은 193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 체류하며 유럽과 중국 시장을 개척하는 동시에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941년 4월 해외 독립운동단체들이 연합해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개최한 해외한족대회에서 주역으로 활동한 선생은 그해 12월 7일 일제의 진주만 폭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미군 전략정보처(OSS)의 한국 담당 고문으로 활약하기 시작했고 1945년엔 OSS가 수립한 냅코작전에 참여한다. 냅코작전은 반일 민족의식이 투철한 재미 한인을 선발해 한국과 일본에 침투시켜 후방을 교란하는 작전이었다. 핵심 요원으로 선발돼 훈련을 받고 1조 조장으로 임명돼 작전명령을 기다리던 중 일제의 항복으로 이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다.
선생은 광복 이후 1946년 7월 귀국한 뒤 유한양행을 재정비하고 사장과 회장, 대한상공회의소 초대회장으로 활동하면서 1952년 고려공과기술학교, 1964년 유한공고를 설립했다. 소유 주식을 각종 장학기금으로 출연하는 등 자본의 사회 환원에 앞장섰던 선생의 공훈을 기려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선생은 1936년 가족을 위해 천왕산 아래에 붉은 벽돌로 양식 건물을 지었다. 대한성공회가 1914년 강화에 개교한 성미카엘신학원의 새로운 교사로 이 집을 포함한 부지를 1956년 매입해 1961년부터 이곳에서 신학대학원 과정을 시작했다. 한때 신학원장의 사택으로도 사용되던 이 집은 1970년대 이후 집회시설로 전환됐고 1973년 이래 민주화를 위한 젊은이들의 연구집회 장소로서 민청학련 사건의 산실이 되기도 했다. 성공회대에서는 연세대와 성미카엘신학원 교수로 우리나라의 신학교육 발전에 헌신한 구두인(찰스 굿윈) 신부를 기리기 위해 이 집을 ‘구두인관’으로 명명하고 보존하고 있다. 녹색 담쟁이넝쿨이 붉은 벽돌과 멋진 조화를 이룬 구두인관은 담쟁이에 빨갛게 단풍이 든 가을에 한층 더 운치가 있을 것 같다.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자 구로구의 근대건축물로 사랑받고 있다.
신영복 교수의 묘소에는 갖가지 사연을 적은 조약돌들이 놓여 있다.
성공회대 뒷산에는 이 학교 교수로 생을 마친 신영복(1941~2016) 교수가 잠들어 있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와 육사에서 경제학 교관으로 재직하던 중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돼 구속,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 20일 동안 수감 생활을 하다가 1988년 특별가석방돼 출소했다. 이후 작가로, 교수로 많은 글과 강의를 통해 사람에 대한 애정을 토대로 한 관계론을 설파했다. 그가 수감 중 지인들에게 보낸 옥중 편지를 모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강의 노트를 정리한 ‘담론’ 등에는 깊은 울림을 주는 글귀가 가득하다. 어릴 적부터 할아버지 슬하에서 붓글씨를 배운 뒤 민중의 글씨체를 모색하던 중 어머니의 필체에서 영향을 받아 ‘어깨동무체’라고도 불리는 ‘신영복체’를 만들어 적지 않은 작품을 남겼다.
푸른수목원과 항동철길로 연결되는 천왕산의 성공회대 순환길 산책로는 더불어 사는 삶을 강조했던 신 교수를 기리기 위해 ‘더불어 숲’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가 남긴 시화를 담은 팻말 36개가 세워져 있어 사색하며 걷기에 아주 좋다. 가장 먼저 만나는 글은 낯익은 ‘처음처럼’이다.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추운 겨울 저녁에도 마치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언제나 새날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 가는 끊임없는 시작입니다.’
참가자들이 천왕산 성공회대 순환길 초입에 앉아 해설을 듣고 있다. 더불어 사는 삶을 강조했던 신영복 교수의 시화를 담은 36개의 팻말이 세워져 있어 사색하며 걷기 좋다.
2013년 서울 최초로 조성한 시립수목원인 푸른수목원.
신 교수의 묘소에서 잠시 숨을 고른 뒤 숲길을 이어 걸으면 푸른수목원과 항동철길을 만나게 된다. 푸른수목원은 서울시 최초로 2013년 조성된 시립수목원이다. 구로구 항동 일대 10만 3000㎡의 부지에 2100여종의 다양한 식물과 25개 테마원으로 꾸며졌으며 작은 도서관, 숲교육센터 등 생태학습장도 갖췄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방에 하늘을 가리는 것 없이 서울시내에서 보기 드문 시골 같은 풍경을 보존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바로 옆에 항동지구 아파트가 들어서 아쉬움을 안긴다.
드디어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지정된 항동철길로 들어선다. 2015년 항동철길 아트 프로젝트 때 만들어진 간이역 ‘항동철길역’이 앙증스럽다. 항동철길의 정식 명칭은 오류동선이다. 오류선, 경기화학선이라고도 불린다. 구로구 오류2동에서 부천시 소사구 옥길동까지 연결된 단선철도로 1957년 9월 26일 착공해 1959년 5월 30일 준공된 산업철도다. 우리나라 최초의 비료회사인 경기화학공업주식회사(현 KG케미칼)가 1957년 옥길동에 설립되면서 원료 및 생산물을 운송하기 위해 설치했다. 너비 3m에 총연장 4.5㎞인 이 철로는 삼천리 연탄공장과 동부제강 등이 있던 때에는 하루 10여 차례 화물열차가 오갔으나 점차 이용 빈도가 줄어들었고, 서울주택도시공사(SH공사)가 2016년 항동공공주택지구 개발사업을 시작하면서 운행이 잠정 중단됐다. 항동지구 개발사업 완료 후 국방부와 구로구, 코레일, 한국도시철도공단 등 관련 기관들이 철도 운행 재개 문제를 논의했으나 이해관계가 달라 아직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철길 인근의 푸른수목원과 함께 산책로가 조성돼 도심 속 걷기 좋은 길로 꼽히지만 운행이 재개되면 산책로는 폐쇄해야 한다.
빼곡하게 들어선 아파트와 빌라, 다세대 주택들이 병풍처럼 둘러진 가운데에 류순정·류홍 부자 묘역(서울시 기념물 제22호)이 있다. 서울시내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조선 중기의 부자 2대 공신묘역을 나와 몇 블록을 지나면 항동철길의 정비가 되지 않은 구역과 만난다. 철로 주변은 동네 주민들의 텃밭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돌을 걸러 내고 화전을 일구듯 가꾼 밭에서는 장맛비 속에서 살아남은 호박, 옥수수, 콩 등이 철길에 내리쬐는 햇살을 머금고 여물어 가고 있었다.
글 함혜리 칼럼니스트
사진 김학영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연구위원
출처 서울신문 2020.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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