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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 싶은 길, 가고 싶은 거리] 조선 순라군 방망이 소리 들리던 골목에 공예 망치질 소리가 '땅땅'

푸레택 2022. 1. 15. 11:30

[걷고 싶은 길, 가고 싶은 거리] 조선 순라군 방망이 소리 들리던 골목에 공예 망치질 소리가 '땅땅' (daum.net)

 

[걷고 싶은 길, 가고 싶은 거리] 조선 순라군 방망이 소리 들리던 골목에 공예 망치질 소리가 '땅

서울 종로3가 귀금속거리와 종묘 사이의 서순라길. 조선시대 화재나 도적을 경계하기 위해 순라군이 순찰을 돌던 곳이라는 희미한 설명이 어딘가에 붙어 있을 뿐, 어떤 곳인지 감 잡기가 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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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 싶은 길, 가고 싶은 거리] 조선 순라군 방망이 소리 들리던 골목에 공예 망치질 소리가 '땅땅'

종로 귀금속거리와 종묘 사이에 위치한 '서순라길'
공방, 카페, 식당 들어서며 핫플로 부상
공예가들 모여들며 '공예 거리'로 거듭나는 중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서순라길 초입에는 한 잔당 1,000원을 받는 잔술집과 바둑을 두는 노인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우태경 기자


서울 종로3가 귀금속거리와 종묘 사이의 서순라길. 조선시대 화재나 도적을 경계하기 위해 순라군이 순찰을 돌던 곳이라는 희미한 설명이 어딘가에 붙어 있을 뿐, 어떤 곳인지 감 잡기가 쉽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초입엔 술 한 잔당 1,000원을 받는 잔술집 등 남루한 노포가 즐비하고, 한쪽 구석엔 삼삼오오 노인들이 바둑판, 장기판에 취해 있다. 곁눈질로는 서울 구도심의 낡고 오래된, 그렇고 그런 골목으로 보이기 십상이다.


하지만 몇 발짝만 성큼 발걸음을 내디디면 딴 세상이 나타난다. 종묘의 서쪽 돌담을 끼고 창덕궁까지 이어지는 거리에는 아기자기한 공방과 카페, 식당들이 속속 들어서 있다. 지난해 서울시의 도시재생 사업으로 인도가 넓어지고 깨끗하게 정비되면서 순라길의 한적한 정취는 더욱 깊어졌다. 조용하면서도 이색 장소를 찾는 젊은 연인들, 가족 나들이객이 모여들며 서순라길은 활기 가득한 거리로 변신 중이다.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서순라길. 최근 공방, 식당, 카페들이 속속 들어서며 '핫 플레이스'로 부상하고 있다. 우태경 기자

'우연히' 찾았다 '우연히' 매력에 빠지게 되는 길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서순라길. 종묘, 창덕궁, 창경궁 등과 인접해 있다. 그래픽=김문중 기자.


서순라길은 종묘, 창덕궁, 창경궁 등 서울의 대표적인 유적지와 인사동, 익선동, 대학로 등 번화가와 인접해 있다. 이 같은 입지 덕분에 사람들에게 잘 알려졌을 법도 하지만 서순라길은 사람들 관심 바깥에 머물렀다. 주변이 관광객과 행인들로 시끌시끌한 와중에도 옛 모습을 묵묵히 지켜오며 천천히 변화 중이다.


그 덕에 이곳에 발을 들인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다. 바로 '우연히'다. 유명하지 않았던 탓에 이 길을 발견하게 된 것도, 이 길의 매력에 빠지는 것도 모두 '우연'이 허락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23일 오후 서순라길을 찾은 행인 조현지(27)씨는 "창덕궁에서 데이트한 뒤 전철역으로 가는 길에 우연히 들렀다"며 "걷기 좋고 옆에 종묘 돌담이 있어서 한국적인 아름다움과 여유가 있어 좋다"고 말했다. 친구와 함께 이곳을 찾은 박효진(25)씨도 "익선동은 여러 번 왔지만, 서순라길은 오늘 처음"이라며 "묘한 특색이 있고 사진 찍기 좋은 거리라 또 올 것"이라고 했다.

이곳에 터를 잡은 상인, 공예가들 역시 이 길과 우연히 사랑에 빠졌노라고 고백했다. 서순라길에서 양식당을 운영 중인 김지민(40)씨는 "3년 전 익선동의 한 식당에서 일하던 중에 이곳을 우연히 지나가게 됐다"며 "도심에서 이렇게 조용하고 한적한 길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여유와 쉼이 느껴지는 서순라길의 매력에 빠져 2년 전 가게를 내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 거리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K-공예 거리로 변신 중인 서순라길

조선시대 도성 치안을 담당하던 순라군들이 순찰을 돌던 서순라길은 최근 '공예 거리'로 거듭나고 있다. 다양한 분야의 공예가들이 모여 조그만 공방을 속속 열며 공예가들 간의 교류도 활발해졌다. 우태경 기자


순라길은 조선시대 도성 안팎의 치안을 담당하던 순라군들이 순찰을 돌았던 골목이라는 뜻에서 이름이 붙여졌다. 종묘와 창경궁을 감싼 위치 덕분에 서순라길에선 순라군들이 자주 순찰을 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거리엔 '땅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순라군들이 도둑과 화재를 방지하기 위해 육모방망이를 두들기며 길을 돌았기 때문이다. 그 시절 밤마다 들렸던 방망이 소리는 백성들에게 안심을 줬던 소리였다.


