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산책] 소설 명시 수필 시조 동화

[신년기고] '겨울을 건너는 법' 안도현 시인 (2022.01.01)

푸레택 2022. 1. 4. 20:34

[신년기고] 겨울을 건너는 법 / 안도현 시인

집을 짓기 전에 아내가 어떤 집을 짓기를 원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비가 새지 않고 바람이 들이닥치지 않는 집이면 된다고 말했다. 어릴 적에 나는 콘크리트 블록으로 벽을 친 엉성한 집에 살았다. 아궁이에 군불을 지펴 겨울을 나던 그 집은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맡에 놓아둔 물그릇이 꽁꽁 얼곤 했다. 요즘은 단열재 두께에까지 정해진 규정이 있어 웬만해서는 외풍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뿐이랴. 온돌 바닥에 가스보일러를 들이고 천장에 전기히터를 달고 거실 구석에 벽난로까지 설치한 다음에 공사가 끝났다. 다행히 벽난로가 열효율이 높아 장작 네댓 개로 서너 시간 밤을 견딜 수도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건 너무 요란하게 난방 시설을 갖춘 건 아닌가? 스산한 마당을 내다보다가 문득 겸연쩍어지는 것이다. 마당에 심어 놓은 나무들은 아무런 월동 장구도 없이 겨울을 버티고 있다. 그들은 일찌감치 스스로 잎을 몸에서 떼어내고 햇볕으로부터 온기를 받아들이는 걸 포기했다. 매서운 북풍이 불어와도 이동하지 않고 폭설이 내려도 꿋꿋이 그저 자기 자리에 서 있다. 개구리와 뱀이 겨울잠을 자러 숨은 뒤에도 꼼짝하지 않고 말이다.

사실 나무들은 몸에 붙은 잎들을 내보내기 위해 잎자루가 달린 부분에 일찍부터 떨켜를 만들어두었다. 떨켜로 잎을 떼어내기 위해 나무가 들인 에너지는 엄청나다고 한다. 그 이별의 방식을 미리 준비한 덕에 마당의 키 큰 철쭉과 매화나무와 살구나무는 외롭지 않아 보인다. 덜어낼 줄 아는 나무가 사람보다 장하다.

이와는 다르게 봄이 올 때까지 끈질기게 잎을 떨구지 않고 사는 나무들도 있다. 감태나무가 대표적이다. 가을에 물든 잎을 봄이 올 때까지 몸에 달고 산다. 그는 4월에 새순이 돋기 시작할 즈음에 가서야 낙엽을 떨어뜨린다. 어찌 보면 미련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양지바른 겨울 산을 오르다가 감태나무 이파리가 줄기를 포옹하듯 온전하게 감싸고 있는 모습을 만나면 왠지 반갑다. 감태나무의 생존 전략은 이별의 시간을 유예함으로써 혹한을 버티는 것이다.

굴참나무, 신갈나무, 상수리나무와 같은 참나뭇과의 식물도 마른 잎을 쉽게 몸에서 떼어내지 않는다. 나는 뒷산 산책길에 사는 어떤 참나무의 가지에 이파리가 몇 개 남았나 헤아려보면서 1월을 보낼 생각이다. 나를 한심하게 여기는 사람에게는 이런 말을 해줄 것이다. 세상에 의미 없는 일이란 없지요.

마당 한쪽에서 연못은 지금 스스로를 결박한 채 침묵하고 있다. 연못가의 부들과 노랑어리연꽃도 부동자세다. 영하의 밤이 열 번도 넘게 지나갔으니 얼음장의 두께가 한 뼘은 될 것이다. 작년 봄에 연못으로 이사 온 잉어 두 마리는 얼음장 속에서 어떻게 지낼까. 그들이 낳은 수백 마리의 새끼들과 버들치와 미꾸라지는 무사할까. 물고기들은 11월에 서리가 내린 이후로 먹이를 던져주어도 수면 위로 떠오른 적이 없었다. 나는 그들이 아가미로 뾱뾱하며 먹이를 먹는 소리를 들을 수 없었고.

얼음이 얼면 물속에 산소 공급이 줄어든다고 한다. 이른바 저산소 상태에서 몸을 움직이지 않고 겨울을 나는 물고기들의 삶의 방식이 신통하기만 하다. 코로나19라는 역병이 퍼지면서 우리는 얼음장 속 물고기처럼 정지 상태로 세상을 살아간다. 창을 여는 일보다 창을 닫는 일이 늘었고, 열쇠보다 자물쇠를 쓸 일이 많아졌다. 세상이 정전(停電)된 것이다.

예전에 영화를 보다가 필름이 끊기거나 정전이 되면 영화관 안은 야유와 함께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고함을 치거나 휘파람을 불며 항의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틈을 이용해 옆자리의 연인에게 재빨리 입을 맞추는 자도 있었을 것이다. 그 영화관의 정전 상태는 마치 순간적인 축제 같기도 했다. 그게 뜻하지 않은 작은 축제라면 우리가 통과하고 있는 이 시간을 지금보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 않을까. 누군가 한 말이 떠오른다. 우리는 마스크를 쓰고 눈으로 대화하는 법을 익히게 되었잖아요.

영화관의 그 작은 소란은 전기가 새로 들어오면서 긴 침묵으로 바뀌었다. 일상의 회복이란 침묵하면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 우리 앞에 정전 대신에 종전(終戰) 선언이라는 뉴스가 날아올지도 모른다. 마음의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은 덕분에 몸에는 전에 없던 활력이 생길지도 모른다.

연못의 얼음장 사이에 낀 낙엽들을 보며 어떤 나무에서 내려온 아이들인지 하나하나 살펴본다. 참나무잎이 많고 팽나무잎도 있고 강아지풀도 있다. 연못에 눈이 덮이면 눈 위에 멀리 강릉 사는 외손녀의 이름을 써봐야겠다.

글=안도현 시인 (경향신문, 2022-01-01)

https://youtu.be/ttciuimqhZM