그로부터 수백 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서순라길에는 '땅땅'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다. 바로 금속을 다듬는 망치질 소리다. 조선시대 궁중문화가 궐 밖으로 분산되면서 종로에 귀금속거리가 형성됐고, 이 거리를 중심으로 공예 재료상, 공구상 등이 밀집됐다. 이 덕분에 귀금속거리와 맞닿은 서순라길에도 금속, 자수, 규방 등 다양한 분야의 공예가들이 모여 30여 개의 공방, 상점 등을 운영하고 있다.

최근 전 세계에 'K-좀비' 열풍을 불러일으킨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 속 호패, 비녀도 바로 이 길에서 탄생했다. 서순라길 초입에서 전통장신구 공방을 운영하는 윤예노(61)∙박안순(63)씨 부부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남편 윤씨는 43년 동안 옥공예를, 아내 박씨는 25년 동안 매듭공예를 해온 전통장신구 분야의 장인이다.

서순라길 초입에서 전통장신구 공방을 운영하는 윤씨 부부.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 속 호패와 비녀를 만든 부부는 기자가 이에 대해 묻자 민망하다며 멋쩍게 웃어 보였다. 우태경 기자


윤씨 부부는 "공예 하려는 사람들에게 서순라길만한 곳이 없다"며 엄지를 들어 보였다. 부부는 "보통 공예가들은 다른 분야의 공예가들과 협력할 일이 많은데, 이곳에는 공예가들의 네트워크가 잘 형성돼 있기 때문에 협력하기가 좋다"고 설명했다. 아내 박씨는 "이 길은 종묘 돌담을 바라보며 일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자부심을 주는 거리"라며 서순라길에 애정을 표시했다.


이처럼 공예가들이 속속 모여들며 생태계를 이루자, 시에서도 이러한 흐름에 맞춰 서순라길을 '공예특화거리'로 지원하기 시작했다. 예산을 들여 보석 및 금속 공예가들을 지원하는 '서울주얼리지원센터' 두 곳을 지난해 문 열었다. 센터에서는 공예 작업실, 장비 등을 무료 또는 저렴한 값에 제공한다. 센터 관계자는 "개인 작업 공간이나 장비가 없는 젊은 공예가들이 많이 찾고 있다"고 설명했다.


골목 주인들 "부디 이 모습 오래가길..."

서순라길 전경. 종묘 돌담을 따라 쭉 뻗은 거리 왼쪽에는 한옥과 공방, 식당들이 이어져 있다. 우태경 기자.


길을 알음알음 찾아주는 보행객들이 늘자, 한편에선 '젠트리피케이션'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었다. 젠트리피케이션은 구도심이 인기를 끌며 임대료 등이 상승해 기존의 원주민들이 터전을 잃고 떠나는 현상을 말한다. 익선동의 경우에도 몇 년 전부터 독특한 분위기로 인기를 끌며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지만, 정작 주민들은 높아진 임대료를 감당하기 힘들어 정든 동네를 떠나야 했다.


익선동 사례를 지켜본 서순라길의 터줏대감들 역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거리를 찾아주는 행인들에게 고마움을 느끼지만 동시에 이곳을 떠나야 할 일이 생기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다. 서순라길에서 6년째 식당을 운영하는 신성은(52)씨는 "건너편 익선동이 왁자지껄해지면서 예전의 모습을 많이 잃어 안타까웠다"며 "서순라길은 지금의 모습을 유지한 채 천천히 변화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윤씨 부부도 이전의 아픈 기억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부부는 10여 년 전 종로구 예지동에서 공방을 운영했는데, 당시 예지동이 개발되면서 서순라길로 터전을 옮겨야 했다. 부부는 "당시 예지동에도 지금 서순라길처럼 많은 공예가가 모여 있었는데 뿔뿔이 흩어졌다"며 "공예가들의 생태계가 개발과 자본이라는 이름으로 또다시 해체되지 않았으면 한다"고 밝혔다.

서순라길에서 10년 동안 갤러리카페를 운영하며 후배 공예가들을 이곳으로 불러모은 김승희 국민대 금속공예과 명예교수도 젠트리피케이션을 우려했다. 김 교수는 "10년 전 텅텅 비어있던 골목을 공예가와 소상공인이 채우며 거리에 활력을 불어넣어 왔다"며 "지금과 같이 젊은 공예가들과 소상공인들이 마음껏 지낼 수 있는 소담하고도 편안한 거리로 남길 바란다"고 말했다.

글=우태경 기자 (한국일보 2021.0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